The All-Rounder’s Guide to the Entertainment Industry RAW novel - Chapter (279)
전천후 연예생활백서 279화(279/280)
***
교수를 중심으로 학생들이 둥근 반원을 그리며 높아지는 좌석에 앉는 독특한 형태의 강의실의 가장자리.
“후우.”
전천후가 낮게 한숨을 쉬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계절이 계절인 만큼 더운 것은 아니었고, 긴장을 크게 한 탓이었다.
‘식은땀이 다 나네.’
종영까지 겨우 이 주만을 남겨둔 <공주와 기사>가 절정의 인기를 구사하고 있는 요즘이다. 그런데 그 인기의 중심에 있는 ‘공주’를 데리고 잠입했다. 그것도 배우를 꿈꾸는 꿈나무들이 빼곡한 연극원 강의에.
“힛.”
“마스크는 제대로 써.”
세상 신난 표정으로 움찔대는 소화에게 작게 속삭인 전천후가 테이블 아래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강의실 건물 후문 쪽으로 밴 대기 완료됐습니다. 나오시기 전에 연락만 주세요!] [학생들에게 나눠줄 주전부리. 윤미정 선생님 이름으로 세팅 끝났습니다! 강의 끝나기 5분 전에 가지고 갈게요!] [학교 측이랑 다시 한번 이야기 했···.]만약을 위해 취해둔 이런저런 조치에 대한 메시지가 빼곡하게 도착해있는 것을 보자 그나마 조금 안심이 되긴 했지만···.
‘내가 미쳤지.’
그래도 둘이서 몰래 강의실에 입성한 것은 명백히 무리수였다.
몇 번을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전천후를 향해 소화가 장난스레 웃으며 속삭였다.
“에이. 소심하셔.”
“뭐, 인마? 지금 너 때문에···!”
“쉽게 들어왔잖아요? 안 들키고.”
“그거야···!”
“제 덕분이죠.”
발끈한 표정과 달리 전천후는 부정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입실은 의외로 수월했고, 소화의 준비성이 빛을 발한 것도 사실이었다.
– 저한테 다 생각이 있어요. 대표님! 나만 믿어!
‘저만 믿으라더니.’
그러고 며칠— 그 사이, 전천후는 안전한 잠입을 위해 온갖 종류의 방법을 고민하고, 실행했다. —을 잠잠하다가, 또 예고 없이 사무실을 찾아온 소화가 의기양양한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헛웃음이 나왔다.
– ···이거, 이거 뭔데?
– 뭐긴요? 대한예술대 연극원 야잠이죠. 야잠 모르세요?
– 아니, 알지. 아는데. 너 이건 대체 어디서···?
– 구했죠! 어떻게 구했는지는 비밀··· 인데, 정 궁금하시면 말씀드릴 수도 있고요.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소화가 내민 것은 야잠이었다. 교내에 굴러다니는 학생 중 절반이 입고 다닌다는, 학교명과 마크가 대문짝만하게 자수 된 초록색과 빨간색 야구잠바 말이다.
– 하. 됐어. 어떻게 구했는지는 알면 더 우울할 거 같으니까 말하지 마. 근데··· 이거. 나 입으라고?
– 당연하죠! 대표님은 초록색, 저는 빨간색. 크리스마스 느낌 나고 좋지 않아요? 윤쌤 마지막 강의가 크리스마스 바로 전 주잖아요.
– 야···.
– 아? 초록색 싫어하시나? 그럼 반대로? 전 아무거나 다 잘 받아요.
– 지금 색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이걸 어떻게 입어?
– 왜요? 이거 남자 사이즌데. 그리고 대표님 평소 의상대로 들어가면 백 퍼센트 걸린다니까요?
의상이고 뭐고. 그냥 안 가면 걸릴 일도 없다는 말을 목구멍으로 겨우 삼킨 전천후는 야잠 패션이라도 피해 보려고 노력했으나,
– 그래도 이거··· 이걸로는 안 돼. 지금 12월인데. 누가 야잠만 입고 돌아다녀? 사람들이 쳐다볼걸? 춥기도 춥고.
