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121
121화
저택 복도, 세실리아는 가브와 나란히 걷던 중에 갑자기 뒤돌아섰다.
스릉.
그녀는 검을 뽑으며 피페로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힐 아슈의 머리칼을 다시 만지려던 그는 웃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워워, 왜 이러시는 건지?”
세실리아는 그를 벽까지 몰아세우고는 세검을 목에 갖다 댔다.
“내 앞에서 개수작하지 마. 목에 구멍 뚫린다.”
피페로는 가브의 뒷모습을 힐끗 보았다가 세실리아와 눈을 마주하며 미소 지었다.
“그럴 자신은 있고?”
세실리아는 순간 끈적한 살기가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검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지금 보여 줄게.”
세검이 피페로의 목을 찔러 핏방울이 새어 나왔다. 피페로는 엄지와 검지로 그녀의 세검을 잡으며 애원하는 표정을 지었다.
“농담이야, 농담. 이러지 말라고? 우리 이제 같은 편이야.”
턱.
가브의 걸음이 멈췄다. 세실리아는 피페로의 눈을 한번 노려보고는 검을 뗐다.
집무실에 도착한 가브는 피페로에게도 케레스와 동일하게 요청했다.
현 상황을 유지하면서 체계적인 훈련을 시키고 일주일에 한 번씩 이곳으로 와서 수성전 훈련을 하는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 아쉽군요.”
피페로는 힐 아슈를 힐끗거렸다. 가브는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싸늘한 어투로 말했다.
“내 세력에 들어온 자들은 불필요한 살인, 강간, 도적질은 금한다. 피페로, 너도 포함이다.”
피페로가 처음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황해했다.
“아니, 갑자기 그러면 저 같은 놈은 어떻게 살라고……?”
가브는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기면 처형으로 다스리겠다. 적응 못 하면 죽어야지.”
“아하. 아…… 예, 알겠습니다, 가브 님.”
피페로는 고개를 깊이 숙이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모두 나가고 혼자 집무실에 남은 가브는 의자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육체의 눈을 감으면 마나의 눈이 뜨인다.
눈을 뜨고 있어도 의식하면 볼 수는 있지만 시각이 주는 정보를 차단하면 더욱 명확하게 보인다.
가브는 몸 안의 우주를 살폈다.
‘육체를 단련하지 않았는데도 마나의 총량이 증가했다.’
언제 증가했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다. 힐 아슈의 몸에 실드를 끊임없이 씌우면서 마나를 거의 바닥까지 소모했을 때다.
몸에 마나가 깃들게 하거나 총량을 올리는 것은 어렵지만, 사용하여 소모된 것이 다시 차는 것은 하루 이틀 휴식을 취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가브의 경우는 사흘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그때 총량이 증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나를 많이 다루고 소모하며 숙련되는 만큼 마나를 담는 그릇이 커지는 것이다.
다만 단전에 자리 잡은 마나핵의 크기가 변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문제는 오른팔에 있는 마기…….’
팔꿈치까지 마나로 변환시킨 후부터는 요지부동이다.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상 진전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곳에 갇혀 있는 마기는 더욱 짙어지는 듯했다.
‘이것을 빨리 없애야 하는데…….’
그때 오른팔에 깃들어 있는 마기가 마치 가브의 말을 들은 것처럼 꿈틀대더니 자기들끼리 결속력을 더했다.
“음…….”
가브는 마기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눈을 떴다.
앞에는 렘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히스의 밤까마귀를 통해 헤딘은 당분간 에런이 데리고 있겠다는 소식은 미리 들었다.
렘은 가브가 눈을 뜬 것을 알아채고 입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주군.”
가브는 말없이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를 볼 때마다 셀이 떠올랐다. 셀의 그림자여서 그런지 풍기는 기운도, 외모도, 느낌도 비슷하다.
“셀이 죽었다고 생각하냐?”
렘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누구에게 한 것인지 모를 애매한 질문이었다.
