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ll-Rounder’s Guide to the Entertainment Industry RAW novel - Chapter (280)
전천후 연예생활백서 280화(280/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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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배우가 도망치듯 나간 후. 자연스럽게 자리를 뜨려던 윤미정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신경 쓰이네.’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그러나 절대 그냥 눈을 뗄 수는 없다는 듯 계속해서 저를 곁눈질하는 박소화가 무척 부담스러웠다.
“너 말이야.”
문제는 부담스럽긴 했지만, 싫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는데.
“박소화 입니다! 선생님.”
“그래, 소화.”
이름 한 번 불러준 게 뭐라고. 발그레해지는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났다.
– 난 연기만 할 수 있으면 돼요.
연기가 좋아서 어쩔 줄 몰랐고, 그것만으로도 아주 행복했지만, 그래서 위태로웠던 시절.
– …다른 건 몰라도 연기는 나만 잘하면 되잖아요? 그걸로 충분한 거 아닌가요?
언제였더라. 아마 눈앞의 박소화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나이였을 것이다.
몇 번의 만남과 헤어짐, 실망 끝에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다면서 꼿꼿했던 시절의 젊은 날이 제가 눈앞의 말간 얼굴에 겹쳤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마도 그래서였다.
“너. 매니저는 어디에다 두고 혼자 그러고 있니?”
“…네?”
“보아하니 하루 이틀 아니었을 텐데. 뭐 하러 여기서까지 듣고 있어? 작품이 아니라 처음에 널 욕할 때 머리채라도 잡았어야지.”
윤미정은 저도 모르게 잔소리를 쏟아냈다.
“너, 소속사···. 아니다. 매니저는 있니?”
“어··· 네, 있···.”
“하긴. 있으면 뭐 하겠어. 쟤가 주연이지? 요새도 그러나? 주연 배우가 난리 치는 것 정도는 적당히 눈 가리고 아웅 하라고?”
당황한 얼굴로 그게 아니라고 고개를 흔드는 박소화의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이 바닥 일. 혼자 하는 거 아니···!”
어쩌면 눈앞의 박소화가 아니라 과거의 자신에게.
“그게 얼마나 힘든 건데!”
마구 쏟아내던 윤미정이 진정한 것은 벌컥 열린 문 사이로 여소진이 뛰어 들어오고 나서였다.
“선생님!”
“…여 작가?”
“너무 안 오셔서요.”
걱정했다면서 이리저리 저를 살피는 여소진을 마주한 윤미정의 눈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
‘괜한 소리를!’
잘 알지도 못하는 배우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는 생각에 지끈 머리가 아팠다.
그리고 그때.
“저···.”
조용히 눈치를 보던 박소화가 윤미정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선생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을. 무엇에 대한 신경일까. 질투로 성질을 부리는 못난이를 물리쳐준 것? 아니면 조금 전의 잔소리?
윤미정이 둘 중 어느 쪽인지 궁금하다는 생각을 한순간,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여소진과 윤미정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몸을 빼던 박소화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작게 속삭이듯 한마디를 남겼다.
“저. 혼자는 아니에요.”
***
오늘만 벌써 두 번째.
“하!”
윤미정은 뜻하지 않게 크게 웃었고,
“방금, 그 친구. 얼굴을 제대로 못 봤는데. 배우였죠? 무슨 말이에요?”
여소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선생님께서 내치셔도 그냥 따라올걸. 걱정도 걱정이지만, 조금 전에 분명 이곳에서 뭔가 있었다는 생각이 여소진의 신경을 긁었다.
그러나 윤미정은 시원하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혼자는 아니라···.”
박소화가 남긴 말을 나지막이 중얼거릴 뿐이었는데.
‘뭐지?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 거 같기도 하고?’
여소진이 의아해할 만큼 쉼 없이 킥킥거리던 윤미정의 웃음소리가 멎은 것은 그들이 복도로 나오고 나서였다.
“선생님?”
그녀의 시선이 복도 저 끝. 투덕거리며 촬영 세트 쪽으로 걷고 있는 한 쌍의 남녀에게 붙어있었다.
“너, 잠깐. 얼굴 좀 봐봐.”
“왜요? 새삼 예뻐서요?”
“···장난치지 말고. 너 무슨 일 있었지? 표정 이상한데.”
“이상하다뇨? 제 얼굴이 그럴 리가 없는데?”
“얼굴이 아니고 표정···!”
“아! 대표님, 그거 알아요? 여기 화장실 수압 장난 아녜요.”
복도가 워낙 고요했기 때문일까. 그다지 큰 목소리가 아니었음에도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꽤나 선명하게 들려왔는데.
“내가 널 몰라? 얼른 말해. 혼자 삭혀두지 말고.”
뒤통수만 보이는 남자의 목소리에 걱정이 잔뜩 묻어있었고,
“넌 왜 맨날···.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어휴. 속상해.”
그 안에서 진심을 읽은 윤미정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뱉었다.
– 저. 혼자는 아니에요.
혼자는 아니라고 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러네.’