– 에이, 아녜요. 우리 학교 애들 보면 한겨울에도 이거 입고 잘만 돌아다녀요. 추울 정도면 그건 전부 나이 탓··· 아?
내상만 잔뜩 입고, 졌다.
‘어우.’
아픈 기억을 털어낸 전천후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어 강의실을 빼곡 채운 학생들의 뒤통수를 구경했다.
– 교수님이 윤쌤이잖아요. 얼굴 가리고 늦게 들어가서 구석에 숨어있으면 아무도 모를 거예요. 다들 쌤한테 집중하느라 누가 들어오든 쳐다도 안 볼걸요?
반신반의했는데. 정말로 그랬다.
“그럼, 다음 질문?”
“저요!”
“또 자네야? 오늘 질문이 너무 많은데? 나한테 궁금한 게 그렇게 많나?”
“네! 교수님! 매주 말씀드리고 있지만, 정말 팬입니다!”
마지막 수업이라서 다들 들뜬 것인지, 아니면 늘 이랬던 것인지. 어느 쪽이든 강의 분위기는 무척 훈훈했고, 강의실의 모든 학생이 오롯이 윤미정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뭐.’
전천후는 저도 모르게 어깨에 들어간 힘을 뺐고, 인정하기로 했다.
‘나쁘지는 않네.’
– 대표님도 궁금하시잖아요. 연기하는 윤미정 배우님 말고, 강의하는 윤미정 교수님. 올해만 하는 특강이라면서요. 또 언제 할지도 모르는데. 대표님도··· 막상 보면 좋으실걸요?
소화의 말이 맞았다고 말이다.
***
[Q&A.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윤미정은 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강의로 심플한 선택을 했고, 학생들의 반응은 무척 좋았다.
질문, 그리고 답변.
여타 강의라면 ‘굳이?’ 싶을 수도 있었으나, 교수가 윤미정이라면 사정이 달랐다.
국민배우 윤미정.
인기 좀 끈다 싶은 배우에게 한 번씩 붙기 마련이라지만, 윤미정은 정말로 국민배우였다.
그러니 배우 꿈나무들에게 “무엇이든 물어보라. 무엇이든 대답해주겠다”라는 윤미정과의 대담은 엄청난 기회로 다가왔을 터.
“어떻게 해야 교수님처럼 오래 연기할 수 있나요?”
“교수님도 연기가 어려운 순간이 있습니까?”
“그동안 찍었던 작품 중 가장 힘들었던 연기가 궁금합니다!”
“교수님! 첫사랑 이야기해 주세요!”
배우로 살아가는 방법, 연기, 작품···. 심지어 조금 사적인 이야기까지. 다양한 질문이 나왔고, 윤미정은 “무엇이든 답해주겠다”라고 했던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
간혹, ‘요즘 애들은 이런 게 궁금한가?’ 싶기도 했지만, 그녀의 말문을 막을 정도로 당황스러운 질문은 없었고.
“그건 말이지···.”
천천히, 그러나 지루하지 않게. 윤미정은 모든 질문에 진심으로 답했다. 즐거웠다. 그만큼 시간도 빠르게 흘렀다.
“마지막은···.”
어느새 마지막 질문만이 남았고,
“맨 앞줄. 문지호 학생이 해볼까?”
윤미정은 동기들이 신나서 손을 드는 동안 내내 조용했던 학생 한 명을 지목했다. 대한예술대에 진학했다는 것이 신기할 만큼 숫기가 없어서 알게 모르게 윤미정의 시선을 끌었던 학생이었다.
“어···.”
자기를 지목할 줄은 몰랐다는 듯 어쩔 줄 몰라 하던 학생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교수님께서는 정말 많은 걸 이루셨잖아요? 그러니까···. 좋은 작품도 정말 많이 하셨고. 상도 많이···. 전 국민이 배우 윤미정을 다 알고요. 그런데···. 그런, 그런 교수님께서도.”
