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rtistic Genius of Music Is the Reincarnation of Paganini RAW novel - Chapter (158)
예술고 음악천재는 환생한 파가니니-158화(158/250)
영화는 개봉 첫 주, 북미에서 주말 동안 1305개 관에서 개봉되어 1000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입소문은 점점 퍼져 개봉관은 점점 확대되었다.
결국 영화 개봉 2주가 채 되지 않아 손익분기점을 넘었다.
그리고 한 달 만에 북미 상영 수익만 5000만 달러를 넘었다.
영화 관계자들은 모두 기뻐했고 특히 OST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이제 영화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개봉되기 시작했다.
주원이 음악의 절반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에서는 메이킹 영상도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화 속 주원이 재즈 피아노를 치는 장면에서 그를 발견한 팬들은 N차 관람에 돌입했다.
N차 관람의 인증샷과 함께 OST의 인기는 거세어졌다.
미국과 한국에서의 인기가 두드러졌고 세계 곳곳 여러 나라에서도 인기는 거침없었다.
특히 주인공 남녀가 함께 부르는 ‘My only one’과 남자 주인공이 부르는 ‘April in New York’의 인기가 폭발적이었다.
영화의 인기와 함께 돌풍을 불러일으킨 OST.
앨범을 구매하거나 음원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뉴욕 타임즈에서는 벤자민 휴즈 감독의 신작 ‘April in New York’에 관한 기사를 한 면에 모두 할애했다.
벤자민 휴즈 감독의 새로운 뮤지컬 영화 ‘April in New York’의 인기가 거세다.
영화의 인기와 OST에 대한 사랑은 놀라울 정도이다.
빌보드 차트 핫 200의 가장 높은 순위에 오른 영화와 같은 제목의 ‘April in New York’과 차트 10위 권의 ‘My only one’.
놀랍게도 이 두 곡을 만든 사람은 클래식계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주원이다.
그 곡 외에도 이번 영화의 OST에 수록곡 절반이 그의 작품이다.
현악 4중주부터 오케스트라 곡, 피아노 솔로곡 그리고 재즈 트리오 곡까지 장르와 편성도 다양하다.
흔히들 클래식 음악가들은 그들만의 벽을 세우곤 한다.
하지만 그는 그런 벽을 무너뜨리고 적극적으로 대중에게 다가오는 행보를 펼치고 있다.
지금 뉴욕을 찾는 이들에게 주원의 음악이 기억된다는 것은 행운일 것이다.
이번 주말엔 다채로운 음악이 주는 감동을 느끼러 가까운 극장에 가는 것이 어떨까?
‘April in New York’을 보며 새로운 사랑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음악일 수도 있을 것이다.
New York Times-
영화의 배경이 된 뉴욕의 모든 곳은 관광객이 눈에 띄게 늘었다.
그리고 기타를 들고 삼삼오오 모여 영화 속 음악을 부르는 광경도 많이 목격되었다.
그렇게 뉴욕의 곳곳에서 주원이 만든 음악의 씨앗들이 바람을 타고 퍼지고 있었다.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영화 OST는 사랑받았다.
그리고 커버 영상이 넘쳐났다.
유명인들의 커버가 쌓이고 쌓이던 어느 날.
드디어 노래는 빌보드 1위를 찍었다.
* * *
미국의 대학입시는 우리나라의 수시처럼 조금 일찍 치루는 Early Decision과 정시와 비슷한 Regular Decision으로 나뉜다.
나는 Early Decision으로 줄리어드에 가장 먼저 합격한 상태였다.
친구들 역시 원하는 학교에 차례로 합격 소식을 들었다.
뉴욕 예술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9월에 줄리어드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미국은 한국과 학사일정이 달라 3월이 아닌 한 학기 빠른 9월에 입학하게 된다.
나는 줄리어드에 입학하기 전에 한국에 다녀오게 되었다.
이미 한국에서 여러 가지 스케줄이 잡혀있었다.
하나는 빈 필과의 협연.
그리고 또 하나는 한국 관객들과 함께하는 인생 첫 독주회였다.
빈 필의 마에스트로 베르크만은 오랜 시간 나에게 협연을 제의했다.
결국 비엔나가 아닌 한국에서 공연이 성사되었다.
상임 지휘자 없이 운영되온 빈 필에서 그간의 운영철칙을 바꾸고 영입한 마에스트로 에른스트 폰 베르크만.
빈 필의 색채에 새로운 변화를 꾀하던 마에스트로 베르크만은 나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일본에 가서는 공연을 해도 한국에선 자주 공연하지 않았던 빈 필.
7년 만에 그들의 내한 공연이 성사되었다.
그리고 빈 필의 공연의 협연자로 내가 선정되었다는 사실이 언론에 알려졌다.
-비엔나 필하모닉, 마에스트로 베르크만과 함께 7년 만에 내한 공연.
협연자는 파가니니 국제 콩쿠르 우승자 문주원.
표는 일찌감치 매진되었다.
나는 한국에서 열릴 대규모의 연주회를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약 14시간.
입국장에 들어서자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아빠와 할아버지 그리고 석 대표님과 이로운 실장님.
