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ll-Rounder’s Guide to the Entertainment Industry RAW novel - Chapter (79)
전천후 연예생활백서 79화(79/280)
***
“대표님. 도착했습니다. 바로 들어갈까요?”
“그래? 지금 시간이···. 한 시간도 넘게 남았네? 흠. 근처에서 간단하게 식사라도 할까?”
목동 SDS 방송센터 앞에 도착하니 겨우 일곱 시 삼십 분. 퇴근길 러시아워에 발목이 잡힐까 서둘렀더니 예상보다 일찍 도착해버렸다.
“그래도 돼요?”
“어차피 아홉 시부터잖아. 따로 준비할 것도 없고, 대기할 장소도 마땅찮아. 삼십 분 전에만 올라가도 충분할걸?”
라디오 게스트는 특별히 준비할 게 없다. 대본은 있지만, 외워서 대사를 쳐야 하는 것도 아닌 데다가 그때그때 작가가 넘겨주는 멘트를 나긋하게 읽어내고, DJ가 이끄는 대화를 자연스럽게 따라가기만 해도 충분해서 일반 방송과 비교하면 부담이 덜한 편이다.
“철형아. 시시콜콜에서 몇 시까지 와달라고 그랬댔지?”
“여덟 시 오십 분요.”
“거봐. 왜? 밥 먹기 좀 그래? 올라가서 기다리는 게 낫겠어?”
방송만 앞두면 굶는 버릇이 도졌나 싶어 물어보니, 의외로 고개를 젓는다.
“그럼 뭐 먹을래?”
“어··· 그냥 간단한 거요.”
“철형이는? 먹고 싶은 거 있어?”
“전 아무거나 다 좋습니다!”
한국인은 밥이라고. 든든하게 먹이고 싶었는데, 그러자니 보이는 거라곤 전부 감자탕, 추어탕, 삼겹살···.
온통 회식 메뉴다.
그래서 결정된 메뉴가 햄버거.
고기 냄새 풀풀 풍기면서 라디오 스튜디오 들어가는 것도 민폐다 싶어 들어간 24시간 수제 햄버거 매장은 다행히 저녁 시간치고 한산했다.
‘방송국 근처 매장이라 그런가?’
도하를 보고 입을 쩍 벌려놓고도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지 않고, 센스 있게 사람들 시선을 비낄 수 있는 안쪽 자리를 안내해주는 직원도 마음에 들고 말이지.
“여기 특이하네요.”
“응?”
자리에 앉은 도하가 사방에 붙은 대형 모니터를 가리켰다.
“호프집도 아닌데···. 모니터가 엄청 많아서요.”
아아. 보통 해외축구 틀어주는 곳에서나 볼법한 광경이긴 하지.
“바로 옆이 SDS잖아. 그래서 그래. 아무래도 손님들이···.”
“방송국 직원들이라서요?”
“아니. 팬들.”
“팬들··· 이요?”
“SDS 공개홀에서 주말마다 음악방송 녹화 있잖아. 사녹에 본방송까지 챙기려는 아이돌 팬들이 밤새우면서 꼬박 이틀을 이 근처에서 대기하거든. 이렇게 모니터 달아놓고, 방송 틀어주면 좋아할걸? 뭐어, 무음이라 화면만 덩그러니 나오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낫잖아? 이 주변 식당이랑 카페는 전부 그때가 대목이라 주말 장사만 24시 운영하는 곳도 많아.”
그러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보던 도하가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
“저기. 세진 형이네요.”
우리가 앉은 테이블에서 가장 가깝게 보이는 모니터에서 <경계 위의 남자>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재방송··· 은 아닌 거 같은데.”
열여덟 고등학생. 교복을 입고, 엉망이 된 얼굴로 발을 질질 끌며 좁다란 골목을 위태롭게 걷고 있는 오세진. 곧이어 똑같은 자세. 똑같은 표정으로 휘청이는 장재열의 모습이 교차하고, 그 곁으로 CG라기엔 너무 리얼한 혼백들이 아른거린다.
실제로는 이십 미터도 안 될 골목의 끝이 천릿길처럼 멀어 보인다.
“저 영상은 뭐예요?”
“<경계 위의 남자> 프리퀄. 제작발표회 때 기자들한테만 사전 공개했던 거야.”
“아···. 기사 봤어요.”
될성부른 놈은 미친 듯이 밀어주는 건 어느 업계에서나 다 비슷하다.
오늘 아침 시청률을 확인하고 축포를 쏘아 올린 KDS는 <경계 위의 남자> 2화 본방에 앞서 7시 30분부터 프리퀄, 스페셜 제작기, 1화 재방을 연이어 편성했다.
다음 주 첫 방송 예정인 SDS <안개>와 맞붙기 전에 확고한 1위를 다지겠다는 심산이었을 터였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충분한데.’
그렇다고 밀어주겠다는 걸 거절할 이유는 없지. 게다가 막상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니 흐뭇하다.
“주문하신 메뉴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예. 감사합니다.”
테이블 위에 음식을 놓아주던 직원이 몇 번이나 도하를 곁눈질하다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섰다.
<경계 위의 남자> 프리퀄에 고정된 녀석의 눈이 도무지 모니터에서 떨어질 기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재밌어?”
“…네?”
툭 건드리자 가볍게 움찔한 도하가 한 박자 늦게 대답을 했다.
“소리도 안 들리는데 뭘 그렇게 열심히 봐? 얼른 먹어. 식겠다.”
“그냥···. 아무것도 안 들려도 보게 되네요.”
“그래? 영상이 잘 뽑히긴 했지.”