나랑은 다를 수도 있겠구나. 사라지는 인영들을 멀거니 바라보는 윤미정의 가만히 기다리던 여소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어? 저 친구. 그 친구네요? 박소화? 맞죠? 아까 화장실에서 막 나갔던···. 요즘 핫한 조연 배우.”
“응. 배우야.”
아. 여소진이 머쓱한 표정으로 말을 정정했다.
“죄송해요. 배우. 그···. 연극 쪽에서는 꽤 유명한 배우라던데. 안 그래도 기 PD가 관심 있어 했어요. 신선한 얼굴이 필요하다고요.”
“그래? 차기작?”
“네, 뭐. 아직 더 만져야 하지만요. 확정도 아니고요. 그냥 관심 정도?”
그렇구나. 작게 고개를 끄덕인 윤미정이 무척 재미있다는 듯 픽 웃었다.
“눈이 좋네.”
“네?”
“기 PD 말이야. 사람을 참 잘 골라.”
“…저 친구 말씀하시는 거예요? 박소화?”
“응.”
위에서 아래로 한 번. 크게 끄덕이는 고갯짓에 망설임이 없었고, 여소진은 얼른 윤미정에게 되물었다.
“선생님 보시기에도 괜찮은 배우인가 봐요?”
“자기들도 괜찮다고 생각해서 눈여겨본 거 아니야?”
“그거야 드라마에서 훨훨 날길래···. 좀 알아봤더니 평도 괜찮더라고요. 물론, 그래봐야 만나봐야 아는 거고. 막상 보면 또 다를 수도 있고···. 그렇잖아요?”
하지만 윤미정의 평가가 얹어진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선생님께서 썩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은데···. 어떻게. 그림 한 번 그려봐?“
어떻게든 윤미정과의 시간을 더 늘려보고 싶은 여소진이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사이, 윤미정의 입에서 기대 이상의 놀라운 평가가 나왔다.
“···공 할 거야.”
“네?”
“쟤.”
윤미정이 가만히 검지를 뻗어 이제는 박소화와 그의 매니저가 사라 없어져 버린 복도 끝을 가리켰다.
“성공할 거라고.”
여소진의 눈이 순식간에 동그래졌다.
“처음 들어봐요!”
“음? 뭐가?”
“그런 말씀 잘 안 하시잖아요. 누구 잘될 거라는 이야기 같은 거.”
“내가 그랬나?”
“네! 와···. 신기해! 웬일이야. 선생님, 저 친구 연기가 무척 인상 깊으셨나 봐요?”
“연기야 뭐···. 자기들도 연기 잘하는 건 봤으니까 알 거 아니야.”
“그건 그렇죠.”
고개를 끄덕인 여소진이 가만히 턱 끝을 긁었다.
‘하긴. 보통 배우가 아닌 것은 맞지. 매체 연기는 거의 처음이나 다름없다던데.’
아무리 연극에서 오래 굴렀다고는 해도 첫 TV 드라마에서 대중에게 바로 얼굴과 이름을 알리는 성과를 내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박소화는 그걸 해냈다.
‘게다가.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정도면···.’
당장이라도 기원석에게 달려가 박소화부터 만나보자고 해볼까 생각하는 여소진의 귓가로 조금 뜬금없는 이유가 덧붙여졌다.
“혼자가 아니라고 하더라고.”
“네?”
“정말로 썩···. 나쁘지 않은 거 같기도 했고.”
“선생님?”
당최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다는 여소진에게 이렇다 할 설명을 해주진 않은 윤미정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런 애는.”
시선을 사로잡는 연기. 저 자신보다도 작품을 사랑하는··· 조금은 무모한 마음가짐.
그리고 진심 어린 걱정을 건네는 좋은 매니저.
“성공하기 마련이지.”
윤미정 자신도 다 갖지는 못했던 조건을 그 애는 전부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감히 말할 수 있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빛을 볼 배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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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보(悲報)가 들려오기 몇 개월 전.
“선생님···. 혹시 소식 들으셨어요?”
그래서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이루어진 어느 현명하고 노회한 배우의 기원이었다.
***
다시 강의실.
또각-
또각-
학생들의 한 가운데에서 강의실 맨 앞으로 자리를 옮긴 윤미정이 화이트보드에 한 문장의 글귀를 썼다.
“이런 말. 많이들 하죠? 인생은 결국 혼자라고.”
강의실 여기저기서 그렇다는 대답이 나왔다. 윤미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랬어요. 굉장히 오랫동안. 배우가 되고 나서는 특히 더 그랬던 것 같아. 배우가 된 나를 바라보는 눈들은 참 많은데···. 이상하게 참 고독해. 카메라가 꺼지거나, 무대에서 내려오면 특히 더 그랬어요.”
단순히 화려한 조명 아래로 내려섰기 때문만은 아니다.
“배우들은 참 바보 같아요. 연기밖에 모르든, 그렇지 않든. 카메라가 꺼지면 할 줄 아는 일이 참 없거든.”
‘평범한 윤미정’보다 ‘배우 윤미정’으로 훨씬 더 오랜 기간을 살아오면서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났고,
“그래서 금방 믿고, 쉽게 속고, 이용당하고···. 상처받죠.”
