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107
107화
함락 위기였던 카르마성 북문은 제국 제일검 디마 후작의 합류로 수성에 성공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던 마물 군단의 진격은 중지되었고, 치명상을 입은 오크 로드는 군단을 이끌고 바르자카 요새로 후퇴하여 제국군과 대치했다.
같은 날에 왕궁에서 일어난 일도 크게 회자되었다. 가브 일행의 습격으로 궁정 마법사 아민과 붉은달 기사단의 죽음은 왕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로 인해 북문 방어전에 나타나지 않은 붉은달 기사단을 향한 비방은 조금 사그라들었고, 뒤늦게 나타난 디마 후작은 오히려 왕과 국민 모두를 지켜 낸 영웅이라 칭송했다.
가브와 세실리아, 발튼은 목격자에 의해 수배지까지 그려져 제국 전체에 수배되었다.
붉은달 기사단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여 수많은 국민을 죽게 하고, 기사단원들을 죽여 제국의 국력을 깎아먹고 왕까지 시해하려 했다는 어마어마한 죄목이었다.
카르마성의 대전, 왕좌가 놓인 단상에 한 젊은 사내가 은발을 찰랑이며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다.
단상 아래에는 진녹색 피를 한껏 뒤집어쓴 디마 후작이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전하, 부르셨습니까?”
“……사라졌어, 사라졌어. 감쪽같이 사라졌어. 어, 어, 디마 경! 기사단이 전부 죽은 건 아니지요? 예?”
은발의 사내, 제국의 왕 론 아슈는 이제 막 스물셋밖에 되지 않는 젊은 왕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궁정 마법사 아민을 스승으로 삼고 여러 가지를 배우며 자연스럽게 완벽히 세뇌가 되었다.
디마처럼 피를 마시고 착각하도록 강제 세뇌를 당한 것이 아니기에 술사인 아민이 죽었어도 그는 마모트 광신도였다.
디마는 왕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가 무겁게 대답했다.
“지방에 내려갔던 서른두 명이 남아 있습니다.”
“좋소! 그들을 데리고 어서 왕궁을 습격했던 그 도적들을 잡아 오시오! 어서!”
“……전하, 오크 로드가 이끄는 마물 군단이 코앞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지러운 정세를 살피고…….”
“그놈들이 힐을 납치했다고!”
버럭 소리치는 왕의 말에 디마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 * *
하루 전, 가브는 일행과 함께 카르마 남문을 나서는 순간 가슴이 찌릿한 것을 느꼈다. 그는 튀어 보이는 테라갑옷을 벗고 천옷에 가죽코트를 입은 상태였다.
‘음…….’
옷을 당겨 가슴을 보니 일곱 번째 환상성의 점멸이 멈춰 있다.
해결이 되면 완전히 불로 지진 듯한 흉터가 남아 있어야 하는데 점멸만 멈추고 흐릿한 빛을 가만히 품고 있었다.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현상이었다.
교주를 죽였을 때는 그대로였는데 이 여인을 데리고 카르마성에서 나왔다는 것으로 무언가 신호를 준 것이 분명하다. 완벽하게 해결은 되지 않아 그에게 찝찝함을 안겼다.
‘역시 태워 버려야 하나…….’
여인을 죽여야 하는 이유는 환상에서 보았던 장면 하나, 짧지만 명확하고 강렬했다. 그러나 이렇게 공격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의식도 없는 여인을 산 채로 태워 죽이기에는 도덕적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가브는 자신도 모르게 여인을 죽이지 않아도 되는 근거를 찾고 있었다. 접촉을 하면 헤딘이나 카로스와는 전혀 다른 정순한 마기가 느껴지기는 하지만, 환상에서 보았던 그 강대한 마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양이다.
환상에서는 교주가 보이지 않았으니, 오크 로드가 오기 전에 교주가 이 여인에게 치러야 할 어떤 의식을 끊어서 어떤 변화가 오지 않은 것인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환상성도 여인을 데리고 카르마에서 나오자 점멸이 멈추고 한풀 꺾인 듯하니 현재로서는 그게 가장 유력했다.
드르르륵.
히이이잉.