“그것도 그렇고요.”
“저건 나중에 봐도 되니까. 일단 먹어.”
안 되겠다 싶어 재촉하자, 맛을 느낄 새도 없이 버거를 대충 씹어 삼킨 도하가 다시 모니터를 응시하며 말했다.
“세진 형은 진짜 잘하는 것 같아요.”
“응?”
“연기요. ···눈을 못 떼겠어요.”
…?
이건 또 무슨 소릴까. 아니, 물론 오세진이 연기를 잘하기야 하지. 근데,
“갑자기? 같이 연기도 해봤잖아.”
부딪히는 씬이 많지는 않았지만 십육 부작 미니에 나란히 주연으로 이름을 올린 사이다. 얘가 새삼스럽게 왜 이러나 싶은데, 도하의 표정은 무척 진지했다.
“그렇죠. 현장에서도 항상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배울 점이 많은 형이라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이번 연기는 특히 더··· 엄청나요.”
흐음. 뭘까.
“도하야.”
프리퀄이 끝나고, 곧이어 스페셜 제작기가 방영된다는 메시지를 보고서야 모니터에서 눈을 뗀 도하에게 말했다.
“너도 잘해. 연기.”
그러자 멈칫한 녀석이 나를 바라보는데···. 표정이 뭐랄까.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대표님.”
“그래.”
“저요-.”
가뜩이나 진지한 녀석이 이렇게 뜸을 들여가며 무슨 말을 꺼내려나 싶어 기다리는데,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웠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암만 봐도-!”
“가편집이잖아. 보정도 해야 하고, 음성도 정리되기 전이니까 당연히 부족해 보이지. 조연출도 완본 나오면 괜찮을 거라고···.”
“그 말을 어떻게 믿어! 피디 새끼들 전부 한통속인 거 뻔한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라는 생각을 하는데 맞은편에서 숨죽여 세 개째의 버거를 해치우던 이철형의 얼굴에 실금이 갔다.
“왜··· 이런.”
뒤를 돌아보니 장신의 남자 둘이 직원의 안내를 받아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정재훈과 그의 매니저 이유성이었다.
‘왜 하필···.’
근처에 널린 게 식당인데 왜 하필 여길, 그것도 오늘 나타난 거야? 울컥 올라오는 짜증을 눌렀다.
‘어쩔까.’
지금 내 곁에 앉아있는 건 도하다. 마음 같아서는 모른 척 지나치고 싶지만, 도하는 신인. 정재훈은 작품까지 같이한 선배 배우다. 인사를 하는 게 맞았다.
도하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날 향해 고개를 까딱하길래, 그래. 인사만 하고 나가자고 대충 사인을 주고, 몸을 일으키는데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씨발. 뭐야 저건?”
이 미친놈이 지금 우리한테 한 소린가? 고개를 휙 돌렸는데, 놈은 바라보는 건 우리가 아니었다.
“재훈아···! 입 좀!”
쟤는 정말 연예인이라는 자각이 없나? 아무리 한적해도 일반 음식점에서 쏟아내는 저 자유분방한 욕이라니.
어떤 의미로는 정말 존경스럽다는 생각과 저런 놈을 케어하는 이유성도 참 인생 뭐 같겠다는 생각을 하며, 씨발씨발거리는 정재훈의 시선을 따라간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저거 끄라고 해! 안 그래도 빡치는데! 오세진 저 씨발···!”
정재훈이 쌍욕을 뱉은 대상은 조금 전까지 도하의 시선을 붙잡았던 대형 모니터. 어느새 시작한 <경계 위의 남자> 제작기였기 때문이다.
드륵-
적당히 인사만 하고 나간다는 선택지는 놈의 입에서 오세진의 이름과 쌍시옷이 나란히 나온 순간 사라졌다.
‘우리가 있다는 걸 알고 한 욕은 아니라고는 해도.’
이미 들어버렸지 않은가. 귀머거리 삼 년? 인내? 그거야말로 웃음거리가 되는 지름길이다. 이대로 나가면 사방에 눈과 귀가 달린 연예계에 호구로 소문이 나겠지.
‘저걸 뭐라고 조지지?’
내 얼굴을 마주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욕을 할까? 아니면 당황? 어느 쪽이든 좋은 꼴을 아니겠단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키자마자 정재훈, 이유성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저··· 전천후 대표님···?”
“오랜만입니다. 이유성 실장님. ”
당혹스럽다는 티가 역력한 이유성이 말을 더듬는다. 그 옆에 선 정재훈도 얼빠진 얼굴인데···.
“십팔···.”
‘응?’
믿을 수가 없지만 익숙한 목소리.
저 앞에서 입을 쩍 벌린 정재훈은 아니고.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성큼 걸어 도하 앞을 막아서던 이철용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건,
“…도하야?”
신인답지 않게 발성과 발음이 무척 좋다는 호평이 자자한 도하의 목소리였다.
‘십, 팔··· 이라고?’
이게 뭐지···? 뭐야?
“야. 너 지금 뭐라 그랬냐? 씨발? 너, 너···! 지금 나한테-!”
정재훈을 말릴 새도 없이 옆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보고 말았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얼굴을.
“네? 아뇨, 선배님. 무슨 그런···. 그게 아니라 말씀대로 십팔이라고요. 저기, 저거.”
세상 착하고, 성실하고, 단정한 표정의 도하가 검지를 쭉 뻗어 <경계 위의 남자> 제작기가 방영 중인 모니터를 가리켰다.
촬영장에서 활짝 웃는 오세진의 얼굴 아래로 자막 한 줄이 떠 있었다.
