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113
113화
초대 태제 카로스가 피와 땀으로 일구었던 사해는, 셀이 제국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과 함께 공중분해가 되었다.
가브와 발튼, 세실리아는 제국의 공적이 되어 전 대륙에 수배지가 배포되었다. 죄목은 공주 납치라고만 명시되어 있었다.
붉은달 기사단 수십 명을 처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잡으려는 사람이 줄어들어 소재 파악도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여 넣지 않은 것이다.
가브는 1만, 발튼과 세실리아에게는 2천, 힐 아슈에게는 안전하게 제국으로 데려오면 2만 골드라는 어마어마한 현상금이 걸렸다.
그뿐만 아니라 가브가 사해의 해수였다는 과거와 사해 본단이 크레아 왕국에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로 인해 제국은 크레아 왕국으로 왔을 가능성을 높이 보고 왕국에 직접 협조 요청을 보내왔다.
겁이 많은 크레아의 왕은 제국 눈치를 보느라 모든 귀족과 병사를 닦달하며 가브 일당을 찾았다. 가브의 움직임은 그 와중에 노출된 것이다.
렘은 저택 문지기들로 인해 노출된 걸로 추측했다.
“죄송합니다. 확실히 처리했어야 했는데…….”
“아니다. 나를 본 것이 죽을 이유는 아니지.”
가브의 발언에 렘은 흠칫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가 시선을 내렸다.
금세 나갈 준비가 되자 해수가 앞으로 나섰다.
“다른 동료들도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국경을 벗어날 때까지만이라도…… 목숨을 걸고 돕겠습니다.”
가브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고생하는군.”
낯선 그의 말에 해수는 눈을 들었다가 내렸다.
“당연한 일입니다.”
해수는 앞장서서 뒷문으로 나갔고, 가브 일행은 바짝 그 뒤를 쫓았다.
인원이 여덟 명이나 되기에 전처럼 나눠서 이동했다. 자칫하다 에런과 헤딘, 이엘과 렘도 수배되면 더욱 움직이기 곤란해진다.
사막 너머 크레아 왕국까지 이렇게 빨리 수배지가 배포되었다면, 다른 왕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야 할 곳은 이미 정해져 있다.
가브는 에런 일행과 헤어지기 전에 당부했다.
“목적지는 히스. 목숨을 최우선시하도록.”
“저, 저는 어차피 한번 죽…… 읍.”
에런은 헤딘의 입을 막으며 가브에게 말했다.
“제일 위험한 길을 가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네요. 거기서 봬요.”
가브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 * *
가브 일행은 그늘을 따라 마을 변두리에 있는 민가까지 이동했다. 그곳에는 드물게 여성 해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님, 인사드리겠습니다. 리온느입니다.”
연두색의 깔끔한 단발머리에 가늘고 긴 눈을 가진 그녀는 가브보다 세실리아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세실리아는 여성 해수 중에 유일한 1급으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리온느는 차가운 인상과는 달리 새끼 오리처럼 세실리아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이곳에는 변장할 수 있는 도구들을 최대한 많이 구비해 놓았습니다.”
“변장…… 잘됐네.”
세실리아가 수긍하자 리온느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생각했던 것들을 추천했다.
“눈에 띄지 않는 복장으로 준비했습니다.”
세실리아는 그녀가 준비한 옷을 보고 살짝 미간을 좁혔다.
“연회용 드레스에…… 하녀복?”
불편한 반응에 리온느가 눈을 내리깔며 시무룩해했다. 세실리아는 고개를 기우뚱거리며 그녀를 보다가 바로 옆에 있는 힐 아슈를 끌고 왔다.
“생각해 볼 테니, 먼저 이 머리부터 어떻게 해 보지.”
“예, 선배님.”
“예쁜 색으로 해 주세요.”
힐 아슈의 은빛 머리칼은 희한하게도 염색이 잘 먹히지 않았다. 검은 염료를 잔뜩 뿌려서 전보다 어두운 은색으로 만드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것도 한번 비를 맞으면 전부 물이 빠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힐은 마치 보이는 것처럼 자신의 옷을 직접 골랐다.
“이거 입을래요. 냄새도 좋고, 촉감도 좋아요.”
귀족의 외출용 원피스다. 세실리아는 그 옷과 이어지는 무언가를 떠올리며 그녀를 말렸다.
“너무 튀어.”
세실리아가 옷을 가져가려고 하자, 힐은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강하게 잡은 채 드물게 미소를 지으며 고집스럽게 말했다.
“저는, 이 옷이 좋아요.”