그리고 낯익은 얼굴의 기자 분들도 많았다.
파가니니 국제 콩쿠르에서 나를 취재하러 오셨던 분들이 그대로 모두 공항에 나와계셨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그분들의 모습이 반가웠다.
“주원 씨, 여기 보고 손 한 번만 흔들어 주세요.”
“주원 씨, 여기도요.”
“파가니니 국제 콩쿠르 우승과 빌보드 1위 모두 축하합니다. 정말 대단하네요.”
“사랑해주신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기자분들의 질문에 모두 답한 뒤, 가족들과 드디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특히 지환이는 내 옆에 찰싹 붙어서 모든 사진에 같이 찍히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다 큰 것 같아도 아직 애란 말이지.’
나는 지환이의 머리를 북북 쓰다듬어 주었다.
“형 없이도 씩씩하게 잘 지냈지?”
“당연하지. 내가 뭐 앤가?”
“안젤리카랑 소설 쓰는 건 거의 끝나가? 안젤리카가 나한테 메일 보낼 때 네 이야기 많이 하던데.”
“어, 거의 다 완성됐어.”
“그래? 대단한데? 집에 가면 보여줘.”
“약속 지켜야지. 우리 책에 주제곡 만들어주기로 했잖아.”
지환이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게 뭐 어렵겠어? 당연히 약속 지키지. 근데 스토리가 형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자신 있어?”
그동안 가족들과 전화로 많은 얘기를 했지만 채워지지 않았던 외로움.
가족들의 얼굴을 보자 한눈에 모든 외로움이 사라졌다.
아빠와 할아버지 그리고 지환이의 웃는 얼굴만 봐도 그냥 좋았다.
대표님과 실장님의 모습은 언제나 믿음직스럽고 든든했다.
공항에서 집까지 이동하면서 우리는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아버지가 만든 악기로 운영될 ‘악기 은행’의 이야기부터 아빠의 학원 얘기까지.
내가 없는 동안 일어난 많은 일들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정말 궁금했었는데.’
그리고 아빠는 조심스레 한 가지 사실을 더 밝혔다.
“나 요즘 유리랑 만나고 있어. 너네한테도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
“요즘 뭔가 기분이 좋아 보이더니 그래서였구나.”
아빠의 새로운 사랑이 예전처럼 힘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제는 아빠가 우리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했다.
‘아빠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집에 도착하니 집 앞에 우진이랑 수혁이와 와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더 반가웠고 목소리가 엄청 커졌다.
“바쁠 텐데 어떻게 왔어?”
“바빠도 당연히 너 보러 와야지. 너희 아버지한테 전화해서 언제쯤 도착할 것 같냐고 여쭤봤어.”
수혁이랑 우진이까지 집에 같이 들어갔다.
모처럼 북적북적한 우리 집.
작은 집에 온기가 가득 찼다.
우리는 모두 한 가족 같았다.
한국에 도착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난 뉴욕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렇게 한국에서의 행복한 첫날이 지나갔다.
다음 날 오후 늦게 일어난 나는 우선 아빠가 새로 오픈한 학원부터 가보고 싶었다.
“아빠, 나 지금 학원에 가볼래.”
“레슨 있는데 괜찮겠어?”
“당연히 괜찮지. 그리고 최종호 원장님께도 인사해야지.”
나는 바이올린을 어깨에 메고 아빠와 함께 학원으로 향했다.
아빠의 학원은 에반스 실용 음악 학원보다는 훨씬 작은 규모였다.
하지만 아빠는 정말 학원에 애정이 깊어 보였다.
“학생들 레슨 하는 것도 좋고, 스케줄 빌 때마다 와서 연습하는 것도 정말 좋아. 아들한테 아빠가 정말 큰 신세를 졌네.”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난 아빠한테 이제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뻐.”
아빠와 함께하는 소소한 일상이 너무 소중하고 행복했다.
아직 레슨 할 학생이 올 시간까지 시간이 좀 있었기에 우리는 함께 에반스 실용 음악 학원으로 갔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원장님. 저 왔어요.”
“이게 누구야?”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저 어제 한국 왔어요.”
“시차 때문에 힘들 텐데 뭐하러 인사하러 왔어. 좀 쉬지.”
“원장님한테 감사한 게 많잖아요. 저희 아빠랑 친구 되셨다면서요? 아빠가 원장님 칭찬 엄청 하세요.”
“아. 형님은 뭘 또 그렇게까지 사실을 말하고 다니세요. 주원이도 이미 다 압니다. 하핫.”
화기애애한 가운데 원장님은 나에게 많은 질문을 하셨다.
“블루 노트에서 연주하는 기분은 어땠어? 진짜 내 꿈이었는데.”
“그럼 뉴욕 오시면 저랑 같이 가서 공연해요. 영화 때문에 손님 미어터진다고 언제든 공연하고 싶을 때면 말하라고 했어요.”
“진짜야? 내 인생 버킷리스트가 이렇게 해결되는구나.”
나는 다시 한번 원장님께 감사하다는 인사와 독주회에 초대하겠다는 말씀을 드리곤 다시 아빠의 학원으로 갔다.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학생이 학원에서 튜닝을 하고 연습 중이었다.