[전국 18.3%, 수도권 18.8% 돌파!]노란색으로 강조된 십-팔- 위에는 빨간색 별표가 세 개나 달려있었다.
“방금 오세진 십팔이라시길래. 저거 말씀하신 거 맞죠? 시청률요.”
도하가 웃는다. 더없이 화사하게. 팬들이 햇살 같다고 좋아하는 미소다.
그러나 난 안다. 저 그린듯한 얼굴, 환한 미소가 다가 아니라는 걸. 분명 도하의 저 얼굴을 본 기억이 있다.
– 제가 지금 휴대폰이 없어서요.
작년 겨울, 채수아 앞에서 티타늄 방패를 휘두르던 때.
“선배님, 다음 주 <안개> 첫 방송이시죠? 무척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때보다 더 예쁘게. 남자배우한테 예쁘다는 말이 맞는지 모르겠으나, 무섭도록 예쁜 미소를 띤 도하가 주먹 쥔 양손을 명치 앞으로 모으며 외쳤다.
“파이팅하십쇼!”
배우가 보내는 사인
목적지는 SDS 12층 라디오 센터. 스튜디오 넘버 12-3.
여기까지 오는 길이 너무 길고 험난했다. 도하의 십ㅍ··· 아니, 열여덟 드립에 하얗게 날아간 정신줄을 붙잡아 뭐에 홀린 것처럼 SDS 방송센터에 들어왔거든. 그뿐만이 아니다.
– 시시콜콜 막내 작가입니다. 도착시각을 알려주시면 로비로 마중을···.
엘리베이터만 타고 올라가면 되는데 뭐하러 마중까지 나오나 싶어 거절했는데, 전부 이유가 있었다.
“…라디오국 소속 인원이 엄청 많은가 봐요.”
역시 드라마와는 다른 것 같다고 혼자 납득하는 도하를 보자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방송국이 도떼기시장도 아니고. 그럴 리가 있겠냐.’
이도하 얼굴 한 번 보겠다고 여기저기서 고개 내민 거지.
일반 회사라면 야근하는 게 아니고서야 대부분이 퇴근했을 시간이겠지만, 이곳은 방송국이다. 눈밑이 시커먼, 아마도 종합편집실이나 작가실에 찌그러져 있었을 방송 스태프들이 호기심에 얼굴을 비췄을 게 뻔했다.
도하가 엄청난 월드 스타급이라서가 아니라, 이맘때가 방송관계자들의 관심이 가장 클 때이기 때문이다.
‘라이징에서 톱으로 발돋움을 하는 시기.’
인기와 화제성의 강도에 비해 작품 수는 적고, TV를 틀면 온종일 광고가 나온다지만, 막상 실물을 본 사람은 많지 않으니 궁금한 거다.
특히 SDS는 첫 방문이라 더한 것도 같았다.
“안녕하세요, 이도하 배우님. 그리고··· 전천후 대표님이시죠? 시시콜콜 작가 최민영입니다.”
[고주희의 시시 Call-Call] 포스터가 붙어 있는 방음문을 들어서자 사십 대 초반 즈음의 작가가 우리를 반겼다.“이쪽은 서종훈 PD님이시고요. 저기 우리 DJ 고주희 씨는 친하실 테고.”
담당 PD 서종훈이 급히 다가와 인사와 악수를 하곤 콘솔 앞에 달라붙었다. 생방송인 만큼 오래 자리를 비우기 힘든 모양이었다.
“공유 드린 대본은 확인하셨죠? 잠시 후에 광고 시작하면 들어가실 거고요. 오늘 ‘스타 초대석’은 처음부터 끝까지 보이는 라디오로 진행돼요. 긴장하실 필요는 하나도 없고···. ENG 카메라 하나 붙었다고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오늘 게스트가 도하 씨라는 기사가 나서 그런가? 저희 접속자가 역대 최고예요. 첫 멘트는 미리 드렸던 대본대로 도하씨가 먼저···.”
작가와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체크한 도하가 라디오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고주희와 반갑게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며 휴대폰으로 시시콜콜 게시판을 열자 벌써 난리였다.
┕ 왔다!!!!
┕ 도하 보고싶었어어어어
┕ 왤케 잘생겼냐
┕ 카메라 클로즈업 좀 제발ㅠㅠ
스피커에서는 아직 광고가 흘러나오는 중이지만, 빨간불이 들어온 지 오래인 보이는 라디오 앵글에 도하가 잡힌 것이었다.
“분위기 보니까 오늘 최고 청취율 뜨겠는데요? 역시 도하 씨 인기가···. 라디오 출연은 처음이라고 들었는데, 맞죠 대표님?”
스튜디오 한쪽에서 눈인사만 보냈던 고주희의 매니저가 슬쩍 곁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네. 처음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러브콜 많으셨을 텐데. 첫 출연을 저희 누나 방송으로 와주시고. 진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희도 여러모로 신세를 많이 졌는걸요.”
오는 말이 고우니 가는 말이 고운 것도 있지만, 진심이다. 도하가 첫 작품에서 고주희를 만난 건 지금 생각해보면 행운이었다.
‘연기 잘해. 예뻐. 인기 많아. 성격도 고주희 정도면 깔끔하고.’
신인배우가 상대역으로 붙으면 일부러 더 눈치를 주고 까탈스럽게 구는 치들이 얼마나 많은가.
정재훈과 맞붙고 온 참이라 그런가? 오늘따라 고주희가 천사처럼 보였다.
물론 맞붙었다기엔 도하가 일방적으로···.
– 십, 팔.
아냐, 아냐. 이거 아니야.
