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123
123화
일레이어 숲 깊은 곳, 세실리아는 리온느의 얼굴을 한 존재에게 고민 없이 검을 뻗었다.
쉭.
검 끝이 허공을 갈랐다. 녹색 눈의 여인은 미끄러지듯이 거리를 벌렸다.
귀신처럼 신묘한 발놀림에 세실리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스릉.
여인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검면에 처음 보는 문자가 빼곡히 새겨져 있는 가느다란 검이다.
세실리아의 것처럼 찌르기와 베기 둘 다 할 수 있는 형태였다.
“놀고 싶어서 그래?”
검을 뽑는 시점에서 옷도 바뀌었다. 가벼운 가죽갑옷에 허리까지 오는 후드 망토를 걸치고 있다.
후드를 눌러쓰고 있지만 새하얀 얼굴에 날카로운 눈이 보였다. 녹색 눈동자가 유독 반짝인다.
처음 보는 자다.
“혀를 잘라 주지.”
세실리아는 바닥을 박차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심장을 향해 검을 뻗었다.
팅.
여인은 세실리아의 검을 쳐 내려다가 그것에 실린 힘을 느끼고는 흠칫하며 뒤로 빠졌다.
세실리아는 바로 따라붙으며 연공을 펼쳤다.
채쟁, 챙!
그 찰나에 몇 합을 치르고 여인이 다시 거리를 벌렸다.
“오, 실프도 없이 제법인데?”
여인은 여유로웠지만 세실리아는 마음이 급했다.
‘빠르다.’
발놀림만 빠른 것이 아니라, 모든 움직임이 빠르다. 더 무서운 것은 예측이 불허하다는 것이다.
마치 여인의 팔꿈치를 누가 밀어 주는 듯이, 다리를 누가 끌어 주는 듯이 불규칙적인 시간에 목적지에 도달한다.
그간 쌓아 왔던 본능적인 반응 속도가 아니었다면 허락했을 공격이 적어도 두 번은 있었다.
더 열받는 것은 그녀는 진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놀리듯이 몇 번 검을 섞다가 뒤로 물러나기를 반복한다.
세실리아는 아랫입술을 씹으며 품에서 손가락 길이만 한 암기를 꺼냈다.
마비 기능이 있는 마리안느 독침이다.
“다른 자들은 어디 있지?”
“글쎄, 알고 싶으면 날 이겨 보든지.”
“네 시체에게 물어보지.”
세실리아는 강렬한 살기를 뿜어내며 그녀에게 쏘아져 나갔다.
여인은 빠르지만 힘은 자신이 우위다. 검술도 뛰어나지만 명문가에서 대련만으로 배운 느낌이 강하다.
팅!
그녀가 검을 살짝 쳐 내다가 또 밀리지 않자 뒷걸음질을 쳤다.
세실리아는 검의 손잡이를 손바닥으로 밀어내며 독침을 그녀의 다리를 향해 던졌다.
팅!
“읏.”
도박에 가까운 기술에 여인은 다급히 검을 다시 쳐 내고 더욱 거리를 벌렸다.
세실리아는 품에서 단검을 꺼내어 들며 그녀를 숨 쉴 틈 없이 바짝 따라붙었다.
챙, 챙!
뒷걸음질을 치며 세실리아의 단검을 쳐 내던 여인의 발이 꼬였다. 마비 효과가 온 것이다.
턱- 기기기긱!
세실리아는 때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발끝을 밟고 단검으로 목을 찔러 갔다.
검신이 교차되어 서로의 힘으로 인해 부들부들 떨려 왔다. 힘에서 밀리는 여인의 턱에 단검 끝이 닿았다.
스스슥.
세실리아의 단검이 턱을 지나 그녀의 목으로 천천히 내려오며 혈선이 생겼다.
“그만.”
차분하고 강직한 목소리, 그 중후한 울림이 숲에 넓게 퍼져 나갔다.
세실리아는 마치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 같아 움찔하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숲이 마치 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지더니 다른 숲이 펼쳐졌다.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한 나무가 눈앞에 있다. 처음 보는 잎과 나무줄기를 지녔고, 가지 사이사이에 잎사귀로 지은 집이 수십 채다.
