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118
118화
지젤리드 왕국 변방에 위치한 밤까마귀 본단.
속칭 까마귀 거리에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바닥이나 간판, 지붕에도 새빨간 피가 흩뿌려져 있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신체의 일부가 여기저기 뒹굴고 있다.
거리의 끝에 자리하고 있는 지하 3층의 작은 방에, 쇠로 된 테이블을 두고 두 남녀가 마주하고 있다.
긴 머리에 곱상한 외모의 미중년은 짐짓 침착함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복직시켜 주겠다. 원하는 왕국의 지부장 자리를 만들어 주지.”
에런은 밤까마귀 수장의 말에 비웃음을 흘리며 부채를 펄럭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국 눈치 때문에 죽이려고 안간힘을 쓰더니 이제는 부귀영화를 약속해? 역시 이 시대의 최고의 협상은 폭력이야.”
“그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을 너도 잘 알겠지. 네가 이 자리에 있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맞아. 근데 상대가 나라는 게 문제지. 그래서 네 자리를 가져가려고. 수장이 바뀌어도 밤까마귀는 잘 돌아가기만 하면 되거든. 내가 너보다 못할 것 같아?”
수장은 그제야 침착함을 잃고 뱀 같은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네년을 거두는 게 아니었는데.”
“후회는 지옥에 가서 하세요.”
촤락-.
에런이 검은 깃털 부채를 펼치자, 그 끝에서 칼날 두 개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그것을 고민 없이 수장에게 휘둘렀다.
슥-.
수장은 피가 울컥울컥 쏟아지는 목을 부여잡고 그녀를 끝까지 노려보다가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에런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부채를 접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작은 방문을 열자 단검과 송곳을 빼 든 까마귀들 수십 명을 맞이했다.
“늦었어, 이 시꺼먼 것들아. 자, 이제 선택할 시간이에요. 여기서 죽을래, 나랑 같이 살래?”
에런은 그들을 보며 빙긋 웃음을 지었다. 한쪽 볼에 피를 묻힌 그녀의 미소는 뭇 사내들의 심장을 덜컹 내려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 * *
같은 시각, 밤까마귀 히스 본부.
히스는 왕국으로 치기에는 땅덩어리가 작아서 본부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스슥.
한 중년인이 비둘기의 발목에 달린 종이를 꺼내어 암호문을 보았다. 그의 미간이 좁혀진다.
“본부장님, 안 좋은 소식입니까?”
직원의 물음에 본부장이 저음으로 암호문을 읽었다.
“디마 후작의 반란으로 왕이 죽고, 제국군은 오크 로드 군단에게 패배하여 남으로 후퇴 중……이로구나.”
“아…….”
워낙 거대한 정보이기에 직원과 본부장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본부장이다.
“실질적으로 가브와 공주에 관한 수배는 무용지물이 되었구나. 어차피 소문이 퍼지는 건 시간문제. 그 전에 구역장들에게 보내서 정보값을 받아라.”
“예, 본부장님.”
직원이 나가고, 본부장은 창문 밖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들이 과연…… 가브를 어떻게 할까?”
구역장, 히스는 열한 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각 구역마다 장이 존재하고 세력이 나뉘어 있지만, 그중 1, 6, 10구역이 가장 영향력이 강한 3강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1구역장 피페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차지, 또는 처리하는 잔혹하기로 유명한 인물로,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다.
그는 장의 면모가 적지만 뛰어난 무위로 인해 저절로 비슷한 성향의 부하들이 모여들어 세력을 만든 사례다.
피페로는 검지로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중얼거렸다.
“가츠가 돌아왔다고…….”
“밤까마귀의 정보에 따르면 수배령은 내려간 거나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할까요?”
피페로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돌연 자신의 머리칼을 움켜쥐더니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가발이 벗겨지고 반들반들 그의 민머리가 드러났다.
그는 가발을 바닥에 내던지며 입을 열었다.
“놔둬. 좋은 명분이잖아. 요즘 히스는 너무 따분했어.”
“예, 피페로 님.”
바닥에 떨어진 가발 안쪽에는 누군가의 머리 가죽이 붙어 있었다.
6구역장 바할은 큰 덩치에 부리부리한 눈처럼 괄괄하고 호전적이며 전투를 사서 즐기는 성향이다.