정재훈을 물어뜯는 도하의 해맑은 얼굴이 자꾸 떠올라 미치겠다.
아, 심장 아파. 오랜만에 너무 놀랐어.
“…님, 대표님?”
갑자기 눈앞에 그림자가 지는가 싶었는데. 고주희의 매니저가 의아한 표정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밀고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넋을 놨죠?”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정신없으시죠?”
“네?”
뭐지? 왜 내가 정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데? 설마 벌써 소문이 났을 리가···.
[인기드라마에 함께 출연했던 배우 A, B가 엄청난 신경전을 벌였습니다. 신경전의 이유는 A, B와 나란히 드라마에 출연한 또 다른 배우이자, 최근 엄청난 인기몰이 중인 C 때문인데요. 평소 C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A가 방송국 근처 식당 TV에서 C의 영상이 흘러나오는 걸 목격하고는 “저 영상 당장 꺼라”라고 외치며 C에 대한 욕설을 내뱉었다고 합니다. 우연히 그 광경을 목격한 B는···.]“드라마 시작했잖아요. 오세진 배우 드라마. 한창 바쁘실 때 아녜요?”
아···. 드라마. 그래. 이 바닥 소문이 아무리 빠르다 한들 벌써 퍼졌을 리는 없지. 삼십 분도 안 됐는데.
순식간에 머릿속을 장악했던 찌라시를 훌훌 날려 보냈다. 이건 병이다. 병.
“저도 봤어요. 엄청 재밌던데요? 몰입도가 그냥···! 주희 누나도 얼마나 감탄을 하던지. 두 번은 돌려본 거 같아요. 저희 누나가 장르물 진짜 좋아하거든요.”
“그래요?”
몰랐다. 고주희하면 아무래도 로맨틱코미디가 그려져서 말이지.
“의외죠?”
“네···. 장르물에서 뵌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실제로 없어요. 아시죠? 이미지 한 번 굳어지면 장르 변경 쉽지 않은 거요.”
“그렇긴 하죠.”
“누나는 그래서 오 배우가 더 대단하다고 하더라고요. 작년에 오만정에서 그, 그 시대극.”
“<경성의 연인(戀人)>이요?”
“네. 그것도 대단했잖아요? 근데 이번에도 완전 딴사람이니까요. 코믹, 시대극 멜로, 장르물. 일 년 만에 보여준 연기스펙트럼이 어우···.”
맞장구를 치자니 민망하고, 그렇다고 아니라고 말하는 건 재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웃는 사이, 벽에 걸린 디지털 시계가 여덟 시 오십구 분을 지났다.
“삼십 초 후에 시작합니다!”
「머릿결이요? 따로 관리 안 해요. 기본만 하는 거죠. 기본. 원래 기본이 제일 중요하다잖아요. 그게 뭐냐고요? 이건 비밀인데, 여러분께만 살짝···.」
고주희 라디오라 그런가? <경계 위의 남자> 앞뒤로 오세진의 광고가 붙는 것처럼, 그녀가 모델인 샴푸 광고를 끝으로 밤 아홉 시에 어울리는 시티팝이 십 초쯤 흘렀다.
그리고 PD의 사인을 받은 도하의 입이 열렸다.
「만일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우리나라 국민의 오십 퍼센트는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면서 엇비슷한 일러스트를 떠올린다는 유명한 구절.
「네 시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마침내 네 시가 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안절부절못하게 될 거야.」
‘이도하가 읽어주는 어린 왕자로 오프닝이라···.’
그것도 기다림과 행복에 관한 구절이라니.
좋은 선택이다. 새삼 라디오 작가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었는데, 프롬프터에 뜨는 멘트를 마친 도하가 카메라를 응시하며 살짝 웃었다.
「시시콜콜 가족 여러분, 혹시··· 저를 기다리셨나요?」
‘어쭈?’
이놈이 아주 오늘 청취자들을 홀리기로 작정했나 보다. 아주 바람직한 자세다.
“우와. 반응 끝장이네요.”
커다란 몸을 최대한 구겨서 곁에 앉은 이철형이 휴대폰 액정을 가리키며 킬킬거렸다.
┕ 왕자다! 진짜 왕자가 나타났다ㅠㅠ
┕ 나는야 도하 너만의 여우! 너를 위해 태어난 짐!승!
┕ 야 난 보아뱀도 괜츈함
┕ 목소리 꿀
┕ 얼굴 봐··· 그저 빛···!
그리고 이어지는 멘트가,
「여러분께 길들고 싶은 남자, 이도하입니다. 반갑습니다.」
“어머···! 저 멘트는 없었는데.”
다소 흥분한 기색으로 호들갑을 떠는 최 작가를 비롯해 스태프들이 여기저기서 탄성을 터뜨렸다.
「어우! 지금 우리 시시콜콜 가족들이 난리가 났네요.」
깔깔대던 고주희가 너스레를 떨며 도하의 오프닝을 받았다.
「우리 시시콜콜 식구들이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봐요, 여기. 게시판에 글 올라오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읽기가 힘들 정도잖아요? 보자. 2395님은 한 시간 동안 어린 왕자만 읽어줘도 된다고 하시네요? 너무한 거 아냐? 아까 내가 1부 오프닝 할 때는 이런 반응 아니었잖아요! 다들 그땐 잤어요?」
짐짓 뾰로통하게 굴던 고주희가 이내 활짝 웃더니 도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하 씨. 정말 오랜만에요. 우리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더라. <삼십 대의 흔한 연애> 해외 프로모션이었나요?」
「네. 거의 삼 개월 만에 뵙네요.」
「잘 지냈어요? 어째, 더 잘생겨진 걸 보니 잘 지냈을 것 같지만.」
훅 들어온 칭찬에 도하가 대꾸도 못 하고 쑥스럽게 웃자, 게시판이 또 시끌시끌하다. 이게 바로 보이는 라디오의 위력이다. 스타의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보이니까, 무어라 말하지 않아도 반응이 터진다는 거 말이다.
