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102
102화
가브 일행은 제국을 버리고 사막을 넘어서 남쪽 나라로 가기로 틀을 잡았다. 최근에 지냈던 레브데리언 왕국이나 사해 본단이 있는 크레아 왕국으로 갈 예정이다.
‘미안하다, 내 손으로 해 주지 못해서.’
가브는 복수를 접었다. 붉은달 기사단과 제국의 수많은 귀족들, 그들을 상대하다가 지금 옆에 남아 있는 사람들마저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오크 로드가 이끄는 마물 군단이 제국을 쓸어버릴 것이라는 이유가 컸다.
말을 타고 가는 길, 이엘이 말 위에서 고개를 꾸벅거리는 것이 보인다. 만나고 나서 한 번도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해서 낙마의 위험에도 졸음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마차를 구해서 다 같이 이동하는 게 좋겠군.”
“조, 좋습니다, 스승님! 지, 진즉에 그럴걸.”
헤딘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격하게 동의했다.
그러나 말보다 마차가 더 느리기에 일행은 바레스성보다 조금 더 안전하게 카르마 북문을 지나 수도에서 말을 팔고 마차를 구하기로 했다.
수도 카르마 도시는 바레스 후작령과 마찬가지로 아직 소식이 닿지 않았는지, 아니면 일부러 퍼트리지 않았는지 다른 세상처럼 복작거리고 활기찼다.
많은 사람들 틈에서 말을 끌고 가는 길, 가브의 은빛 갑옷으로 인해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기사다.”
“방랑 기사 같은데 갑옷이 좋아 보이네.”
“쉿, 들을라. 어디 좋은 가문의 기사일지 어떻게 알아?”
가브는 시선에 불편함을 느끼고 가죽코트로 갑옷을 살짝 가렸다. 그때 저 멀리서부터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납시오! 길을 비키시오!”
고위 귀족의 행차다. 가브는 일행과 함께 구석으로 최대한 이동했다. 그사이 외침이 다시 한번 들렸다.
“펜릴 백작 납시오! 길을 비키시…….”
콩-.
깃발을 든 병사의 머리에 마정석이 박힌 지팡이가 쥐어박혔다.
“아야.”
“귀 아프다고, 귀 아파. 앞에 누구 있을 때만 하라니까. 길 다 트였잖아, 엉? 언제까지 맞아야 알아들을래?”
“죄, 죄송합니다.”
낯익은 광경이다. 가브는 변하지 않은 펜릴 백작의 모습에 절로 시선이 돌아갔다.
사방으로는 백금갑옷을 입은 기사 네 명이 호위 중이고, 그 뒤로 중무장을 한 병사들 스무 명이 따랐다.
펜릴은 깃발 병사가 조용해지자 그제야 평온한 표정으로 말을 몰았다. 민망한지 양쪽의 주민들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고 있었다.
다그닥, 다그닥.
그렇게 가브를 지나쳐 가던 중, 돌연 펜릴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정확히 가브를 향해서였다.
숨기고 있었지만 마나에 극도로 민감한 마법사는 그 실낱같은 마나라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펜릴과 가브의 눈이 마주쳤다. 펜릴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금세 주변 눈치를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가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모른 체하고 지나가 준 것에 가브는 그의 배려를 느꼈다.
펜릴의 행렬이 지나가고, 가브는 그와 반대쪽으로 한 걸음 옮겼다가 멈춰 섰다.
척.
“스, 스승님?”
가브는 헤딘에게 말고삐를 넘기고는 발끝을 돌렸다.
펜릴의 행렬은 고가로 보이는 갑옷까지 제대로 갖춰 입은 가브가 막무가내로 다가오자 무기를 들이밀며 견제했다.
처적, 척척!
“백작님.”
가브의 요란한 등장에 펜릴은 인상을 확 찌푸리며 나무랐다.
“야, 인마! 여기가 어디라고 와!”
말과는 달리 지팡이로 기사들을 밀어 길을 텄다. 가브는 그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 작게 말했다.
“곧 오크 로드가 지휘하는 마물 군단이 들이닥칠 것입니다. 이곳에 계시면 위험합니다.”
귀를 쫑긋하고 듣던 펜릴은 몸을 살짝 물려 가브를 바라보았다.
“……그거 알려 주려고 왔냐?”
가브가 아무 말이 없자, 펜릴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알아. 지금 상황에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리? 이제 돈 받은 값 할 때가 된 거지. 너 돈은 있냐?”