더듬거리는 학생을 보며 윤미정은 미루어 짐작했다.
아, 저 아이는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교수님께서도 부러운···.”
정답이었다.
“부러운 배우나 사··· 사람이 있··· 있으셨나요?”
교수, 그리고 배우. 그것도 보통 배우가 아니라 윤미정. 현장에서 배우 대 배우로 만났다면 감히 눈을 맞추기도 어려웠을 대선배에게 할만한 질문이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정적.
두 시간 내내 화기애애했던 강의실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고, 질문은 던진 학생은 심지어 눈을 꽉 감은 채였다.
“오늘 중 제일 흥미로운 질문이네요.”
하지만 윤미정은 달랐다.
“당연한 질문이기도 하고.”
부럽다···라. 학생의 질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나지막이 중얼거린 그녀가 몹시 긴장한 표정으로 제게 집중하는 눈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물론이죠.”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임은 없었다.
“여러분들이 보기에 배우 윤미정은 다 가진 사람 같나요? 당연히 누구를 부러워해 본 적도 없을 거 같고.”
네에. 교수님은 정말 다 가지셨잖아요! 연기력! 미모! 재력!
긍정을 말하는 외침들이 강의실을 가득 채웠고,
“그래요?”
윤미정은 살풋 웃었다.
“어쩌지?”
누군가를 부러워해 본 적 없는 인생이라니. 그것이 제 이름과 어울리는 한가? 아니. 절대. 절대로 아니다.
“난 늘 부러운 사람 투성이었는데.”
윤미정이 허심탄회한 얼굴로 어린 학생들을 향해 고백했다.
“비단 선·후배나 동료 배우를 가리키는 건 아니에요. 아마··· 여러분만큼, 아니, 여러분보다 훨씬 어렸던 시절부터.”
배가 고프던 시절에는 원하는 것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사람을, 연기를 시작하고 나서는 연기를 잘하는 사람을, 더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나보다 더 연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언제나, 늘. 부러워했노라고.
“많이들 말하죠. 타인을 부러워하는 인생은 행복하지 않다고. 행복할 수 없다고. 정말 그럴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것은 당연한 일이며, 결코 부끄러운 일도 아니라고. 다만,
“무엇을 부러워하는가에 달렸어요.”
다시 태어난다거나, 갑자기 십 년쯤 어려지고 싶다거나, 이미 떠난 사람을 되살린다거나, 혹은 인생을 다시 한번 사는 것—여기서 전천후가 움찔했다—이 아니라.
“꿈꿀 수 있는 것. 노력하면 손에 잡을 수 있는 것.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면. 마음껏 부러워하세요. 그리고 노력하세요. 버티세요.”
아주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면, 부디 마음껏 부러워하라고. 노력하고, 버티라고.
“그 버팀의 끝에···. 여러분도 언젠가 발견하게 될 거예요.”
그러다 보면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막연한 부러움은 바라는 것이, 꿈이 되고, 그 바람이, 꿈이, 어느새 현실이 되었다는 것을.
“정말로요.”
고요해진 강의실.
“그···.”
처음 질문을 던졌던 학생이 다시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어, 음. 그런데요. 부럽고, 바라고, 그래서 노력했는데도 손에 쥘 수 없는 것도 있지 않을까요? 아··· 아닌가요? 교수님께서는 부러워했고, 바랬는데 이루지 못한···. 그런 건 없으신가요?”
돈, 명예, 인기. 심지어 남들이 타고났다고 말하는 연기까지도. 바랐던 많은 것을 이룬 윤미정이 흐릿하게 웃었다.
“부러워하고, 바랬는데 이루지 못할 거라···. 음. 그래요. 이것만큼은 아무리 바래도. 내 능력이나, 노력만으로는 힘들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했던 것도 분명 있었어요.”
세월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고요한 시선이 강의실 가장 뒤편, 나란히 앉아서 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에게 향했다.
“이를테면···.”
