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115
115화
산 중턱, 우거진 숲속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넓은 공터가 눈에 들어온다.
그곳에 백여 명의 사내가 마차를 둘러싸고 화살을 쏘고 있다.
가브는 바레스 중검을 뽑으며 지금 막 쓰러지고 있는 해수의 뒤로 바짝 붙었다.
테라 내갑에 경갑까지 갖춰 입은 발튼이니 화살 따위에 죽지는 않을 것이다, 아프긴 해도.
쾅!
이히이잉!
발튼은 마차 천장을 한 손으로 잡고 마차바퀴를 마치 다리를 걸듯이 차 확 뒤집어 방패로 삼았다. 말들도 덩달아 넘어지며 오히려 허리 높이 위로 날아오는 화살을 피했다.
그사이 가브가 해수의 시체를 들고 접근에 성공했다. 가브는 자신에게 다시 활을 겨누는 사냥꾼들에게 시체를 내던지며 검을 넓게 휘둘렀다.
콰광, 콰직!
세 명이 검에 휩쓸린다. 그들은 이미 알고 검이나 방패를 들고 막았음에도 그 무지막지한 힘에 날아가 엎어졌다.
옆에서 십여 발의 화살이 가브의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왔다. 가브는 가까이 있는 사내의 멱살을 잡아 그쪽으로 던지고 넘어진 자들의 머리를 단번에 잘랐다.
가브의 모습은 마치 양 떼에 뛰어든 범을 연상케 했다. 가브의 전투를 처음 본 사냥꾼들은 물론 해수들도 기겁하며 몸을 물렸다.
“창, 창으로 찔러! 접근하지 못하게 해!”
일인을 상대로 다수가 두려워 뒷걸음질을 치며 서로 뭉쳤다. 대열에 마저 끼지 못한 자들은 어김없이 가브의 먹잇감이 되어 찢겼다.
어느새 열댓 명이 한 무리가 되어 창을 들고 가브를 견제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것이 세 무리다.
가브는 아직 전열이 제대로 완성되지 않은 무리에게 과감하게 중검을 던졌다.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날아간 중검은 두 명의 옆구리를 잘라 내고 그 뒤에 있는 사내의 배에 꽂혔다.
맨손이 된 가브는 두 손에 시체를 하나씩 들고 그들에게 던지며 덤벼들었다.
푸북, 푹!
그대로 얻어맞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 그들이 창으로 시체를 막아 내는 사이, 깊숙이 파고든 가브는 한 사내의 배에 꽂힌 중검을 뽑으며 그곳을 휘저었다.
“크하악!”
다른 무리도 한가롭게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히이잉!
한 마리의 말이 호선을 그리며 날아와 사람들을 덮친다.
“으어억!”
“대체 무슨 힘이 저렇게……!”
서너 명을 깔아뭉갠 말은 생전 처음 겪는 상황에 미친 듯이 발작했다. 그러자 그 주변도 앞발, 뒷발에 맞는 부상자가 속출했다.
“흐으아압!”
아수라장이 된 곳으로 발튼이 마차 바퀴를 들고 인간 마차처럼 돌진했다. 그에게 부딪친 사람들은 수 미터나 튕겨 나갔다.
그러면 그들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어김없이 가브가 나타나 목숨을 거두었다.
쉭.
정신없이 전장을 헤집고 있는 중에 빈틈을 노리고 날카로운 공격이 들어온다. 몇 명 되지 않는 해수다.
터덕-.
관자놀이 한 치 앞으로 송곳이 다가왔을 때, 가브가 한 손으로 그것을 잡고 오른손으로 해수의 목을 틀어쥐었다.
몇 번 보지는 않았지만 낯익은 얼굴, 적어도 4년 이상 있었던 해수다.
“카로스가 키웠으니 충성심은 바라지 않았는데, 상대를 잘못 골랐어.”
끄드득!
가브는 그의 목뼈를 잡아 뜯었다. 해수의 표정은 죽기 전까지 공허함 그대로였다.
시키는 대로 사람을 죽이는 것 외에는 생각도 하지 않도록 키워진 해수가, 머리를 잃으니 갈 곳을 잃은 것이다.
또다시 죄책감이 가브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로 인해 잘못된 선택을 한 해수들에게 자비를 베풀 순 없다. 고통 없이 보내 줄 뿐.
“이건 아니야. 아니지! 젠장!”
가브와 발튼의 압도적인 무위에 사람들은 슬슬 두려움이 올라오며 현실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밀리는 전투에 이탈자가 생겼다.
그리고 이탈자들은.
푹-.
