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101
101화
린 바레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헤레시아가 가문을 집어삼키기 위해 온갖 악한 짓을 저지른다는 것은 알았어도, 흑마법에까지 손댔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충격에 빠져 잠시 멍하니 있다가, 3초도 되지 않는 그 짧은 시간에 생각을 마치고 가브에게만 들리도록 입을 열었다.
“법대로 해야죠.”
제국은 물론 모든 국가는 흑마법을 배척한다. 흑마법의 힘을 빌린 자가 있다면 감가 없이 화형에 처한다. 가브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헤레시아는 자신이 몰아붙이는 상황에서 가브가 몇 마디 하자 싸늘할 정도로 차분해진 린을 보고 심기가 불편해졌다.
“호위병 따위가 낄 자리를 구분하지 못하는구나.”
가브는 그녀를 살짝 보았다가 고개를 돌려 바레스 후작을 보며 묵례했다.
“저는 네비아 여신을 모시는 레호아르 수도원의 성기사 가드라고 합니다. 린 바레스 님의 손도 직접 치료해 드렸지요.”
“하, 호위 기사에 이어 성기사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레호아르? 그 북서쪽에 있는 코딱지만 한 수도원을 말하는 건가?”
갑자기 성기사라고 주장하는 자가 끼어들자 헤레시아는 물론 바레스 후작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를 배척하면 네비아 교단 자체를 배척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레스 후작은 헤레시아의 눈치를 살짝 살피고는 가브에게 턱짓했다.
“재밌구나, 제 어미를 죽인 패륜아를 호위하는 성기사라. 네가 네비아님의 성기사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느냐?”
후작의 말에 린이 자신의 손을 들어 붕대를 풀었다. 그러곤 매끈해진 손을 천천히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에 후작은 물론 주변 친척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정말 멀쩡해졌잖아?”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래! 그거다! 흑마법을 쓴 거다!”
“린이 흑마법에 영혼을 팔았다! 저자가 흑마법사다!”
순식간에 불에 태워 죽여도 모자랄 놈이 되었지만, 가브와 린의 표정은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헤레시아가 움찔하며 인형에 발을 떼고 한 걸음 물러났다.
후작이 눈짓하자 대전 양쪽에 일렬로 서 있던 기사들이 한 걸음 폭을 좁히며 압박했다.
“감히 대제국의 후작가를 농락했다면 네놈 목숨으로도 대가를 치를 수 없을 것이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도 번거로이 신분을 밝히는 것을 꺼리지만 사안이 시급하여…….”
가브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지금 이 자리에, 마기를 품고 있는 자가 있습니다.”
“뭐, 뭣이?”
“마기?”
“마기라면…… 흑마법? 역시! 린이다!”
헤레시아는 무섭게 인상을 쓰며 가브에게 손가락질했다.
“헛소리다! 감히 신성한 후작가에 마기라니! 저 사기꾼을 당장 끌어내라!”
그녀의 외침에 성주 직속 기사들이 바로 가까이 다가왔다.
가브는 돌연 자신의 검을 꺼내어 들었다.
스릉.
그 행동에 기사들도 움찔하더니 전부 검을 뽑아 들었다. 장내는 순식간에 살벌한 기운이 가득 차며 공기가 팽팽해졌다.
“이 검은 수도원의 원장님께서 직접 신성력을 쏟아부어 만드신 성검입니다. 피부에 닿는 것만으로도 마기를 구별해 내지요.”
가브는 검 끝을 돌려 손잡이를 바레스 후작의 방향으로 보였다.
“후작님께서 직접 가문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 주시지요.”
후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기를 품은 자가 있다는 충격적인 정보에 비해 훨씬 쉬운 일이기에 그의 마음은 수용적이었다.
이곳에 있는 스무 명 남짓한 인원에게 검만 한 번씩 잡아 보면 찝찝함을 덜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손을 내미는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졌다.
“뭐 하는 겁니까!”
헤레시아였다. 그녀는 눈이 시뻘게져 씩씩거리며 후작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반응에 고개를 숙인 가브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현혹계 흑마법은, 아주 작은 의심이라도 들면 깨진다.
물을 담아 놓은 댐에 손가락만 한 구멍을 내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현혹계 흑마법이 그러하다. 작은 의심은 불신을 낳고 결국 공고했던 현혹은 깨어질 것이다.