「그렇게 웃는 거 금지! 수줍게 웃지 마요. 드라마도 끝났는데, 나 이제 연하남한테 설레면 안 되니까.」
「에이, 선배님. 왜 그러세요.」
「이참에 솔직히 말해봐요. 도하 씨도 알죠? 본인 잘생긴 거. 모른다는 대답이랑 아니라는 대답, 감사하다는 대답은 안 받고요. 6739님이 아침에 거울 보면 무슨 생각 하냐고 물어보시네요.」
「어··· 감사하고 있습니다.」
「감사 안된다니까요?」
「그게 아니라···. 아침마다, 부모님께요.」
언제 부끄러워했냐는 듯 카메라를 향해 방긋방긋 웃는 얼굴이 짜증이 나도록 잘생겼다.
“크 좋겠다. 저도 감사하고 싶었는데 말이죠. 우리 부모님은 왜···.”
고주희의 매니저가 우울하게 투덜대는 사이, 어느새 대화의 주제가 도하의 근황으로 넘어갔다.
「학교에 다녔어요. 제가 아직 대학생이라서요. 봄학기 수강하고, 바로 얼마 전까지 계절학기도 다녔습니다.」
「맞다. 도하 씨 한국대생이죠? 진짜 다 가졌네. 음. 9385님께서 물어보네요. 잘생긴 한국대생은 방학에 뭐하나요? 늦잠도 자나요? 어떻게, 잘생긴 한국대생을 대표해서 도하 씨의 하루를 낱낱이 분석해봅시다. 시시콜콜 오기 전까지 24시간. 뭐하셨어요? 솔직하게.」
「별거 없는데. 어제는 밤새 드라마를 봤어요. 덕분에 아침에 겨우 일어났죠.」
「들으셨나요, 여러분?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니까요? 그나저나 밤새 봤으면 무척 재밌었나 본데. 뭘 봤어요? 미드?」
「아뇨. 우리나라 드라만데···. 어, 말해도 되나요?」
「뭐야, 뭐야. 말 못 할 드라마에요? 막 빨간딱지가 으흐흐.」
고주희가 음흉하게 웃는다. 연기할 때와는 영 딴판이다. DJ 다 됐어. 프로네.
「그런 건 아니고요. 타 방송사 작품이라서요.」
「에이, 그게 뭐 어때서? 괜찮아요. 그렇게 따지면 우리 같이 출연한 <삼십 대의 흔한 연애>도 타 방송사 건데? 저기, 우리 PD님도 괜찮다잖아. 속 시원하게 말해봐요.」
「<경계 위의 남자>요.」
「아! 세진 씨 드라마? 저도 봤어요. 재밌더라고요.」
빈말이 아니었는지, 고주희가 장면까지 언급하며 호들갑을 떤다. 부디 <안개> 관계자 중에 고주희 라디오 청취자가 없기를.
「어! 여기 날카로운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6737님. 도하 오빠! <경계 위의 남자>는 어제 시작했잖아요. 밤새 보기엔 부족한 거 아녜요? 라고 하시네요. 어때요?」
「아···. 실은 여러 번 돌려봐서요.」
「한 편을?」
「네. 선배님은 그런 적 없으세요?」
「음··· 있죠. 너무 좋아하는 작품이거나, 아니면 보고 싶은 장면이 있거나 그럴 때? 도하 씨도 그랬구나? 뭐가 그렇게 좋았어요?」
「연기요.」
「연기? 세진 씨 연기 말이죠?」
「네. 아침에 형한테 문자도 했는데. 진짜 대단하더라고요.」
그러자 고주희가 공감한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감명 깊은 연기를 보면 눈을 뗄 수가 없죠. 저도 그럴 때 있거든요. 와, 저 배우는 뭘 먹고 저렇게 연기를 하나 싶고. 부럽기도 하고. 나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죠?」
「네. 보고 있으니까 막···.」
잠시 말을 끊는 도하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부스 안을 들여다봤을 때였다. 카메라 너머를 보는 도하와 눈이 마주쳤다.
「연기하고 싶다. 연기 해야겠다.」
그런 기분이 들었단다.
문득, 한 시간 전쯤 <경계 위의 남자> 영상을 멍하니 보던 도하가 생각났다.
– 대표님. 저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했더니···.’
이거였구나.
「알아요. 그 기분. 연기 열정이 막 끌어 오르는! 당장이라도 촬영현장에 가야 할 거 같고 그렇죠. 이거 아무래도 도하 씨 차기작을 금방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혹시 뭐 정해진 건 아니고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마음이 그랬다고요.」
「에이 뭐야···. 소문내야겠네. 시시콜콜을 청취하고 계신 방송관계자 여러분! 우리 이도하 씨가 연기가 하고 싶다네요. 지금이 기횝니다!」
고주희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도하의 낮은 웃음소리가 겹쳐졌다.
“하···.”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서 웃는데, 나란히 앉아있던 고주희의 매니저가 내 옆구리를 푹 찔렀다.
“대표님.”
“네.”
“도하 씨 대본 엄청 받았죠? 차기작 정하셨어요?”
대본이라···. 엄청 받았지. 우리나라 드라마, 영화 대본 중에 이십 대 남자 캐릭터가 필요한 대본은 모조리 들어오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많이 받았다.