동시에 그녀는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빨간 점퍼를 입고 공벌레처럼 온몸을 수그린 이가 제 옆에서 누구보다 신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초록 점퍼를···.
– 인제 그만 말 좀 해보지?
– ···네?
– 전천후 사원이라고 했지? 나한테 할 말 있잖아. 그래서 계속 얼쩡거리는 거 아니야? 이렇게 자꾸 먹을 거 쥐여주면서.
– 아, 아뇨. 그건 선생님 목마르실까 봐.
– 그래서. 막둥이 잘 부탁한다고?
– 어···. 그건···.
– 아니야? 아니면 말고. 하긴. 매니저도 아니고, 홍보팀이라며? 내가 오해했···.
– 맞습니다. 선생님, 우리 소화.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니까 아직 어린, 새싹 같은 배우를 위해 애를 쓰던 시절을 말이다.
“사람.”
외전 28. #디렉터스컷, 보통날
말에는 힘이 있다.
이것은 노회한 어느 배우가 남긴 한 마디의 기원.
그리고 아주 먼 훗날 현실이 될,
그래서 슬프지 않고 행복한 어떤 이야기다.
***
“컷!”
찬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어느 가을날의 KDS 수원 세트장.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걸걸한 목소리가 전하는 촬영 종료 소리에 맞춰 현장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졌다. 감사의 목소리도 줄을 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선생님,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정말···.”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저를 부르는 목소리들을 향해 귀찮다는 듯 휘휘 손을 내저은 윤미정이 눈앞으로 다가온 커다란 손에 의지해 몸을 일으키며, 츳- 하고 혀를 찼다.
“왜들 이렇게 난리야? 누가 보면 엄청난 대장정이라도 끝낸 줄 알겠네. 그냥 카메오야, 카메오.”
그리고는 고새를 못 참고 그녀 옆으로 딱 달라붙은 카메라와 그 주인을 흘겼다.
“기 PD도. 이런 거까지 찍고 싶어? 그 연차에 카메라까지 직접 들면서?”
온통 KDS 천지인 세트에 유일하게 JWN 로고가 박힌 카메라를 들고도 뻔뻔한 얼굴이 윤미정을 마주 보며 히죽 웃었다.
“에이, 그냥이라뇨. 선생님께서 그냥 카메오는 아니죠.”
윤미정의 손을 붙잡은 남자. 눈앞의 배우 덕분에 퇴사 후 처음으로 KDS 촬영장에 발을 들이고도 여유만만인 기원석이 허허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엄청나게 특별한 카메오라면 또 모를까. 그리고 이런 거라뇨?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생님 연기하시는 모습을 담는 건데요? 당연히 제가 직접 해야죠.”
“하여튼 말만 잘해. 말만. 적당히 나 떠드는 것만 찍겠다고 꼬셨으면서 여기까지는 뭐 하러 따라와? 번거롭게.”
그러자 이번에는 기원석의 등 뒤에서 퉁퉁 부은 얼굴을 쓱 내민 여소진이 중년의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입을 삐죽거렸다.
“선생님도 참! 저희가 왜 그러시는지 아시면서.”
커다란 눈이 봉긋하게 부풀어 오른 모양이 자칫하면 눈물이라도 톡 떨어뜨린 기세였다.
“아쉬워서 그렇죠. 아쉬워서.”
“아쉽긴. 평생 연기했는데 새삼스럽게.”
“하지만···!”
무어라 더 대꾸하려던 여소진이 슬쩍 눈치를 주는 기원석의 눈빛에 입을 꾹 다물고는 손에 쥔 두툼한 기획안을 만지작거렸다.
<윤미정의 보통날>
어찌나 많이 만지작거렸는지 손때가 잔뜩 묻은 기획안에 적힌 제목은 <윤미정의 보통날>.
– 제목이 너무 밋밋하지 않아? 재미가 없잖아. 재미가. 뭘 하겠다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누군가의 지적처럼 기원석과 여소진의 주전공인 예능이라기에는 너무 막연했고, 그렇다고 드라마라고 하기에는 배우의 이름이 전면에 내세워진 애매한 제목이었다.