세실리아는 그녀의 힘에 살짝 놀랐다가 가브의 눈치를 한번 살피고는 손을 놓았다.
“정말,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선배님.”
어쩔 수 없이 힐 아슈는 귀족 원피스를 입었고, 세실리아는 그녀를 보좌하는 역할로 하녀복을 입게 되었다.
옷을 준비한 리온느의 차가운 얼굴에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가브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흑탄을 여기저기 묻혀 얼굴색을 더욱 검게 하였다. 발튼도 동일하게 했지만 그 큰 덩치 때문에 유톡 튀어 변장이 쉽지 않았다.
준비가 끝나자 길잡이 해수가 말했다.
“저는 먼저 나가서 리펠리오 성당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부디, 조심히 오십시오.”
다른 해수의 도움으로 리펠리오 성당에 마차를 준비할 수 있다고 한다.
가브는 그를 보내고 변장을 끝낸 세실리아와 힐을 보았다. 여전한 외모 때문에 조금 튀기는 하지만 수배지에 있는 여인들이라고는 떠올리기 힘들었다.
그는 힐을 보며 골똘히 고민하다가 세실리아에게 눈을 돌렸다.
“둘은 따로 와라. 너무 멀리 떨어지진 말고.”
“예, 주군.”
가브는 대답한 세실리아가 아닌 힐에게 얼굴을 가까이 하여 협박하듯이 강조했다.
“절대, 멀리 떨어지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발튼과 함께 민가를 나섰다. 남아 있던 세실리아는 호위병 복장을 이제 막 다 차려입은 리온느를 보며 물었다.
“너는 왜?”
“귀족이 외출하는데 호위병이 없으면 의심을 살 겁니다.”
의심은 사지 않겠지만 똥파리가 끼어들 것이다. 세실리아는 외인이 일정치 이상의 위험을 감수하며 돕는 것이 탐탁치 않았다.
세실리아의 눈빛이 마치 다른 사람처럼 금세 싸늘하게 변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차가운 말에 약간 상기되었던 리온느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세실리아는 그녀가 알아들었다 싶어 힐 아슈를 데리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무거운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선배님이, 선배님이 제 목숨을 구해 주셨습니다, 두 번.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알아. 그때와 지금은 별개다. 따라오지 마.”
하녀복을 곱게 차려입고 박력 있게 말하는 모습이 묘했다.
세실리아는 그 말을 끝으로 힐을 데리고 재빨리 민가를 나섰고, 리온느는 고개를 힘없이 떨구며 홀로 그곳에 남았다.
* * *
어두운 골목길, 두 사내가 숨을 헐떡이며 누군가의 뒤를 쫓고 있다.
“헉, 헉.”
“찢어졌다! 나는 덩치를 따라갈게!”
“어!”
동료와 헤어진 사내는 재빨리 골목 어귀로 들어섰다. 그 순간 검은 손이 튀어나와 앞에 있는 사내의 얼굴을 움켜잡고 나무 벽에 박았다.
콰직! 쯔즈즈.
나무 벽이 얼굴 모양으로 파였다. 얼굴을 떼어 내니 나무 조각에 살점이 몇 조각 붙어 있다.
쾅!
검은 손의 주인, 가브는 한 번 더 그곳에 사내의 얼굴을 박았다. 가시가 관자놀이를 뚫고 들어가 눈알로 튀어나왔다.
투둑-.
그 뒤로 무언가가 지붕에서 떨어졌다. 목이 반대로 돌아간 사내의 동료 시체였다.
“더 보이디는 않뜹니다.”
“가자.”
가브는 눈가에 맴도는 살기를 지우며 리펠리오 성당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애초에 가장 잘 알려진 가브와 변장이 불가능한 발튼의 조합은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수배지에 걸린 가브 일당을 찾는 이들은 크레아 왕국의 병사들만이 아니었다. 한때 사해 아래에 있던 협회의 사냥꾼들이 더욱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 것이었다.
이들은 사해 사건 이후로 협회에 들어온 신입 사냥꾼들로 사전에 정보를 모을 생각도 하지 않고 발견하자마자 따라왔다.
가브는 몇 년 전의 사해와의 추격전을 떠올리며 검게 바뀐 주먹을 꽉 쥐었다.
터덕-.
골목길을 나온 가브는 발을 급히 멈춰 세웠다. 리펠리오 성당까지 1킬로미터도 남지 않았다.
“귀찮게 됐군.”
하필 한창 수색 중인 병사들 스무 명과 마주쳤다. 그들은 체인갑옷과 창으로 잘 무장되어 있었다.