“……예.”
가브는 렘의 마음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가브는 제국의 힘에 밀려 셀의 시체를 제대로 찾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되었다.
그는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다시 들었다.
“렘, 세실리아와 함께 해수들을 찾아올 수 있겠나?”
“예.”
렘은 짧게 대답하곤 그 자리에 가만히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주군. 그들도…… 기뻐할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
“예, 분명히.”
다음 날 아침, 세실리아와 렘을 보내기 위해 대전에 사람들이 모였다.
조금 늦게 들어온 리온느는 갑옷을 차려입고 짐까지 꾸린 상태였다.
“가브 님,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제가 같이 가야 합니다.”
가브는 세실리아에게 시선을 돌려 결정권을 넘겼다. 그녀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직 연락이 닿는 해수들이 있을 겁니다.”
가브는 고개를 끄덕여 리온느의 동행을 허락했다.
해수를 찾아 나서는 파티는 바로 대전을 나섰다.
세실리아는 나가는 길목인 복도에서 리온느의 멱살을 확 잡아당겼다.
“이런 건 나한테 먼저 말해.”
“옙. 죄송합니다, 선배님…….”
리온느는 고개를 숙이며 시무룩해졌다.
* * *
가브 일행이 머무는 방은 적막해졌다.
모두 할 일을 찾아 떠나, 이제는 가브와 힐 아슈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브는 힐에게 실드를 씌우고 감각이 이어지는 곳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고, 힐은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가 잠이 들었다.
평화로운 오후, 창가에서 따스한 햇살이 내리쬔다.
힐 아슈는 아주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초록색 가득한 풀밭에서 흔들리는 꽃을 벗 삼아 달리고 있는데, 우거진 숲이 시작되는 곳에 검은 문이 하나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힐은 문틀이나 앞뒤가 없는 그 문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살짝 열어 보았다.
화아악!
그러자 문이 벌컥 열리며 검은 연기가 힐을 덮쳤다. 그녀는 반항할 새도 없이 그곳으로 끌려갔다.
문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끝없는 어둠이었다. 공포 그 자체였다.
형체가 존재하지 않는데도 자신을 쥐고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Κόλαση κόκκινα μάτια, δεν έχω έλεος.
‘헬레드의 눈이여, 나는 약속을 잊은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허어억!”
힐 아슈의 눈이 번뜩 뜨였다. 그녀의 눈동자는 본래의 눈과는 상반되게 눈동자와 흰자까지 모두 검은색이었다.
그녀의 허리가 확 꺾이며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꺼으, 끄.”
새하얀 얼굴이 더욱 창백해지며 핏줄이 튀어나온다. 그녀는 허공에서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쾅!
그때 가브가 한 손에 검을 들고 문을 부술 듯이 차고 들어왔다. 그러곤 검을 놓지 않고 힐의 몸을 강제로 내렸다.
그래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그 위에 올라가 뺨을 때렸다.
퍽, 퍽!
힐의 입술이 터져 나가고 하얀 이불에 피가 뿌려졌다. 가브가 다시 손을 들었을 때, 쥐어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이상한 현상으로 인한 후유증인지, 맞아서 그런지 실핏줄이 다 터진 힐이 신비로운 하얀색 눈동자로 가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브는 검을 그녀의 목에 금방이라도 쑤셔 박을 것처럼 대고 물었다.
“너 뭐야! 방금 그건 뭐야, 대체!”
가브가 그녀에게 쏜살같이 올 수 있었던 이유는, 감히 살면서 단 한 번도 느낄 수 없었던 강대한 마기 때문이었다.
제국 왕의 대전에서 느꼈던 그것만큼이나 강렬했다.
힐 아슈는 목을 단숨에 잘라 버릴 검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멍한 눈으로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도 모르겠어요. 갑자기 꿈에서…….”
힐은 꿈의 내용을 그대로 얘기했다.