그 학생은 나를 보자마자 입이 딱 벌어졌다.
“혹시…. 바이올리니스트 문주원이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었다.
“여기 원장님이 우리 아빠인 거 몰랐어요?”
“알았는데 어떻게 한국에.”
“어제 왔거든요.”
“저랑 사진 한 번만 찍어 주시면 안 돼요? 제 온스타에 올려도 되나요?”
“물론이에요.”
학생은 우리 아빠에게 당당히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했다.
우리는 사진을 찍었고 학생은 즉시 온스타에 업로드했다.
나는 아빠가 학생을 레슨하는 과정을 지켜봤고 조금 후엔 피아노로 비올라와 이중주를 했다.
바이올린을 전공하다가 뒤늦게 비올라 음색의 매력을 깨닫고 비올라 전공으로 돌렸다는 중1 학생.
내가 피아노를 치며 함께 연주하자 엄청 행복한 표정이었다.
“저 진짜 꿈꾸는 것 같아요. 제가 주원 오빠랑 듀오 연주를 하다니!”
나는 학생의 동의를 얻어 우리의 연습 과정을 영상으로 찍었고.
그리고 KM 클래식 채널에 업로드했다.
#한국 온 지 이틀째. 아빠의 제자와 이중주 영상 올려요.
영상을 올리자마자 댓글 창에 댓글이 폭발했다.
-주원아. 거기 어디야?
-나도 비올라 레슨 받을래.
-나도 주원이랑 이중주하고 싶은데 악기 못 해 슬퍼.
-누나가 지금 당장 만나러 갈게. 좀만 기다려!
* * *
빈 필 단원들은 일본의 3개 도시에서 연주를 모두 마치고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저녁 식사를 하며 다음 행선지인 한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파가니니 콩쿠르에서 우승한 주원의 경우.
클래식 전공자들에게는 신기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보통 공연이 오르기 전에 협연자와 리허설은 2번 정도 하게 된다.
대부분의 단원들은 화제의 인물인 주원을 만나는 것에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습하면서 그의 음악성에 감탄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 주원이 빈 필에게 제안한 내용은 어찌 보면 굉장히 단순하면서도 좀처럼 유례없는 일이었다.
빈 필의 악장 로버트 바우어는 처음 주원의 제안을 들었을 때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파가니니 국제 콩쿠르의 우승자이지만 이제 갓 이름이 알려진 십 대의 연주자.
그런 그가 내한 공연의 협연자 제의를 수락하면서 내건 조건.
그건 바로 ‘대중에게 다가가는 클래식’이었다.
굳이 반대할 이유도 없이 단순한 방법이었다.
주원은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싶다며 일부 프로그램을 변경할 것을 요청했다.
워낙 자주 했던 레파토리라 연주의 질에서 문제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빈 필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빈 필 단원들 사이에서 논란이 잠시 있었다.
비엔나 필하모닉은 오랜 기간동안 상임 지휘자가 없이 운영되었다.
따라서 모든 결정은 언제나 단원들의 투표로 결정되었다.
그런 그들이 투표로 마에스트로 베르크만을 상임 지휘자로 결정했다.
그건 빈 필에서도 변화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전통의 가치를 누구보다 중시하는 빈 필이지만.
오로지 전통만 고집하다가는 미래가 없을 수 있다는 경각심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그의 음악성과 예술성 그리고 그가 빈 필의 정통성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진 후.
에른스트 폰 베르크만은 빈 필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1930년대 마지막 빈 필의 상임 지휘자였던 클레멘스 크라우스 이후 무려 80년 이상 흐른 후였다.
그렇게 선출된 마에스트로 베르크만이 파가니니 콩쿠르 파이널을 직관한 후.
끈질긴 협연 제의 후에 성사된 특별 공연이었다.
불만을 가진 몇몇 단원들은 이런 얘기를 했다.
-우리는 빈 필입니다. 십 대 꼬마 하나한테 휘둘릴 오케스트라가 아니죠.
하지만 악장 로버트의 생각은 좀 달랐다.
-이건 휘둘리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네. 연주자로서 대중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방법을 고민한다는 건 바람직한 일이지.
-그래도 십 대 꼬마의 제안에 바로 프로그램 변경하는 거 내키지 않는다고요.
-어차피 투표로 정해질걸세. 자네들처럼 반대하는 사람이 많으면 프로그램 변경은 없을 거야.
결국 투표가 이뤄졌다.
그리고 그 결과 과반수 이상의 단원이 주원의 의견에 동의했다.
며칠 후, 한국에 가면 주원과 리허설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반대했던 단원들도.
찬성했던 단원들도.
주원과의 리허설이 궁금한 것은 사실이었다.
전 세계 어디서 공연을 해도 빈 필에게 이런 요구를 하는 연주자는 없었으니까.
게다가 주원은 이제 막 클래식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사람이었으니까.
두 가지 시선이 공존한 채.
드디어 비엔나 필이 한국에 입국할 시간이 다가왔다.
예술고 음악천재는 환생한 파가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