그러나.
– 재미나 흥미를 위해서 찍으려는 목적은 아니니까요.
당연했다. 그들은 지금 촬영 중인 영상은 예능이나 드라마가 아니었으니까.
‘차라리 드라마였음. 좋겠네. 아니면 예능이라도. 그렇지?’
‘…그렇지.’
눈빛만 봐도 서로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는 콤비.
울적한 얼굴로 한발 앞서 걷는 윤미정의 작고 왜소한 등을 바라보는 기원석과 여소진은 <윤미정의 보통날> 제작을 확정 짓던 얼마 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 그나저나. 윤미정 선생님은 정말로 전부 다 정리하시겠대? 그냥 하시는 말씀이 아니고?
–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는데···. 빈말을 하시는 분은 아니니까요. 쉬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어, 음···. 오래.
– 어휴. 오래는 무슨. 그 연세에 오래 쉬시겠다는 건 그냥 은퇴하시겠다는 말씀···. 아, 알았어! 둘 다 인상 좀 풀지? 근데···. 따로 작품 안 하시고 진짜 여기서 그만하신대? 그, 뭐냐. 주말 드라마 카메오? 정말 그걸로?
– ···확실한 건 아니에요. 저희도 촬영하면서 이것저것 내밀어 볼까 싶기도 하고요.
– 그래. 다른 배우도 아니고 윤미정이잖아? 본인 주연 작품도 아니고 카메오 출연으로 끝이라니···.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몰라?
– 평범하게, 보통날처럼 끝내는 게 좋지 않냐···고 하시더라고요.
– 어휴. 하여튼 배우들 특이해. 아무튼 잘 뽑아봐. 보통날이든 뭐든. 국민배우 윤미정의 마지막 기록이 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랬다. KDS 예능 콤비 출신으로 퇴사와 동시에 윤미정이라는 배우를 만났고. 이후 예능은 물론이요, 드라마까지 아우르게 된 이들.
– 네. 그럴 겁니다.
기원석과 여소진은 지금 배우로서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윤미정의 이야기를 담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윤미정이 주변을 정리하는 중이라고 그새 소문이 돌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그냥 대선배를 향한 정중함의 표현일까.
“선생님! 함께 연기해서 너···너무 좋았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녀를 기다리는 후배들의 줄은 오늘따라 유독 길었다.
한 앵글에 담겼던 배우부터 잠깐 현장을 구경하러 온 것 같은 이들까지. 아는 얼굴과 그렇지 않은 얼굴이 고루 섞여 있었는데.
“여··· 영광이었습니다.”
끝을 장식한 이는 윤미정과 두어 마디 대사를 나눈 이 드라마의 주연이었다.
‘얘는 인사할 때도 이러네?’
어찌나 NG를 많이 내던지. 십 분이면 끝날 촬영을 세 시간을 해서일까?
면목이 없긴 한지. 눈도 못 마주치는 후배를 물끄러미 보던 윤미정은 이내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연보다 조연이 인기라지?’
KDS에서 오랜만에 주말 프라임 타임에 어울리는 시청률을 뽑았다고 칭송받는 이 드라마에 대해서라면 윤미정도 보고들은 게 있었다.
‘스트레스 어마어마하겠어.’
다른 때라면 “왜 연기에 집중하지 못하느냐”, “대사를 제대로 외운 것은 맞느냐”라고 엄하게 한소리를 했을지도 모르나, 오늘은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 고생했어요.”
“아닙니다. 선생님. 그, 저···! 다른 작품에서 또 뵙고 싶습니다!”
“음. 어쩌지? 그건 장담이 어려운데?”
“ㅇ···예? 제, 제가 혹시 오늘 무슨 실수를···!”
“아니, 그건 아니고. 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또 언제 본다는 약속은 쉽게 못 하지.”
“그런···!”
“수고해요.”
짓궂은 농에 당황한 배우의 어깨를 두어 번 다독인 윤미정이 천천히 복도로 나오고.