후작은 눈을 깜빡이며 헤레시아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부인, 왜 그러시오?”
순수하게 문자 그대로의 질문이지만 헤레시아는 덜컥 찔려 시선을 피하며 더욱 화를 냈다.
“지금 저 사기꾼의 말대로 하겠다는 겁니까? 대바레스 후작가의 가주가 저딴 놈의 혓바닥에 현혹되어 놀아난다면 그 누가 우리를 믿고 따르겠어요?”
“맞습니다! 저자가 하라는 대로 하면 제 자존심이 허락을 못 합니다!”
“그래도 여기에 마기가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는데…… 찝찝하지 않나.”
의견이 벌써 반반으로 갈렸다. 후작이 무슨 생각인지 가만히 헤레시아를 쳐다보고 있을 때, 린이 가브의 검을 빼앗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럼 딱 한 명만 잡아 보죠.”
린은 헤레시아에게 검을 내밀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다가 벌러덩 넘어졌다. 시녀장이 다급히 부축했지만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쳐 냈다.
린은 오연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걸 잡으시면, 말씀대로 제국을 떠나 가문에 영원히 얼굴을 비치지 않겠습니다.”
헤레시아는 흔들리는 눈으로 검과 린을 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닥쳐라! 네놈들 생각대로 될 줄 알아? 처음에는 오크 로드가 나타났으니 도망치라더니 갑자기 마기? 흑마법? 어서 이곳을 더럽히는 이자들을 쫓……!”
저벅저벅저벅.
헤레시아는 발소리에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바레스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헤레시아는 그와 눈을 마주친 순간 흠칫 놀라 눈동자를 떨었다.
이전에 젊었을 적에 마주쳤던 그 깊고 현기가 어린 눈동자가 돌아오고 있다.
후작은 린에게서 검을 받아 들어 헤레시아에게 내밀었다.
“부인, 왜 이 검을 잡지 못하시오? 대체 왜……?”
후작의 어투가 차분해졌다. 그의 볼에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린다.
그는 현혹이 깨지면서 그토록 믿어 왔던 사람이 악마와 결탁했다는 사실을, 지난 기억을 통해 진하게 깨닫고 있었다.
그때는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인해 당연한 줄 알았던 모든 일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며 부자연스럽고 이상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 마지막 사건은 린의 어머니 둘째 부인의 죽음이었다.
“이, 이, 이…….”
후작의 표정과 눈빛에서 현혹이 깨졌다는 것을 알게 된 헤레시아는 흉측하게 인상을 쓰며 품에서 단검을 꺼내어 린을 향해 뻗었다.
“죽어, 이 새끼야!”
푹!
서슬 퍼런 단검이 가죽을 뚫고 몸 깊이 파고들어 손잡이밖에 보이지 않았다. 헤레시아는 단검이 박힌 가슴이 린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내 두터운 손이 내려와 그녀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 손은 놀랍도록 따스했다.
헤레시아는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입가에 피를 흘리며 안쓰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바레스 후작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많이 부족했나 보오.”
헤레시아는 눈이 빠질 듯이 크게 뜨며 단검의 손잡이를 놓았다.
“다, 당신, 당신이 왜……?”
바레스 후작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깨달았다. 순수했던 그녀가 무엇 때문에 흑마법에까지 손댔는지를.
후작은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녀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미……안하오.”
헤레시아는 후작의 눈에서 진심을 보았다. 그러기에 더욱 가슴이 찢어질 듯이 괴로웠다.
“아, 안 돼! 안 돼애!”
그녀가 손에 쥐고 싶었던 것은 바레스 후작가가 아니었다. 둘째 부인에게 빼앗겼던 후작이었다.
“아버지!”
린 바레스는 헤레시아를 밀쳐 내고 쓰러지는 바레스 후작의 몸을 받쳤다. 가브는 바로 가까이 다가와 후작의 옷을 찢고 가슴에 손댔다.
하지만 단검이 박힌 위치가 희망적이지 않았다. 단검은 정확히 심장 위치에 박혀 있었다. 손쉽게 제압할 실력을 갖췄음에도 그녀의 분노에 찬 검을 받은 것이다.