압도적인 힘에 매료된 자들이나 순수 악을 추구하는 자들이 그의 세력으로 흡수되며, 히스에서 가장 큰 세력을 지니고 있다.
바할은 고기를 통째로 뜯어먹으며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에게 말했다.
“가츠가 여길 와? 이거 나를 무시하는 거 맞지? 그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오늘이 지나기 전에 놈의 시체를 봐야겠다. 할 수 있겠지, 미도?”
미도라 불린 사내는 고개를 더욱 숙였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바할은 가브와 같은 해수 출신인 미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고 고기를 다시 집어 들었다. 고기의 손가락은 다섯 개였다.
* * *
가브 일행은 히스의 변두리에 있는 한 민가에 들어갔다. 가브는 먼지로 가득한 침대를 치우고 바닥에 있는 나무 판을 열어 지하실로 일행을 안내했다.
지하실에는 작은 테이블 하나에 의자 두 개, 돌 침상이 하나 놓여 있고 천장에는 환기 역할을 하는 주먹만 한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다.
끼긱, 끼긱.
가브는 테이블의 다리를 익숙한 손놀림으로 몇 번 돌렸다. 그러자 한쪽 구석에 벽이 열렸다. 그곳에는 수십 가지의 암기가 들어 있었다.
그것 외에도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비밀 장치를 만져 캐마산 가루와 무기, 약 등을 테이블에 꺼냈다.
힐 아슈가 조신하게 하얀 손을 들어 코를 막았다.
“오래된 냄새……. 저는 다시 지하로 가둬지는 건가요?”
목소리 톤을 보니 농담이랍시고 던진 말이다. 이엘은 그녀의 손을 잡고 꾹 눌러 눈치를 주었다.
가브는 몸 곳곳에 암기와 캐마산 가루, 트롤의 피를 챙기고 마지막에는 헤딘이 열심히 챙긴 테라갑옷을 착용했다.
그는 아직 얼어 있는 리온느를 지나쳐 세실리아와 발튼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누구든 접근하면 다 죽여.”
세실리아는 멈칫했다가 주먹을 꽉 쥐며 입을 뗐다.
“주군은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신고식 하러.”
그녀는 자리에서 바로 일어섰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가브는 그녀의 무릎이 완전히 펴지기 전에 어깨를 눌러 자리에 다시 앉혔다. 그러곤 조금 온도가 달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히스에서, 나에게 상처를 입힐 자는 없다.”
다르게 해석하면 일행에게는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뜻이다. 세실리아는 다시 자신의 약함을 탓하며 묵례했다.
“……기다리겠습니다, 주군.”
“여긴 걱정 마십시오! 쥬군!”
가브가 지하실을 나서고, 세실리아는 자신의 무릎을 꽉 쥐며 자신의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러나 그녀의 감정이 기운으로 바뀌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세실리아 씨는 가브 씨를 좋아하네요.”
세실리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이엘은 다급히 힐의 입을 막으며 씹어 먹듯이 힘을 주어 속삭였다.
“힐 양, 그러다 진짜 여기에 묻히는 수도 있어요. 제발 생각을…….”
“그래.”
이번에는 이엘과 발튼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러나 세실리아의 눈동자에는 비장함이 가득했다.
“주군으로서…… 주군의 피의 행보에 앞장서서 검을 휘두르고 싶다.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 마지막까지 등을 빌려주고 싶다. 그런데…… 그러기엔 내가 많이 부족하구나.”
리온느는 세실리아의 진중한 대답에 고개를 깊게 끄덕이며 눈물까지 머금었다. 힐은 이엘의 손을 치우고 말을 이었다.
“맞네요. 좋아하네요.”
스릉.
세실리아는 바로 세검을 꺼내어 힐 아슈에게 다가갔다.
“내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서큐버스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늘 주군이 오시기 전에 살 껍질을 발라 주마.”
“세, 세실리아 언니, 잠깐!”
“챰아, 챰아!”
발튼과 이엘은 그녀들을 말리느라 진을 뺐고, 리온느는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훔쳤다.
* * *
어둠이 짙게 깔린 밤, 목숨이 아홉 개라면 히스 도시의 밤거리를 거닐라는 농이 유행할 정도로 이곳의 밤은 위험했다.
저벅저벅저벅.
그곳에 홀로 농담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었다. 가브는 마치 자신의 위치를 일부러 알리는 듯이 큰길 가로 느릿하게 걷고 있었다.