“선생님, 어디 가시려고요? 저희랑 같이···!”
“같이 가요!”
그와 동시에 양옆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다시 나타났다. 윤미정의 미간이 왈칵 구겨졌다.
“극성, 극성!”
요즘 들어 더 집요해진 남녀.
“화장실 갈 거야! 따라오지 마!”
가만뒀다가는 정말이지 세상 끝까지 쫓아올 것처럼 구는 기원석과 여소진을 한마디로 일갈해 양옆에서 떨어뜨린 윤미정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언제부터였더라? 저 치들이 저렇게 극성스럽게 굴기 시작한 게.’
– 예? 매니저를 따로 안 쓰신다고요?
어찌어찌 만났던 몇 명의 매니저가 있었고, 몹시 나쁜 이유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름다운 마무리라고는 할 수 없는 이유로 헤어졌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에게 자신을 맡기는 것보다 스스로를 책임지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 그럼 활동은요? 스케줄은 어떻게 다 소화하시는데요?
그래서··· 혈혈단신(孑孑單身).
어지간한 일은 윤미정 혼자. 현장으로의 이동처럼 타인의 도움이 꼭 필요한 때에만 단발성의 인력을 빌려 쓴다는 것은 알았을 때?
– 선생님! 이게 뭐예요! 몸이 안 좋으시면 저희한테라도 연락하셨어야죠!
아니면, 그렇게 혼자 활동하다가 쓰러진 어느 날. 마지막 통화였다는 이유로 병원에서 여소진에게 연락이 갔을 때였을까? 혹은···.
‘어휴.’
따져보니 의심이 가는 정황이 한둘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제일은 역시 얼마 전, 새 프로그램을 하자며 찾아온 둘에게 거절의 의사를 건넸을 때일 터.
– 아니야. 다른 사람을 찾는 게 좋겠어.
– 어···. 마음에 안 드세요? 어떤 부분이···? 말씀해주시면 저희가 최대한 반영을···!
– 그런 게 아니고. 나, 이제 슬슬 정리할까 싶거든. 배우 윤미정.
– 예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냐고. 너무 갑작스럽고, 너무 이르다면서 당황해하는 얼굴들을 보니 조금 미안했지만···.
‘오래 했지.’
윤미정은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했다.
‘벌써 여든하고도···.’
앞자리가 마지막으로 바뀌면서부터 카운트하지 않았더니 그마저도 가물가물했다.
‘몇 년이 지났더라?’
아무튼. 그녀는 십 년이면 변한다는 강산이 여덟 번 바뀌는 것을 보았고, 그중 대부분의 세월을 배우로 살았다.
[국민배우 윤미정]이름 앞에 붙는 ‘배우’라는 명칭은 당연했고, 배우 앞에 붙은 ‘국민’이라는 호칭도 더는 쑥스럽지 않아질 만큼 긴 세월이었다.
‘그러니까.’
이쯤 그만해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더 늦기 전에.’
자꾸만 머릿속에서 뱅뱅 도는 단어들을 정리하는 게 힘겹지만, 예전보다 조금 더 시간을 들이면 대사를 외울 수 있었다.
몸을 쓰는 것과 연기도 마찬가지.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이 덜그럭댔지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연기를 내보일 수 있는 순간.
‘바로 지금.’
지금이야말로 배우로서 아름다운 끝을 낼 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들 왜 난리인지 몰라?”
나지막하게 혼잣말하는 윤미정의 머릿속으로 저기 멀리 복도 끝에 떼어놓고 온 여소진의 목소리가 울렸다.
– 아쉽지는 않으세요?
굳어진 결심을 전하고, 어쩌다 보니 <윤미정의 보통날>이라는 제목으로 예고 없던 기록까지 남기게 된 이후. 여소진이 아주 조심스럽게 던진 질문이었다.
– 아쉬움? 글쎄. 내가 그런 거 있다고 하면, 돌 맞는 거 아니야?