꼬치 꿰이듯이 콧구멍부터 정수리까지 세검으로 꿰였다.
때맞춰 도착한 세실리아는 힐 아슈에게 당부했다.
“안에서 나오지 마. 죽은 척하고 있어.”
힐은 이해했다는 듯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동공이 고정된 채 눈을 깜빡이지 않고 있으니 정말 시체로 착각하기 쉬웠다.
세실리아는 마차 문을 닫고 먼저 달려가며 이탈자들을 베고 있는 리온느의 뒤를 쫓았다.
* * *
땅거미가 질 무렵, 산 중턱에는 피비린내가 진하게 풍기고 수십 구의 시체가 신체 부위를 잃은 채 널브러져 있었다.
푹, 으드득, 퍼석.
가브와 발튼은 검을 들고 돌아다니며 시체를 찔렀다. 산에 불을 피울 순 없으니 하나씩 목을 자르고 심장을 파내는 것이다.
구울이 되어도 뇌는 사지에 명령하고 심장은 움직이는 원동력이 된다.
그래서 머리를 자르면 위험도는 낮아지나 움직임이 아예 멈추는 것이 아니다. 정처 없이 움직여 눈먼 칼에 베일 수 있으니 심장을 뽑아 터트려야 한다.
세실리아와 리온느는 시체를 뒤져 경비가 될 만한 물품을 모으고 있었고, 힐 아슈는 짐마차에 앉아 발을 휘적거리고 있었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그때 저 멀리서 마차 두 대가 다가오다가 멈춰 섰다. 지붕 없는 마차에 가득 실린 물품을 보니 행상인인 듯싶었다.
수염이 덥수룩한 마부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처럼 공포에 질린 얼굴로 온몸이 경직되어 있다.
그때 짐칸에서 녹색 머리가 툭 튀어나왔다.
“어어!”
헤딘이었다. 그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가브에게 달려왔다. 마기로 움직여서 그런지 뛰는 폼이 영 어색했다.
“스, 스승님! 스승님이다!”
그의 외침에 에런과 이엘, 은신을 하지 않은 렘도 쏙쏙 튀어나왔다.
“와우, 한판 시원하게 하셨네요.”
“또 한참 후에야 만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만나서 너무 좋아요!”
이엘은 세실리아의 품에 안겨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덕분에 하얀 얼굴에 피가 잔뜩 묻어 괴기스러운 모양새가 되었다.
렘은 말없이 가브에게 묵례를 한번 하고는 단검을 꺼내어 그들이 하던 작업을 알아서 하기 시작했다.
헤딘은 많이 반가운지 가브에게 붙어 종알거렸다.
“오, 오랜만에 사람들을 마, 많이 만났어요. 친절해요. 가, 가슴 큰 에런 누님이나 키 작은 이엘 누님이 태, 태워 달라고 하면 엉뚱한 데로 데려가는데, 레, 렘 형님이 말하면 착해졌어요. 처, 처음 알았어요. 세상은 미녀보다 미남에게 치, 친절해요.”
“그랬구나.”
가브는 그의 말에 대충 호응해 주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마부에게 다가갔다. 옷차림을 보니 행상의 주인인 듯했다.
“수고했소. 이제 가시오.”
가브는 그에게 피 묻은 금화 몇 개를 쥐여 주었다. 그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았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
행상인은 가브가 뒤돌아서 걸음을 옮기자 그제야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고삐를 잡았다. 그때 가브가 다시 그를 불렀다.
“여기선.”
“예, 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소.”
가브의 눈빛에 찰나 살기가 스쳤다. 행상인은 소변을 찔끔 지리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요! 맞습니다! 저, 절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죠! 네!”
행상인은 마차를 끌고 자리를 떴다. 가브가 길을 터줬는데도 마차를 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 * *
이제 리온느까지 포함하여 인원은 아홉. 그러나 말도 마차도 없어서 꼼짝없이 도보로 이 산을 벗어나야 했다.
다행히 죽은 사람들의 품에서 200골드가 넘는 돈이 발견되어 마을이 나오면 마차를 구할 생각이었다.
세실리아는 전장의 잔해들만 보고 상황을 유추하여 발튼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무식아, 마차를 쓸데없이 왜 부숴? 불쌍한 말은 또 왜 던지고?”
“욱, 미, 미안.”
퍽!
그녀는 발꿈치를 들며 발튼의 머리통에 꿀밤을 쥐어박고는 다리가 아프다고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발튼에게나 꿀밤이지 일반인이 맞았으면 머리가 함몰될 강도였다.