적막하다. 기분 나쁠 정도로 적막한 밤이다. 벌레라도 울어야 하는데 거리에 맴도는 사나운 기운에 모든 생명체가 숨을 죽이고 있는 듯했다.
“어으, 으으…….”
저 멀리, 주점 앞에 벙거지를 눌러쓰고 비틀거리는 술주정뱅이가 보인다. 그는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고 여기저기 부딪히다가 지나가는 가브와도 부딪혔다.
슥-.
그 순간 사내의 소매에서 뾰족한 송곳이 튀어나와 가브의 겨드랑이를 찔러 왔다.
터덕.
가브는 알고 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그의 손목을 잡아채고 나무 기둥에 그를 밀쳤다. 그러곤 손목을 반대로 꺾어 송곳으로 그의 목을 찔렀다.
우득, 푹-.
“컥, 컥.”
기형적으로 뒤틀린 손으로 자기 자신의 목에 송곳을 박아 넣은 모양새다. 사내는 뒤의 나무 기둥에도 깊게 박혀 송곳을 빼내지도 못하고 고통스러운 신음만 흘렸다.
두구두, 두구두, 두구두!
술주정뱅이의 기습을 신호로 주변의 살기가 확 짙어졌다. 뒤쪽에서 한 사내가 말을 전속력으로 몰고 오며 창을 쭉 뻗었다.
가브는 그를 향해 몸을 틀고 자세를 낮추며 오른팔을 크게 휘둘렀다.
촤아아악!
끼히이잉!
가브의 오른팔에 걸린 사내의 창대와 말의 다리 네 개가 전부 잘려 나가거나 부러진다.
쿠당탕탕!
사내는 말과 함께 바닥에 몇 바퀴나 굴렀다.
가브가 마무리하려고 그에게 가던 중에 지붕에서 따끔한 살기가 느껴졌다. 위를 보니 지붕에서 뛰어내리며 검으로 아래를 내려찍는 소년이 보였다.
척, 푹!
가브는 자연스레 소년의 검을 잡아서 말에 깔린 사내의 머리에 찍고, 검을 뽑으려는 소년의 머리에 오른팔을 휘둘렀다.
푸확!
아직 소년의 몸이 쓰러지지 않았을 때, 정면에서 덩치가 거대한 중년인이 나타났다. 그는 발튼보다 머리가 하나 더 있을 정도로 크고 살집이 비대하여 적어도 200킬로미터는 넘어 보였다.
쾅, 쾅, 쾅, 쾅!
“우으아아아!”
거대한 중년인이 포효하며 두 손에 도끼를 들고 달려오는 모습은 마치 하마가 돌진해 오는 느낌이었다.
가브는 그에게 마주 달려갔다. 그리고 부딪히기 직전에 옆의 벽을 타고 뛰어올라 거대 중년인을 넘어갔다.
푸슉-.
가브와 거대 중년인이 서로 교차해서 지나가자, 중년인의 머리통이 사라져 있었다. 그의 목뼈와 지저분하게 뜯긴 살점만이 너덜거리고 있을 뿐.
이미 시체가 된 중년인은 그대로 몇 발자국 더 달려갔다. 중년인의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폭죽처럼 보였다.
스릉, 스르르릉.
중년인의 몸이 쓰러짐과 동시에 사방에서 창과 검, 암기가 가브를 찔러 왔다. 가브는 지금까지 넣고 있던 바레스 중검을 뽑았다.
* * *
10구역장 케레스, 구역장 중에 유일하게 여인이지만 강철 같은 근육과 2미터에 가까운 덩치를 지니고 있어 여인들 중에 대륙 최강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돌고 있었다.
케레스는 냉철하고 지능적이며 유일하게 히스를 통합시키려는 야망을 가지고 세력을 단단하게 넓히는 중이었다.
그녀는 하얀 여우 털 모피가 깔린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그 끝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애들 다 뺐어?”
“예, 케레스 님.”
“다른 놈들은……. 아니, 직접 들으면 되겠네.”
케레스의 시선이 부하의 어깨 너머 문을 향했다.
저벅저벅저벅.
한 치도 자신을 숨기지 않는 강인한 발걸음, 검붉은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 가브가 케레스의 대전에 들어섰다.
가브는 한 손에 들린 케레스의 부하를 대충 던지고는 케레스와 눈을 마주했다.
“내가, 여기에 성을 좀 쌓으려고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