가브가 먼저 손을 환부에 대고 단검을 쭉 뽑았다. 후작의 가슴에서 피 분수가 솟구치자 주변 친척들이 당황하여 소리쳤다.
“어맛!”
“저거 진짜 성기사 맞아? 맡겨도 돼?”
“어떡해…….”
하지만 금세 피가 멎고 환부가 저절로 아물어지자 불만이 쏙 들어갔다. 신성력이 아니고서야 지금 현상이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브가 눈을 뜨자 린이 걱정스레 물었다.
“어, 어떻게 됐어요? 왜, 왜 안 일어나셔요?”
가브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황은 역전되어 헤레시아는 기사 두 명에게 붙들려 있었다.
“이미 영혼이 떠났습니다. 시체를 꿰맨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아…….”
린은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몇 년 전부터 갑자기 변했지만, 그 전까지는 따뜻하고 존경스러운 아버지였다. 그때의 기억 때문에 바뀐 아버지를 보는 마음이 더욱 괴로웠던 린이었다.
헤레시아가 추악한 면을 드러내며 다수에게 걸어 놨던 현혹계 흑마법이 깨지고, 바레스 후작의 죽음으로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헤레시아는 후작의 사망과 동시에 졸도했다. 기사들은 그녀를 끌고 바레스성의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그녀는 삶의 의욕을 잃은 듯이 멍하니 앉아 아무것도 먹지도 않았고 자지도 않았다.
마법이 깨졌지만 워낙 오랫동안 마법이 걸려 있어서 그런지 아예 본래의 성격과 가치관이 뒤틀려 버린 사람들이 많았다.
린 바레스의 배다른 두 형도 마찬가지였다.
린은 본래의 목적을 잊지 않고 가문을 피신시키기 위해, 그리고 가문으로부터 여동생 루아를 지키기 위해 가문에 남기로 했다.
린은 가브를 배웅하기 위해 바레스 내성의 복도를 거닐었다.
“아버지는…… 왜 마기를 눈치채지 못하셨을까요?”
“……희미했으니까, 아주.”
“아…….”
마나에 민감한 마법사 정도는 되어야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희미하기도 했지만, 가족이라는 방어막이 기감을 더욱 무디게 만들었을 것이다.
린은 가브를 보내기 아쉬운지 바로 질문을 이었다.
“아, 그런데 그 검은 정말 마기를 구별해 내는 기능이 있는 건가요?”
“아니, 전초기지에서 주운 검이다.”
“아…….”
곧이어 내성 성문에 도착했다. 린은 열심히 등에 메고 왔던 커다란 목갑을 가브에게 건네었다.
“형님에게는 정말…… 제가 평생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습니다. 받아 주시죠.”
가브는 먼저 목갑을 열어 보았다. 튀지 않는 무광에 고급스러운 은색의 검집과, 날이 두툼한 검이 나란히 놓여 있다.
“검을 잃어버리셨다고 들었거든요. 중검 쓰시는 거 맞죠?”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검날을 살폈다. 덧입힌 것인지 몰라도 신의 광물이라 불리는 아디움이 분명했다.
고개를 들자 린이 급히 설명을 이었다.
“아, 네. 우리 가문의 금고에서 찾은 건데, 할아버지 말고는 중검 쓰시는 분이 없어서 괜찮아요.”
원래부터 거절할 생각이 없었지만, 가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야 검과 검집을 챙겼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가브 형님.”
“마물 군단이 바르제카 요새에 다다르면 소문이 금방 돌 거다. 동쪽으로 대피해라.”
“동쪽……. 예, 제 가문과 영지민들을 꼭 지키겠습니다.”
가브는 그의 어깨에 커다란 손을 툭 얹고는 바로 뒤돌아섰다.
* * *
저 멀리 크고 견고한 성이 보인다.
세실리아는 그것을 확인하고는 발튼의 어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북서쪽, 얼마 안 남았다.”
“주군!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이 발튼이 갑니다!”
“목소리 낮춰, 주둥이 꿰매기 전에.”
에런은 진한 보라색 로브를 걸치고는 자신이 먼저 앞장서며 투덜거렸다.
“내가 미쳤지, 여길 오다니…….”
그러나 그녀는 까마귀들의 습격을 두 번이나 받아 차마 이들과 떨어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