역시나 알고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제국이 사실을 대놓고 알리면 혼란이 가중될까 하여 긴밀하게 마법사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펜릴은 품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어 가브에게 던지고는 지팡이로 그의 가슴을 밀었다.
“넌 얼른 네 갈 길이나 가, 썩!”
가브는 다시 멀어지는 펜릴의 뒷모습을 보며 기분이 이상해졌다.
도움을 받기만 했는데 왜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는지 모르겠다. 그 행동에 어떠한 계산이 숨겨져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가 건넨 가죽 주머니에는 금화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 * *
가브 일행은 이두 짐마차를 구하여 식량을 한가득 실었다. 마부는 헤딘이 자청하여 나머지 셋은 짐과 함께 마차 안에 들어갔다.
“크흐으응- 커허어엉-.”
이엘은 눕자마자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렘은 오랜만에 은신을 풀고 구석에서 각을 잡고 앉아 있었다.
가브는 갑옷을 벗으며 말했다.
“너도 편하게 좀 쉬어.”
“저는 이게 편합니다. 주무십시오.”
가브는 신기한 생물을 보듯이 렘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오른팔은 아직도 마기가 팔뚝까지 차올라 있다. 조금만 방심하면 금세 튀어나와 마나를 어지럽혔다.
집중하고 빠르게 돌려서 마기를 마나로 변환시켜야 한다.
후우우웅.
오른팔에서 마기를 끌어 단전에 있는 마나핵으로 옮긴다.
‘음?’
마기가 마나핵을 통과하며 마나로 변환되어야 하는데 핵이 오히려 검게 물든다. 그것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가 금세 온몸을 까맣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고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까만 장막이 세상을 감쌌다. 돌연 한 꺼풀 벗겨지며 새로운 장면이 펼쳐졌다.
오크, 거대한 몸에서 압도적인 마기를 뿜어내는 오크 로드가 보인다. 그의 눈동자는 오크 특유의 광기로 가득한 눈이 아니라 바다처럼 깊고 용암처럼 뜨거웠다.
오크 로드의 눈동자에 무너져 내린 왕궁이 비친다. 어린아이, 여인, 노인 할 것 없이 갈기갈기 찢긴 시체들이 나뒹굴고 피가 강물처럼 흐른다.
또각또각또각.
새하얀 로브에 높은 구두를 신은 여인이 깊은 어둠의 계단을 올라와 그와 마주 섰다. 오크 로드는 그녀에게 한쪽 무릎을 꿇고 입을 열었다.
-Θα σε πάω, στον βασιλιά. Ήταν η ώρα……. μαρμότα!
언젠가 들었던 괴상한 언어다. 여인은 도저히 사람이 낼 수 없는 이중적인 목소리로 외치며 뱀 문양 단검을 자신의 심장에 찔렀다.
그곳으로부터 검은 마기가 끝없이 하늘로 치솟는다. 그것은 넓게 퍼져 나가 왕궁을 덮으며 거대한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마법진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처럼 검게 변하더니 그곳에서 검붉은 손이 튀어나왔다.
그그그그그-.
손목밖에 보이지 않는데도 2층 건물만 한 그것은 등장만으로도 원초적인 공포로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때 돌연 장면이 빠르게 지나가며 검은 기운이 제국을 점점 뒤덮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판테르 대륙이 고통과 비명으로 가득 차고, 초원은 불바다가 되며, 땅은 온통 검고 끈적한 액체로 얼룩졌다.
-꺄야아아아!
-사, 사, 살려 줘!
-엄마! 엄마아!
죽음의 기운이 세상을 덮고, 모든 사람들은 죽어도 영혼이 벗어나지 못하는 구울이나 좀비가 되어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희망이라고는 한 톨도 느낄 수 없는 절망의 땅이다.
주르륵-.
가브는 코피를 줄줄 흘리며 눈을 떴다. 생애 처음으로 몇 년 치 환상을 한꺼번에 본 후유증으로 추측된다.
두 손을 먼저 살폈지만 누군가의 몸에 닿은 흔적은 없다. 매개체가 없는 환상, 어쩌면 자신에게 해당되는 환상일지 모른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껴 윗옷을 들춰 안을 보았다. 환상성이 붉게 점멸하고 있다. 그런데 그 위치가 예사롭지 않다. 다섯 번째, 여섯 번째를 건너뛰고 가장 마지막 자리의 환상성이 활성화된 것이었다.
이번 환상으로 명확히 알게 된 것은 하나다. 오크 로드는 왕을 영접하기 위해 왕궁으로 가는 것이었다.