산을 내려가니 백 가구가 넘지 않는 조그마한 마을이 나왔다.
“오늘은 여기서 머물지.”
아직 깊은 밤이 아니기에 마을 사람들이 길거리에 몇 명 나와 있었다.
그들은 여인이나 소년은 경계하지 않았지만 종종 인상이 험상궂게 변하는 가브와 위협적인 덩치의 발튼은 심히 경계했다.
마을의 규모가 작아서인지 여관은 하나밖에 없었다.
“어서 오시오~.”
여관 주인은 갑작스러운 미인들의 대거 등장에 눈을 휘둥그레 뜨다가 가브와 발튼을 보고는 내리깔았다.
“방 두 개, 데운 물은 한 방에만.”
가브의 주문에 힐 아슈가 천진하게 말했다.
“시체에서 돈 많이 얻었잖아요. 데운 물, 우리 방도 줘요.”
뇌가 혓바닥에 달린 것처럼 생각나는 대로 뱉는 사람이 헤딘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말에 방 키를 넘기던 여관 주인의 손이 덜덜 떨렸다.
“니네 방 거야.”
“아, 그러면 좋아요.”
“스, 스승님, 왜 이렇게 도, 돈을 아껴요. 스, 승님 쪼, 쪼잔…… 웁.”
발튼이 다급히 헤딘의 입을 막았다. 가브는 키를 들고 앞장서서 올라가며 작게 말했다.
“아껴야 산다, 아껴야.”
촤아아악!
깨끗한 물을 가득 담은 욕조에 가브가 몸을 담그자 물이 넘쳐흘렀다. 왕궁에 갈 때부터 제대로 씻지 못했으니 적어도 한 달은 넘었다.
묵은 흙먼지와 피딱지가 몸에 들러붙어 잘 떼어지지 않는다. 가브는 그것을 손톱으로 긁어내며 소탈한 쾌감을 느꼈다.
머리끝까지 차가운 물에 담그자 순간 잡념이 사라졌다. 무의식적으로 오늘 보았던 해수들의 공허한 눈이 떠올랐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골드를 탐하여 자신을 노린 것이 아니다. 그저 텅 빈 속을 채울 일을 찾아 나선 것이다.
‘셀…… 너를 볼 면목이 없구나.’
셀이 있었다면, 그가 조금 더 오래 태제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 텐데.
아쉬움과 죄책감에 가슴이 아려 왔다.
쿵, 쿵, 쿵!
상념에 젖은 지 수십 분이 지나자 누군가 참지 못하고 문을 두드렸다.
“스, 스승님! 이, 이럴 거면 방을 하나 더 비, 빌리셨어야죠!”
가브는 그제야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 * *
수개월 전.
철썩! 쏴아아아……. 철썩! 쏴아아…….
거대한 칼로 깎아내린 듯한 절벽이 돋보이는 해변가.
검은 옷을 입은 한 남자가 부드러운 모랫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그의 오른손에는 부러진 송곳의 손잡이가 들려 있었다.
그 옆에는 어깨에 낚싯대를 걸친 아이 둘이 나란히 쪼그려 앉아 있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한 아이가 낚싯대 끝으로 남자의 볼을 찔렀다.
쿡쿡.
“움직여?”
“안 움직여.”
“죽었어?”
“죽었나 봐.”
“그런 데 말고 눈 같은 데를 찔러 봐야 알지.”
“무서워.”
“아, 줘 봐. 내가 할게.”
큰 아이가 낚싯대를 빼앗아 서슴없이 남자의 눈을 겨냥했다. 그때 남자의 손가락이 떨렸다. 그 모습은 왠지 필사적이었다.
“큽, 쿨럭.”
“꺄악!”
“악!”
남자의 신음에 아이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뒷걸음질을 쳤다.
“일어났다!”
“사람이 움직인다!”
당연한 말을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 동안, 남자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토악질을 몇 번 해 대고는 힘겹게 상체를 일어섰다.
검은 머리에 창백한 얼굴, 건조한 붉은색 눈동자가 마치 뱀파이어를 연상케 했다.
“무섭게 생겼어.”
진심으로 말하면서도 아이들은 일정 거리를 두고 도망치지도 않았다. 남자는 눈을 반쯤 뜨고 아이들을 보며 물었다.
“너흰 누구야? 여긴 어디지?”
“나는 이치로고 누나는 센이에요. 여기는…….”
“이치로! 수상한 사람이 묻는 말에 다 대답하면 안 돼!”
“아, 웅. 미안. 아저씨는 누구예요?”
“나? 나는…….”
남자는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결국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머리를 부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