“아뇨, 아직입니다.”
문제는 양보단 질인데.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다는 거지만.
“정말요?”
“네. 정말로요.”
“저런.”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그리고는 은근한 말투로 속삭였다.
“그럼··· 차기작 빨리 잡으셔야겠는데요?”
신인 시절부터 고주희를 케어해 온 매니저인 만큼 그도 아는 것이다. 조금 전 도하의 말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 연기하고 싶다. 연기 해야겠다.
배우가 보내는 사인이라는 것을 말이다.
“도하 씨 얼마나 쉬었죠? 반년?”
“연말에 단막극 했으니까··· 작품으로 따지면 반년 살짝 넘긴 했습니다만.”
광고 찍고, 윤 선생님 예능에도 나가고, <삼십 대의 흔한 연애> 해외 프로모도 돌고···. 쉬었다고 말하기도 뭐하다.
“하긴. TV만 틀면 도하 씨 광고가 쏟아지던데. 길어야 두 달 쉬었겠네요.”
“네. 그래서 더 쉬게 둘까 했는데···. 발바닥에 불나게 뛰어야겠네요.”
“어휴. 대표님. 배우가 일 달라고 재촉하는 건데 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녜요?”
못 말리겠다는 투다.
“그러게요. 왜 이렇게 좋지.”
피실 웃음이 나왔다. 그러는 사이, 라디오 부스 속 고주희가 말했다.
「잘됐네요. 오늘 도하 씨가 온다고 해서, 우리 작가들이 특별한 코너를 준비했거든요. 이름하여, 고주희-이도하가 들려주는 시시콜콜 사연 드라마! 연기를 향해 끌어 오른 그 감정! 오늘 한 번 쏟아보자고요!」
청취자들의 사연을 실제처럼 리얼하게 읽는 코너란다. 이도하를 알차게 써먹기 위해 다양한 사연을 뽑았다나?
첫 번째 사연을 받아든 도하가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오늘은 조금 특이한 제 여자친구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으려고 합니다. 여친은 덕후입니다. 아이돌을 쫓아다니냐고요? 차라리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여친은 2D를 좋아합니다. 웹툰, 웹소설 같은 거요. 그게 뭐가 문제냐고요? 문제예요. 그냥 혼자 좋아하는 게 아니거든요. 최근에는 조선 시대 배경의 웹툰에 꽂혔는데, 자꾸 저한테 청학동에서도 안 쓸 것 같은 말투를 강요하는 거예요. 남자 주인공 대사를 읊어보라나? 예를 들면···.」
첫 번째 사연을 읽어내리던 도하가 짐짓 자세를 가다듬더니 보이는 라디오 앵글을 바라보더니 눈을 둥글게 휘며, 입가를 길게 늘어뜨렸다.
「오늘도 아름답구려, 낭자.」
뉘신지 모르겠으나 그 여친은 배운 분이 확실하다는 청취자들의 댓글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이름 없는 작품
It ain’t over till it’s over.
MLB 역사상 최고의 포수로 꼽히는 요기 베라가 말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고.
야알못 집안에 태어나 슬프게도 홀로 야구에 미친 남자. 그래서 야구랑은 아무 상관 없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요기 베라의 명언을 책상머리, 컴퓨터 바탕화면, 휴대폰 액정 등 눈에 보이는 곳곳에 적어뒀던 손경수는 요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끝났는데 안 끝나. 대체 언제 끝나?’
손경수, 서른여덟, 드라마 PD.
최근 연출한 마지막 작품은 그 유명한 ‘시청률 제조기’, ‘로맨틱코미디의 여왕’ 공연재 작가의 <연애플래너>. 그 전작도 공연재와 호흡을 맞췄고, SDS를 대표하는 스타 PD로 알려져 있다. 사실 그보다 더 유명한 건 아무래도 그의 특별한 파트너지만.
아무튼, 이러저러한 손경수는 최근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았다. 방송국에 입사하고 처음으로 보통 사람들처럼 한여름에 휴가를 써보려고 했는데 장렬히 실패!
종영한 지 육 개월 만에 갑작스레 제작이 확정된 <연애플래너> 감독판 블루레이라는 거대한 음모에 발목 잡혀 SDS 개인편집실에 처박힌 지 벌써 열흘째였다.
‘세상은 썩었어.’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은 그제 같고, 내일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재편집의 굴레에서 벗어날 방도가 보이질 않았다.
– 이번엔 그냥 넘기려고 했는데, 아시잖아요? 이은석이 연기는 못해도 팬덤은 짱짱한 거. 일본이랑 중국 수요가 상당해서 제작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어요. 물론, 감독님만 오케이 하시면요.
‘거절 못 할 거 뻔히 알면서···!’
제작사 사과나무 신 대표의 반질반질한 얼굴을 떠올린 손경수가 인상을 팍 구겼다. 모니터 옆에 대충 던져둔 <연애플래너> 대본이 오늘따라 화를 돋웠다.
‘누가 공연재 친구 아니랄까 봐. 신 대표도 사람 미치게 만드는데 일가견 있다니까? 이왕 제작할 거면 확정이라도 일찍 하던가. 종영한 지가 언젠데 이제 와서···. 골 빠개지겠네.’
드라마 감독판 블루레이.
PD 입장에서는 참 계륵 같은 존재다. 방송 버전을 그대로 낼 수는 없으니, 전 회차의 대본과 영상을 샅샅이 살피고, 본 방송에는 포함되지 않은 수많은 비방 영상까지 긁어내 재편집하는 고강도의 작업을 감당해야 한다.