“……크르릉, 커헝.”
가브는 요란하게 코를 골고 있는 이엘을 보았다가, 어느새 눈을 감고 있는 렘을 보았다.
이번 환상은 무려 세상의 멸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무시하고 이대로 갈 길을 갈 것인가, 마차 머리를 돌릴 것인가.
마음 같아서는 다 집어치우고 외딴섬에 들어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살고 싶지만, 지난 일들이 마음을 붙잡는다.
하필 지금까지의 환상성은 단 한 번도 해결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최근에 우연히 깨닫게 된 마나와, 화가 힘이 된 진 카난의 팔이 이번 환상성을 해결하기 위한 안배로 보일 지경이다.
‘젠장…….’
깊은 밤, 가브는 최대한 기척을 숨기고 조용히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몇 걸음 가지 않아 걸음을 멈췄다.
“뭐야?”
가브의 말에 어둠이 일렁이며 렘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는 주군의 그림자입니다.”
그에게 뭐라 말하려는데 잘 가던 마차가 멈춰 서고 마부석에서 헤딘이 뛰어내렸다. 마기 때문인지 감각이 기가 막히게 좋은 헤딘이었다.
마차가 멈춰 서니 이엘도 깨어나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후음, 무슨 일이에요?”
“스, 스승님, 소변? 대변? 마, 말을 하고 뛰어내려야지 노, 놀랐잖아요.”
가브는 그들을 한 명씩 보곤 입을 열었다.
“이엘, 헤딘, 렘, 먼저 크레아 왕국에 가 있어라. 나는 할 일이 남았다.”
이엘은 그가 홀로 복수의 길을 떠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차에서 나와 가브의 팔을 두 손으로 껴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이제 절대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같이 가요, 왕궁으로.”
렘은 다시 가브의 그림자에 스며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헤딘은 그답지 않게 가만히 가브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을 더듬는 것을 최소화하며 입을 열었다.
“나, 난 내가 어차피 죽은 몸이란 것을 알아요. 지, 지금은 두렵지만 언젠가 다시 눈을 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그때 스승님 옆이었으면 좋겠어요.”
헤딘은 이제 가식이나 빈말을 할 수 없다. 순수한 진심이라는 것이다. 가브는 그의 마음에 심장이 쥐어짜이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가브는 헤딘의 어깨를 단단히 쥐었다가 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 * *
세실리아 일행은 이윽고 제국의 왕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왕궁에 도착하였다. 그녀는 담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해괴하네.”
날씨도 이상하다. 달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하늘에 비가 잔잔하게 내리고 있는데, 소리 없는 천둥이 자꾸 내리친다.
먹구름은 유독 진하고 태풍처럼 느리게 돌고 있었다.
어찌 됐든 비가 온다면 기척을 숨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세실리아는 불길한 감을 지우고 손을 앞으로 휙휙 저었다.
그 뒤로 몸을 한껏 숙인, 키도 세실리아만 한 발튼과 억지로 따르는 에런이 따라갔다.
“음.”
세실리아의 고운 미간이 다시 좁혀졌다. 문지기들이 쓰러져 있다. 먼저 온 자들이 있는 것이다. 이 상황은 위기 혹은 기회다. 그녀는 후자를 믿기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왕궁의 지하 감옥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한 건물씩 모두 뒤져 봐야 한다.
맨 처음 나오는 곳부터 들어가려는데 에런이 옷자락을 잡았다.
“병영 근처로, 교대와 감시가 쉬운 곳에 만들었을 거야.”
밤까마귀에는 성의 설계도도 많이 들어온다. 에런은 기억을 더듬어 보편적으로 지하 감옥을 짓는 곳을 떠올린 것이다.
일리 있는 의견에 세실리아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병영으로 추측되는 건물을 먼저 찾아다녔다.
가장 눈에 띈 곳은 왕의 대전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커다란 병영이었다. 그곳에는 검은 배경에 붉은 초승달이 그려져 있는 깃발 두 개가 꽂혀 있었다.
꿀꺽.
제국 최고의 기사단 붉은달 기사단의 병영이다. 그들 하나하나가 권력자이니만큼 병영에 머무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희망하며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사박사박, 척.
세실리아는 무언가 이질적인 기운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머리 위 병영 2층 창문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그가 입을 쩍 벌리고 있다. 곧 소리칠 기세다. 세실리아는 쥐고 있던 마비 독침을 그에게 날렸다.
팅.
사내, 붉은달 기사단원은 손쉽게 독침을 쳐 내고는 소리쳤다.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