동 나이대의 한 인간으로는 물론이요, 배우로서도 이룰 만큼 이루지 않았던가.
그러니 당시에는 쓸데없는 소리 말라며 일축했었는데.
막 연기를 마쳐서 조금 흥분한 상태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갑자기 군중 밖으로 나와 홀로 있는 순간이라서?
둘 중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으나, 불현듯 그 질문이 자꾸 뇌리를 맴돌았다.
“아쉬움이라···.”
윤미정은 제가 가진 것들을 하나둘 꼽았다.
돈?
그날이 언제 올지는 모르나, 언제 오는 마지막 날까지 한 몸 건사할 정도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인기?
앞서 말했듯 ‘국민배우’라는 단어를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위치다. 요즘 잘나가는 젊은 배우만큼은 아니어도 누릴 만큼 누렸다.
명예?
윤미정은 데뷔 이래 단 한 번의 불미스러운 사고 없이 최고의 배우 타이틀을 목에 걸고 살아온 사람이다. 또한, 그녀는 집에 장식된 트로피가 몇 개인지 모른다. 너무 많아서다.
“흠.”
윤미정이 자글자글하게 주름진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뭐야. 나··· 부자네?’
다시 생각해도 손에 쥔 것이 참 많았다.
“너무 많아서 나 죽으면 누가 다 가져가려··· 이런.”
불현듯 윤미정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찾았다. 너무 많은 것을 든 손에 놓여있지 못한 것.
‘하다못해 이걸 받은 사람···도 없네.’
깨닫고 나자, 조금 바보 같은 생각도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이라도 할 것 그랬나··· 싶은.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이람?’
잡념을 털어낸 윤미정의 시야에 익숙한 화장실 마크가 보였고, 문고리를 잡은 순간,
“···잖아요? 아닌가?”
묵직한 유리문 너머에서 웬 목소리가 들렸다. 높게 찢어지는 목소리는 날카로웠고, 끝이 올라가 있었으나, 그에 맞서는 대답은 없었다.
‘이런.’
이곳은 여의도가 아니라 일산. 촬영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사람들만 드나드는 세트장 내부이며, 그중에서도 배우 대기실 뒤쪽 복도 화장실이다.
저 안의 인물은 열에 아홉 배우이거나 그 관계자라는 뜻이다.
‘들어가? 말아?’
어느 쪽이든 불편한 건 안쪽의 인물들이지 윤미정일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이대로 밀고 들어가면 그만이었으나···.
‘굳이?’
오늘 같은 날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고, 어린 애들의 기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다.
‘···반대쪽 복도에도 화장실이 있었던 거 같은데.’
딱히 볼일이 급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또 언제 올지 모르는 이 세트를 홀로 한번 걸어보고 싶어서 다른 사람을 물린 것뿐이었으니까. 그래서 물러서려고 했다.
분명 그랬는데.
“···좋으시겠어요? 뭐라더라? 주연 잡아먹는 조연?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서.”
쨍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윤미정의 발목을 잡았다.
‘응?’
윤미정은 배우고, 배우란 연기 이전에 타인을 관찰하는 직업이다. 상대를 공격하는 목소리가 몹시 익숙했다.
– 선생님! 함께 연기해서 너···너무 좋았습니다!
내용은 판이하였지만, 같은 목소리였다. 조금 전 윤미정과 연기를 했고, “다음에 또 연기하고 싶다”라고 말했던 드라마의 주연 배우가 틀림없었다.
‘그럼 상대는···.’
하얗고 갸름한 얼굴, 동그란 눈매. 순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기백 넘치는 연기를 펼치는 젊은 배우 한 명이 떠올랐다.
박소화.
무대 출신. 연극에서 잔뼈가 굵은 덕분인지 기본기가 탄탄했고, 첫 TV 데뷔라는 게 무색하게 무섭게 이름을 알리고 있는··· 말 그대로 ‘주연 잡아먹는 조연’.