일한 만큼 월급을 더 주면 할만하지 않냐고? NO! 그럴 리가. 제작사에 따라 소정의 금일봉을 주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는 서비스에 가까운 작업이다.
그렇다면 대가 없는 노동이니 대차게 거절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싶지만, 의외로 PD들은 자신이 연출한 작품의 감독판 블루레이 제작을 꿈꾼다.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쁘게, 최선을 다해서 만들어주리라 다짐도 한다.
왜냐고?
본디 창작자의 마음이라는 게 그렇다. 내가 만든 창작물. 일명 내 새끼를 특별하게 소장하고 싶다는 요구가 빗발치는데 마음이 동하지 않을 리가 있겠느냔 말이다.
무엇보다 블루레이는 “나오기만 하면 산다”라면서 삼십만 원 돈을 턱 하고 지불하는 소비자가 최소 천에서 천오백 명이 모여야 제작 논의가 진행된다.
“시청률이 작품의 대중적인 흥행을 보여주는 지표라면, 감독판 블루레이는 해당 드라마 팬덤의 응집력과 구매력을 시사한다”라는 대중문화평론가의 말이 과언이 아닐 만큼 연출자로서는 자부심을 느낄만한 일이라는 뜻이다.
손경수도 그랬다.
‘얘는 진짜 만들기 싫었단 말이야···.’
<연애플래너>만 빼고.
작년 연말부터 올 초까지 방영한 <연애플래너>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냈다. 그게 문제였다. ‘시청률 제조기’ 공연재가 썼고, 그녀의 오랜 파트너인 ‘SDS 간판 PD’ 손경수가 찍었는데 대박이 아니라 나쁘지 않았다는 것.
천상예술대상에 작품, 연출, 극본, 최우수남자까지 총 네 부문의 후보로 노미네이트 됐지만, 건진 건 극본상 하나뿐. 대본은 좋았으나, 스타 작감과 한류스타 조합치고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을 받았다.
[···드라마는 작가 놀음. 연출이 좋다면 금상첨화. 그러나 이 모든 조건에도 배우가 못 받아먹으면 말짱 꽝이다. 작가가 시청자의 심장을 찢어발기는 심쿵 대사를 백날 써봤자, 대사를 전달하는 이는 배우다. <연애플래너>는···.]방영 중에도 많이 까였는데, 천상예술대상의 결과가 뜨자마자 포털 메인에 걸렸던 어느 평론가의 일침은 손경수의 아픈 곳을 찔렀다.
‘내가 미쳤었지···.’
공연재가 대놓고 탐탁잖은 티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주인공을 이은석으로 밀어붙였던 장본인이 바로 손경수 자신이었다.
‘한류스타씩이나 돼서 로코를 이렇게 못할 줄은 몰랐지!’
그래도 멜로로 떴던 놈인데. 뭐가 문제였을까.
모니터에 일시 정지된 이은석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하던 손경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머리라도 식혀야지. 이대로 편집하다간 이은석의 얼굴 위에 ‘발연기’라고 대문짝만한 자막을 박을지도 몰랐다.
잠시 후.
“음?”
SDS 층마다, 특히 종합편집실과 개인편집실이 배치된 층에는 조금 더 쾌적하게 꾸며졌으나, 언제 들여다봐도 돼지우리와 하등 다를 게 없는 휴게실 문을 연 손경수가 멈칫했다.
“얘들 진짜 연기력 낭비다.”
“제 말이요. 저기서 저럴 게 아니라 제 드라마에서 좀···.”
“꿈도 크네. 바랄 걸 바라라. 입봉부터 해야지. 이 자식아.”
“아, 왜요! 꿈은 크게 가지라고 그랬습니다.”
컵라면을 하나씩 쥐고 옹기종기 모여서 수군대는 뒤통수들이 익숙했다.
‘뭘 보길래?’
「마지막 사연으로 가볼까요? 사연을 보내 주신 분이 여성분이네요. 제가 먼저 읽어볼게요.」
배우 특유의 발성. 아는 목소리다. 시계를 보니 열 시 십 분 전이었다.
「저는 요즘 사랑에 빠졌습니다. 하루하루가 아름다운 나날이에요.」
여배우의 낭랑한 음성을 듣자마자 잠깐 부풀었던 호기심이 가라앉았다. 손경수도 종종 챙겨 듣는 고주희의 라디오였다.
「하지만 주변 친구들이 모두 말립니다. 사내연애는 하는 게 아니라나요? 실은 제가 마음에 품은 상대가 다름 아닌 저희 회사 팀장님이시거든요.」
“미쳤네. 당장 때려치워라. 세상에 반이 남자고, 반이 여잔데.”
“그러니까 말입니다. 상사를 좋아하다니. 머리가 회까닥한 거 아닙니까?”
‘쟤들 나 들어온 거 모르나?’
저놈들은 시꺼먼 놈들이고. 저는 유부남이니 아무 상관 없는 얘기였지만, 듣는 상사 손경수는 왠지 기분이 나빴다.
「팀장님은 다정한 분은 아니에요. 굉장히 프로페셔널한 분이거든요. 하지만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모습도 무척 섹시하시답니다. 저번 주에는 제가···.」
“콩깍지네. 콩깍지.”
“왜, 그런 거 아닐까요? 일은 너무 고되고. 주변엔 다 거지 같은 놈들만 있으니까, 맨날 갈구다가 한 번만 잘해줘도 혹하는 거 말입니다. 노비들끼리 연애하는 그런···.”