많은 사람을, 많은 이유로 떠나보냈다.
“그러다 보면 사람을 믿지 않게 돼요. 나만 믿는 거죠. 오직 나만.”
강의실 정중앙. 오롯이 저에게만 쏟아지는 시선을 하나하나 마주하며 윤미정은 고백했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강한 사람이고, 혼자서도 빛날 수 있는 배우니까. 아마···. 끝까지 그럴 거로 생각했던 거 같아요.”
그랬던 시절이 있었노라고.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아주 오랫동안 괜찮았는데. 한 번은···. 한 번은 무척 부럽더라고.”
한층 깊어진 윤미정의 시선이 맨 앞줄, 부러움에 관한 질문을 처음 던졌던 어린 학생에게 닿았고.
“활짝 꽃을 피울지, 오래가지 못하고 스러질지 모르는 새싹. 아니, 아직 싹도 피우지 못한 씨앗을 어떻게든 쑥쑥 키워보겠다고···.”
이어 강의실 뒤편.
‘못 말려.’
윤미정의 시선이 닿자마자 어떻게든 티를 내고 싶어서 안달인 초록색 공벌레와 그 옆에서 더 몸을 수그리는 빨간 공벌레에 닿았다.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비바람을 막아주는 사람을 봤는데···. 그때 생각했어요. 아, 내게도 저런 울타리가 있었다면 참 좋을 텐데.”
저들 이야기라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갈수록 크게 움찔거리는 모양새가 우스웠고, 그래서 좋았다.
“그래서 생각했죠. 한 번만 더 손을 내밀어 보자고. 상대가 잡아준다면···. 한 번만 더 믿어보자고.”
– 오늘 일은 내 나름의 선물이고, 투자야. 내가 보기에 천후 씨를 일개 방송국 직원으론 얼마 못 볼 거 같거든.
나이는 속일 수 없다. 하루가 멀다고 가물가물해지는 기억들 속에서 몇 안 되는 선명한 순간을 떠올린 윤미정의 입매가 느슨해졌고,
“아까 내가 말했죠? 이것만큼은 안될지도 모르겠구나···. 생각했었다고. 지금은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느슨해진 입매는 이내 커다란 미소를 그렸다.
“나한테도 생겼거든. 내 연기를, 연기 인생을···. 비단 배우로서의 윤미정을 넘어, 한 인간 윤미정을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그 끝에, 윤미정은 문득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그러니까 질문했던···. 문지호 학생. 그리고 여러분에게도 분명 있을 거예요. 여러분을 응원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어쩌면 누군가는 벌써 찾았을지도 모르고요.”
어린아이처럼 티 없이 밝았던 미소에 진한 장난기가 서렸고,
“아! 말이 나온 김에 한 번 물어볼까요?”
윤미정의 목소리에서 짓궂은 장난기를 읽어내기라도 한 것일까.
‘어쭈?’
크리스마스트리를 어깨에 맨 산타클로스처럼 한 뭉치가 된 빨간색과 초록색의 덩어리가 제 모습을 감추기 위해 조용히 사라질 채비를 하는 가운데,
“거기, 맨 뒤에. 학생.”
윤미정이 그들 중 한 명을 지목했고,
“그래요. 초록색 옷. 학생은 어때요?”
질문했다.
“학생의 인생을 응원하고 지지해줄 사람.”
보통날을 지나, 언젠가.
그래서 오늘.
“찾았나요?”
저를 지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듯 멍한 표정을 하고 있던 초록 옷의 청강생이 끄덕, 고개를 움직였고,
“네.”
얼굴을 가린 마스크를 시원스레 끌어 내리며 짧고, 간결하게,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찾았어요.”
더없이 반짝이는 눈을 저만의 산타클로스에게 고정한 채로.
전천후 연예생활백서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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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자경입니다.
이렇게 또 끝인사를 드리게 되어 감개무량합니다.
좋은 사람들과 일하는 좋은 사람의 이야기. 호인이지만 호구는 아닌, 그래서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
그래서 판타지일 수밖에 없지만, “만에 하나”를 꿈꾸고 싶어지는 이야기를 써 보자.
<전천후 연예생활백서>를 쓰는 내내 제가 품고 있었던 유일한 기준이었습니다.
현실이 어떻든, 제가 꿈꾸는 연예계는 그러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전천후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될 수 없다면 만나고 싶었던 제 바람이었다고 할까요?
그것이 얼마나 전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전천후의 이야기를 쓰면서 몹시 즐거웠고, 행복했습니다.
약 1년 하고도 7개월. 무려 417화. 삼백만 자가 넘는 글을 끝까지 읽어주시고, 함께 걸어주신 여러분 덕분입니다.
모든 배우의 히어로였고, 그중에서도 제게 가장 히어로였던 전천후에게. 그리고 전천후의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지지해주신 많은 분과 지금 이 글을 보고 계신 모든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마지막 에피소드의 제목처럼.
보통날을 지나 언젠가. 또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자경(蔗境)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