어찌나 강렬한 연기를 펼치는지 화면 너머 시청자들을 단숨에 사로잡았고, 윤미정마저 혀를 내둘렀던, 이제 막 빛을 보기 시작한 배우였다.
‘뜨겠던데.’
아니지. 이미 떴다고 보는 게 옳았다.
“자만하지 마요. 이깟 주말 드라마에서 잠깐 이름 알려봤자, 조연은 조연이니까.”
제 분을 못 이겨서 씩씩대는 목소리가 그것의 증명이나 다름없었다.
스타의 탄생이란 본디 주변의 시기와 질투를 동반하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람?’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 아니던가.
“왜 말을 그렇게 해?”
돌아서는 윤미정의 귓가로 오늘 처음 듣는 목소리가 꽂혔다.
‘시작했네.’
잠잠했던 인내심이 드디어 끊긴 것일까.
드디어 싸움이 시작되려나 싶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사라지려던 윤미정은 이어지는 내용에 저도 모르게 “하!”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깟 주말 드라마라니. 네가 주연인 작품이잖아.”
이런저런 빈정거림이 이어지는 내내 잠자코 있던 인내심이 바닥난 포인트가 거기였다니.
“푸흡.”
평범하게, 여느 때처럼 마무리하려고 했던 윤미정의 보통날이 조금 특별해지고 있었다.
외전 29. 보통날, 언젠가··· 그래서 오늘 (외전完 + 후기)
최종 빌런. 혹은 진짜 흑막 등장이라고 해야 할까.
끼이익-
어차피 웃어버린 거.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아예 크게 깔깔댄 윤미정은 나긋하게 걸어 화장실로 들어갔고,
“···서,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언쟁 중이었던 두 배우가 윤미정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쏴아아아-
의도한 건 아니었건만.
손을 씻는 윤미정을 비추는 거울 너머, 두 배우가 그녀를 사이에 두고 서 있었는데.
‘얼씨구?’
분위기가 무척 달랐다.
거울을 기준으로 윤미정의 왼편에 서 있는 주연 배우의 얼굴이 사색이지만, 오른쪽의 박소화는···.
‘얘 지금···?’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고개를 푹 숙인 것은 반대편의 주연 배우와 크게 다를 바 없었으나, 순간순간 고개를 들 때 보이는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보였다.
‘좋아하는 거야? 이 상황에?’
살짝 벌어진 입과 반짝이는 눈. 좋아하는 스타를 영접한 팬의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인사하는 배우들 사이에는 없었던 것도 같고.’
하여튼 쟤도 정상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 윤미정은 이내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그리고는 시선을 거울에 붙인 채 입을 열었다.
“거기. 너.”
“네? 네?
딱히 누구라고 지목하지도 않았건만. 조금 전까지는 새하얗게 질렸던 얼굴이 이번에는 꺼멓게 죽은 표정으로 파드득 몸을 떨었다.
“제 이름은···!”
짧은 컷이었다고는 하나, 스태프 이름도 전부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윤미정이 설마 같이 연기한 배우 이름을 모를까.
“이름은 됐고.”
그러나 알아도 모르고 싶어지는 때는 있는 법. 싸늘한 분위기를 온몸에 두른 윤미정이 질문을 던지며, 고개를 들었고.
“정말 나랑 연기해서 좋았니? 영광이었다면서.”
거울을 통해 눈이 맞은 주연 배우가 고개를 푹 떨궜다.
“네···네!”
“그렇구나. 근데.”
쯧. 윤미정은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다른 작품에서 또 보기는 어렵겠어.”
주연 배우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십여 분 전에도 비슷한 대화를 했다.
– 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또 언제 본다는 약속은 쉽게 못 하지.
하지만 그때와는 상황, 말투, 눈빛···. 모든 것이 달랐다.
“자기 작품에 대한 프라이드가 없는 사람.”
“!”
“내가 무척 싫어하는 타입이라.”
굳은 채로 서 있는 주연 배우를 향해 윤미정이 작게 고갯짓했다.
“뭐하니? 볼일 다 봤으면 나가지 않고.”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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