고민하고 있자니 다음 도시가 나왔다. 많은 일이 있었던 번화한 도시 알레트였다.
워낙 존재감이 없어서 식량을 나누는 것도 깜빡하는 렘까지 포함하여 사내 넷, 그리고 아직도 의식이 없는 은발 여인까지 여인도 네 명이다.
이두 짐마차로는 여덟 명을 감당할 수 없어 도시에서 마차를 하나 더 구하기로 했다.
“잠깐.”
조금 더 가까이 가니 성문에서 병사들이 검문검색을 하고 있었다. 손에 양피지까지 들고 행인들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을 보고 가브의 얼굴이 굳었다.
병사들이 가지고 있는 수배지에는 가브와 세실리아, 발튼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가브는 바로 말머리를 돌렸다.
“일행을 나눠야겠다.”
“전 싫어요.”
“저, 저도 또 떨어지기 싫어요. 차, 차라리 저 병사들을 다 죽일게요.”
가브는 헤딘의 어깨를 붙잡고 타일렀다.
“이 정도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건 안 돼, 팔다리 정도면 몰라도…….”
“아, 여, 역시 스승님.”
나뉠 일행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수배지가 만들어진 가브와 세실리아, 발튼, 그리고 은발 여인이 짐마차를 끌기로 했고, 여러 경험이 많은 에런을 중심으로 이엘과 헤딘, 렘이 마차와 생필품을 구하여 남문 밖 숲에서 만나기로 했다.
헤딘과 렘 정도의 실력이면 붉은달 기사단도 초토화되었으니 인간에게 위험할 일은 희박했다.
“남문에서 보지.”
“훔…… 수도원의 보육 선생님이 된 기분이군.”
에런은 자신의 뒤를 따르는 헤딘과 이엘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도 나이지만 한 뼘 가까이 되는 에런과 이엘의 키 차이도 한몫했다.
에런 일행을 보낸 뒤, 가브는 세실리아에게 마부석을 권했다.
“뎌도 마브턱에-.”
“넌 들어와.”
“네…….”
가브는 발튼과 마주 앉고 그 옆에 꽁꽁 묶은 은발 여인을 눕혔다.
“이 여자가 조금이라도 수상한 짓을 하면 제압해라.”
“에? 에 알게뜹니다.”
발튼은 잠을 청하려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가브가 발튼의 얼굴에 손대고 눈을 감았다.
“어, 업!”
“받아들여.”
발튼은 갑자기 자신의 몸 안의 무언가가 마음대로 움직이는 느낌에 화들짝 놀랐지만, 금세 믿고 따랐다.
혀를 포함하여 이미 잘려 나간 신체 부위는 대략 하루 뒤면 붙일 수가 없게 된다. 그것도 보관이 잘되었을 경우지 부패가 심하면 불가능하다.
진 카난의 오른팔처럼 남의 것을 붙일 수도 없다. 마나를 직접 다루는 당사자만 가능한 듯 보였다.
인고의 시간이 흐르고, 가브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발튼은 그제야 움직여도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쩍 벌리고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어, 오! 아 나파요! 이게 어떠케 된…… 오!”
발튼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계속 통증이 있었던 것이다.
발튼의 혓바닥은 절단면이 지저분했다. 가브는 그것을 조금 더 앞으로 잡아당기고 끝부분을 부드럽게 재구성했다.
“시간이 지나면 발음도 많이 나아질 거다.”
“감, 감싸함니다, 쥬군!”
가브는 그의 인사를 온전히 받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지만 모든 것이 자신의 탓으로 여겨졌다.
이동하면서 발튼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들었다. 그는 셀의 도움으로 세실리아와 함께 협회 본부를 빠져나갔지만, 셀이 나오는 것은 보지 못했다.
가브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한 번 더 들었지만 셀의 죽음이 믿기지 않았다. 쫓기는 상황만 아니라면 제국 전체를 뒤져서라도 셀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알레트 남문에서 2킬로미터쯤 떨어진 숲 입구, 가브는 아름드리나무 옆에 마차를 세우고 에런 일행을 기다렸다.
“애 이렇게 안 오지?”
“오크, 가만히 있어. 정신 사나워.”