그녀의 눈빛과 얼굴이 진실하게 보였기에 가브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약속…….”
그의 복잡한 마음이 느껴지는지 힐은 말을 더 붙였다.
“이제 또 이런 일은 없을 것 같아요. 그냥 그런 확신이 들어요.”
‘내가 열지 않으면 되니까.’
힐은 급한 마음에 말을 내뱉고는 자신이 도리어 놀랐다.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고민했는데, 막상 이 상황이 닥쳐오니 눈앞의 거무튀튀한 남자에게 버려지는 것이 두려웠다.
가브는 시선을 내려 그녀의 천진한 눈을 마주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확신에 찬 말만 하던 그녀가 ‘같아요’처럼 애매한 말을 하는 것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의심이 들어야 할 마당에 그런 말을 들으니 이상하게도 오히려 진심으로 느껴졌다.
“따라와.”
“네!”
힐은 기다렸다는 듯이 두 손으로 침상을 탁 치며 일어섰다.
뒤를 바짝 따르는 중에 가브가 말을 이었다.
“10미터 이상 떨어지지 마라.”
그 말에 힐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가브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만큼 떨어졌는지 어떻게 알아요? 이렇게 잡고 있을게요.”
일리 있는 말이기에 가브는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을 잠시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거니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제대로 터졌군.”
“저 예쁜 얼굴을…… 어으.”
“가브 님이 저런 취향이었구나.”
“그래서 여자가 없었나? 아니, 다 죽어 나간 건가?”
“쉿, 눈 마주치지 마.”
가브는 발을 멈추고는 다시 뒤돌아섰다. 입술은 찢어진 채 퉁퉁 부어올랐고 입과 눈에 피가 묻어 있다.
누가 봐도 방금 전에 죽도록 얻어맞은 얼굴이다.
가브는 가죽코트 안쪽에 천옷을 찢어 그녀에게 건넸다.
“피 닦아.”
“네, 하하.”
힐은 천 조각으로 얼굴을 막 문질렀다. 흡수력이 좋은 천이 아니라 그런지 피가 닦이지 않고 오히려 얼굴 전체를 붉게 만들었다.
가브는 한숨을 작게 내쉬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힐은 다급히 천 조각을 주머니에 넣고 가브의 뒤를 종종 쫓아갔다.
저택 밖, 한 건물 모퉁이에 숨어 그들의 모습을 몰래 지켜보는 이가 있다.
피처럼 빨간 눈동자에 어울리지 않는 여인의 가발을 쓰고 있는 남자, 피페로였다.
그는 힐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보며 혓바닥으로 윗입술을 핥았다.
“들키지만 않으면 되지, 들키지만 않으면…… 쓰읍.”
* * *
마물의 파도는 비단 제국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사막, 숲, 산맥 등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웅크리고 있던 마물들이 서로 단합하여 인간의 마을을 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현상은 마치 누군가가 지시를 내린 것처럼 전 대륙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아슈 제국, 버려진 왕궁.
왕이 머무는 대전에는 일반적인 오크보다 몸집이 두 배는 더 큰 오크 로드와 그의 친위대 오크들이 부복하고 있었다.
오십을 넘지 않는데도 넓은 대전이 꽉 차 보일 정도로 한 명 한 명의 몸집이 컸다.
오크 로드마저 무릎을 꿇고 복종을 취하게 만든 존재가 왕좌에 앉아 있다.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 단발머리에 은은하게 빛나는 은색 머리칼, 비릿하게 말려 올라간 입술.
그는 디마에게 죽임을 당했던 제국의 왕, 론 아슈였다.
스윽-.
그가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뜨자, 흰자까지 까맣게 덮여 있는 눈이 보였다. 그것은 천천히 정상적으로 돌아와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만 남았다.
론 아슈의 눈동자는 본래 회색이었다.
그는 피곤한 듯이 눈을 깊게 한 번 더 깜빡이고는 붉은 입술을 천천히 벌렸다.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