“야 이 새끼야. 니가 그렇게 말하니까 우리가 다 노비 같잖아!”
“아니,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사내연애를 꿈꾼다는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절절한 짝사랑 사연은 어느새 상사에게 마음을 들키고 말았다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불어터졌을 게 분명한 컵라면을 꾸역꾸역 먹는 놈들이 혀를 차고, 고주희의 목소리를 bgm 삼아 근처 소파에 조용히 몸을 파묻은 손경수가 ‘이건 전부 사내연애에 대한 헛된 망상을 심어준 K-드라마의 잘못’이라는 결론을 내렸을 때쯤,
「주희 씨. 대체 내가 왜 좋습니까?」
낯선 목소리 하나가 손경수의 고막을 강타했다. 곧이어 꺄꺄거리는 고주희의 목소리와 후배들의 허탈한 투덜거림이 이어졌다.
“얼굴.”
“얼굴이네요.”
“인정.”
‘…목소리 좋네. 누구지? 들어본 것 같은데.’
그나저나 얼굴이라니. 라디오에서 갑자기 왜 얼굴을 찾는가 싶어 손경수는 몸을 일으켰다.
“야. 봐라. 저렇게 생겨야 사내연애가 납득되는 거야.”
“…선배 진짜 저한테 왜 이러시는데요. 저 사내연애 안 하는데.”
“너 하라는 소리가 아니고 인마. 앞으로 사내연애 드라마 캐스팅할 때 잘 기억해두라고.”
“방금 걔 누구냐?”
“누구긴 누구야, 눈 없냐? 이도하···! ···입니다. 선배님.”
그제야 손경수의 존재를 눈치챈 후배들이 호들갑스럽게 자리를 정돈했다.
“영상이네? 이거, 보이는 라디오?”
“넵. 맞습니다.”
“일 안 하고 여기서 뭐 하나 했더니. 웬일로 보라를 다 챙겨봐?”
“그게···. 궁금하잖아요. 이도하. 쟤 온대서 구경하러 간 애들도 있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선배님, 이도하 실물은 어떻습니까?”
실은 저도 궁금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며 아쉬운 티를 팍팍 낸 조연출 1년 차가 눈을 반짝였다.
“내가 어떻게 알아. 나도 촬영장에서 본 적이 없는데.”
“그게 아니라 선배님 저번에 천상예술대상에서-. 윽.”
눈치 없는 1년 차가 동기에게 옆구리를 맞고 입을 다물었다. 네 군데나 후보로 이름을 올렸지만, 작가상 하나 건진 <연애플래너> 이야기였다.
“가까이서 본 것도 아니고. 시상식이랑 촬영장이랑 같냐. 그래도 뭐···. 잘생기긴 했더라.”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하는 손경수의 말을 후배 하나가 재빨리 받았다.
“다음 작품에 이도하는 어떠세요?”
“응?”
“쟤가 아까 연기하고 싶다고 그러던데. 차기작은 아직 없다나 봐요. 그···. 공 작가님 차기작 준비 중이시지 않아요?”
“…뭐 그렇긴 한데. 캐스팅이 내 맘대로 되나.”
이은석으로 대차게 말아먹었는데. 또 잘못 들이댔다간 공연재에게 철퇴를 맞을지도 몰랐다.
“에이, 왜요? 공 작가님이 선배 말이라면 껌벅 죽으시는데. 그리고 이도하 정도면 괜찮잖아요?”
‘그런가?’
아니다. 이번엔 안된다 생각하면서도 속살거리는 후배의 말에 자꾸만 구미가 당겼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한 번 말아먹은 캐스팅은 성공한 캐스팅으로 만회해야 하는 게 아닐까?
“…저거 지금 라이브지?”
“네. 라디오센터에서 찍고 있어요. 곧 끝나겠네요.”
「도하 씨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후배의 말대로 곧 끝날 모양인지 끝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어쩌지. 어쩔까?’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 손경수가 휴대폰을 꺼내 들어 톡톡톡 메시지를 썼다.
수신자는 ‘내사랑 꽁♥’.
위대한 작가이자, 세상에서 제일 무섭고, 동시에 아름다운 손경수의 아내 공연재였다.
[여봉♡ 우리 캐스팅 말인데···. 혹시 생각해둔 배우 있어용?]메시지 옆에 붙은 노란색 1이 사라졌다. 그런데 답이 없다.
그러니까 읽은 게 분명한데, 답이 없다.
‘역시 닥치고 있을 걸 그랬나···!’
괜히 나불댔다. 대본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아니고, 신 대표랑 둘이 머리 맞대고 기획만 잔뜩 하고 있던데.
‘그래도 이번 작품은 주연 나잇대를 좀 내릴 수도 있다고 했었는데···. 분명 그랬는데···!’
초조하게 발을 떨던 손경수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그···. 이도하라고. 알죠? 걔가 지금 아래층에 와있거든요.] [혹시 꽁♥이···]관심 있으면 바로 한 번 만나보겠다는 말을 채 쓰기도 전.
지잉- 지잉-
“여··· 여보세요?”
답장 대신 전화라니! 진짜 화났나? 이도하도 아니었나? 시간을 돌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전화를 받은 손경수의 귓가로 공연재가 외쳤다.
– 당장 가서 만나봐!
“어···! 어!”
서른여덟, SDS의 스타 PD, 시청률 제조기 공연재의 하나뿐인 남편이자 애처가 손경수가 12층 라디오센터를 향해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렸다.
한발 늦어서 텅 빈 부스만이 손경수를 반길 거라는 것. 그래서 사랑하는 꽁♥에게 두 배로 혼날 불운한 미래를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