수비대장은 가브와 발튼의 얼굴을 확인하고 화들짝 놀라며 창을 앞으로 들이댔다.
“공주 납치범들이다!”
처적, 척척척!
순식간에 날카로운 창 수십 개가 가브와 발튼에게 향해졌다. 하지만 아무도 먼저 앞으로 나오며 창을 뻗지는 못했다.
가브는 그들을 여유롭게 둘러보고는 천천히 등에 멘 바레스 중검을 뽑아 바닥에 길게 늘어트렸다.
“영주의 명령이 목숨보다 중요하다면 덤벼라. 그렇지 않다면 창을 내려라.”
몇 개의 창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적을 눈앞에 두고 서로 눈을 마주하며 눈치를 본다. 하지만 아무도 내리는 이는 없었다.
가브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수비대장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크게 흔들리던 수비대장은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창을 뻗으며 외쳤다.
“쳐라!”
그가 창을 뻗기도 전에 가브는 몸을 조금 낮추고 검 끝으로 바닥을 긁으며 아래에서 위로 중검을 크게 휘둘렀다.
그그그극, 촤라락!
그러자 가브에게 들이밀려 있던 스무 개의 창대가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가브는 공중에 떠오른 잘린 창대 하나를 오른손으로 쳐 냈다.
콱, 퍽!
그것은 쏜살처럼 날아가 수비대장의 오른쪽 눈을 꿰뚫고 뒤통수로 튀어나왔다.
투두둑, 툭툭.
그 뒤로 잘린 창끝이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창끝이 모두 잘리고 수비대장이 쓰러지는 것이 워낙 순식간이어서, 따라서 창을 뻗으려던 병사들은 다시 멈칫했다.
“마지막 기회다.”
나지막이 속삭인 가브의 말을 듣지 못한 병사들은 없었다. 그는 스무 명의 병사들 앞에서 검을 집어넣고 걸음을 옮겼다. 발튼은 놓칠세라 그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쥬군! 멋디심니다!”
“조용히 해.”
* * *
같은 시각, 세실리아는 멀리서 가브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는 힐 아슈는 귀를 쫑긋하며 물었다.
“걱정 중이네요?”
세실리아는 흠칫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럴 리가.”
그러곤 허리를 곧게 펴고 도도하게 큰길로 걸음을 옮겼다. 힐은 재빨리 그녀의 발소리를 따라가 손을 몇 번 휘적거려 팔짱을 끼었다.
가브와 수비대가 맞붙었던 곳을 기준으로 주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 명이 죽어 나간 만큼 괜히 근처에 있다가 피해를 당할까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그렇게 한적한 길을 걷고 있는데 코트를 말끔하게 차려입은 한 중년인이 힐과 세실리아에게 다가왔다.
“이런, 맹인이신가? 이렇게 아리따운 분이…… 쯧쯧.”
갑작스레 길을 막아서며 무례한 동정심을 내보이는 중년인의 모습에 세실리아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힐은 특유의 평온한 미소를 머금으며 조곤조곤 말을 내뱉었다.
“네, 맞아요. 맹인이 아리따우면 더 안타깝나요?”
“그럼, 아깝잖아. 그 미모면 이 남자 저 남자 마음껏 타고 다녔을 텐데. 뭐, 맹인인 건 크게 상관없나?”
“그렇군요. 남자를 타고 다닐 수 있군요. 그럼 제가 앞의 남자분도 탈 수 있나요?”
그녀의 맹랑한 발언에 중년인은 물론 세실리아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의 눈빛은 금세 탐욕스럽게 변하며 힐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그럼 얼마든지. 지금 바로 갈까?”
세실리아가 말리려는 순간, 힐 아슈가 구두로 중년인의 정강이를 찼다.
빡-.
“아악! 뭐 하는 짓이야!”
“아, 올라타려고 했는데. 아직 엎드리고 있지 않았나요?”
일부러 그런 것인지 엉뚱한 것인지, 세실리아는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꾹 눌렀다.
그때 몇 걸음 뒤에 떨어져 있던 사내 둘이 다급히 달려와 중년인을 부축했다. 나름대로 귀족이거나 부호인 듯했다.
그는 인상을 확 찌푸리며 힐에게 손가락질했다.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런 장난질을 해? 야! 저년을 끌고 저택으로 데려가! 제대로 혼쭐을 내 줘야겠어!”
“예! 나리!”
턱.
중년인의 종자들이 힐의 어깨를 잡으려고 할 때, 세실리아가 그 손목을 잡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