나무에 발을 대고 거꾸로 엎드려 있던 발튼은 잠시 멈칫했다가 세실리아에게 고개만 돌린 채 계속해서 팔굽혀펴기를 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반항이냐?”
그때였다. 마차 안에서 아주 작고 가녀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가 있나요?”
가브는 벌떡 일어나 검을 뽑으며 세실리아를 뒤로 밀쳤다.
“떨어져!”
가브는 한 손으로 검을 짐칸에 겨누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안에는 은발 여인이 망토에 꽁꽁 묶인 채 상체만 일으켜 눈을 뜨고 있었다.
여인은 눈을 감고 있을 때도 일행이 공통적으로 마치 다른 종족처럼 느껴질 정도로 신비로운 분위기와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뜨고 정면을 응시하자 그 특유의 신비로운 분위기가 더욱 증폭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눈동자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하얀색이었다. 흰자와 구분은 되지만 은색보다는 하얀색에 더 잘 어울렸다.
가브는 한쪽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지만 그녀의 초점이 미세하게 어긋나 있었다.
‘맹인?’
맹인이라기엔 눈동자의 외곽선이 선명하고 맑다. 가브는 한 발자국 다가가 검 끝을 그녀의 목에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자 그녀가 고저 없이 평온한 얼굴로 입술을 열었다.
“금속…… 검이군요. 절 죽이실 건가요?”
“넌…… 누구냐?”
가브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의 고개가 살짝 돌아갔다. 가브가 있는 곳을 그제야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누구냐면…… 저는, 힐이에요. 나이는…… 잘 모르겠어요.”
그녀의 말에 가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빛나는 은발에 힐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은 자연스럽게 제국의 비극을 떠올리게 했다.
‘힐 아슈.’
현재 제국을 통치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왕, 론 아슈의 여동생이었다.
힐 아슈는 열 살이 되던 해에 실종되어 그녀를 끔찍이 아끼던 전대 왕 헤롯 아슈가 제국에 피바람을 일으키고 끝내 미쳐 버린 비극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외관상 나이, 왕족을 나타내는 빛나는 은발, 이름, 그녀를 발견했던 위치. 모든 것이 딱 들어맞는다.
꼬르륵.
가브 혼자서 심각해하고 있을 때, 귓가를 어지럽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힐 아슈는 살짝 고운 미간을 좁히며, 얇고 높아서 유독 가녀린 느낌이 드는 특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지금 당장 죽이실 게 아니라면…… 먹을 것 좀 주실래요?”
가브는 직접 호밀빵을 떼어 그녀의 코앞에 갖다 대고 협박하며 아는 것들을 최대한 끄집어내도록 유도했다. 절실할 때에 손가락 한마디만큼 주어 더욱 참을 수 없게 만드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제발 한입만 더 주세요.”
“하던 말을 먼저 들어 보지. 그래서 궁정 마법사가 어떻게 했나?”
세실리아는 뒤에서 그 모습을 비장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주군은 감히 나 따위는 비교할 수 없이 잔인하시구나.’
세실리아가 감탄하고 있을 때, 멀리서 마차 한 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마부석에는 헤딘과 이엘이 타고 있었다.
“세실리아 씨!”
이엘은 마차가 완전히 멈춰 서지 않았는데도 겁도 없이 뛰어내려 세실리아에게 안겼다.
“으으음청 보고 싶었어요!”
같이 지낸 지는 1년도 되지 않는데 이렇게 자신을 좋아하고 의지한다는 것에 묘한 감정이 드는 세실리아였다.
렘은 가브 앞에만 잠깐 나타나 묵례를 하고는 다시 이엘의 그림자로 사라졌다.
헤딘은 마차를 세우자마자 가브에게 다가가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스, 스승님. 가슴, 가슴 큰 누님이 쓰, 쓸데없는 것들을 이따만큼 사느라고 느, 늦었습니다.”
“얘는 뭘 그렇게 다 일러바쳐?”
또각또각.
에런은 고위 귀족의 부인처럼 우아하게 마차에서 내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쓸데없는 거 아니거든? 하나하나 다 필요한…… 응? 일어났네?”
에런의 말에 헤딘과 이엘의 고개가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