그 주변에도 이 나무만큼은 아니지만 높이만 수십 미터는 되는 것들이 여러 그루 보였다.
큰 나무의 가까운 가지에는 눈부실 정도로 하얀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미중년인이 서 있었다.
세실리아는 본능적으로 그가 목소리를 낸 것임을 확신했다.
그 주변에도 여러 명의 남녀가 세실리아와 여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얼굴이 하얗고 귀 끝이 뾰족하다는 것이다.
‘엘프…….’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종족,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 눈으로 직접 본 이들은 없다는 그 신비로운 종족이 눈앞에 있었다.
세실리아 아래에 깔려 있는 여인이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그 검, 찌를 수 있겠어?”
세실리아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어.”
세실리아는 가차 없이 단검을 그녀의 목에 찔러 넣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발버둥 쳤지만 이미 목에 검신이 반쯤 들어간 상태였다.
중년인을 포함한 다른 엘프들이 재빨리 뛰어내려 그녀를 떨어트리고 세실리아에게 검을 겨누었다.
“컥, 꿀럭, 끄……. 아, 아버지…….”
여인은 구멍 난 목에서 피를 울컥울컥 쏟아 내며 중년인에게 손을 뻗었다.
중년인은 책망하는 눈으로 그녀를 보며 두 손을 목에 댔다.
“어리석기는…….”
그러자 쩍 벌어진 환부에 푸른 빛이 내려앉았다. 그것은 이내 환부를 다물려 출혈을 완전히 멈추게 했다.
그 후로도 중년인은 오랫동안 여인의 목에 손대고 집중했다.
고통에 일그러져 있던 여인의 얼굴이 점점 편안함을 되찾는다.
“후…… 이제 데려가거라.”
“예, 아버지.”
남자 두 명이 묵례를 하고 여인을 데리고 갔다. 중년인이 실제 아버지가 아니라 호칭이 그러한 듯했다.
중년인은 땀을 훔치며 뒤돌아서 세실리아를 보았다. 그녀는 세 명의 엘프에 의해 목에 검이 닿아 있었다.
“치우거라.”
그의 명에 검이 치워지자마자 세실리아는 한 명의 검을 빼앗아 중년인에게 달려들었다.
척.
세실리아의 검 끝이 중년인의 목에 닿았다. 피가 새어 나오는데도 중년인의 얼굴은 평안했다.
“에리얼의 방식이 무례했어. 대신 사과하겠네.”
“필요 없고, 나머지는 어디 있지?”
“에리얼이 아무리 모났어도 이 땅에 아무나 들이지는 않지. 남은 자들은 갈 길을 갔을 것이야.”
한 대목이 세실리아에게 의문을 일으켰다.
“아무나?”
그녀의 질문에 중년인은 검지로 자신의 목에 닿아 있는 검 끝을 퉁 쳤다.
후우웅.
그러자 자잘한 진동이 검신을 타고 내려와 손잡이에 이르렀다.
“흡.”
그러자 세실리아의 손아귀가 찢어지며 검이 떨어졌다. 그것을 다른 엘프가 재빨리 주워 뒤로 물러났다.
중년인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뒷짐을 지고 입을 열었다.
“나는 아히가르족 39대 아버지 푸티엘이다. 그대의 몸에는 38대의 피가 섞여 있지.”
갑작스러운 엘프 조상설에 세실리아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
“근데?”
푸티엘은 이번에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무거운 어투로 말을 이었다.
“곧, 세상이 어둠에 뒤덮일 것이다. 그 잔악한 폭풍에 휩쓸리지 않게 지켜 주겠다.”
“어디서 개소리를.”
세실리아는 재빨리 뒷걸음질을 쳐서 떨어져 있는 자신의 단검을 챙겼다.
푸티엘과 다른 엘프들은 그녀가 멀어지는 것을 쫓지 않고 보고만 있었다.
“언제부터 지켜 줬다고. 세상이 어떻게 되든 니들은 니들끼리 여기에 찌그러져 있어.”
세실리아는 멀리까지 그들을 경계하다가 돌아서서 달렸다.
‘주군이 찾을 것이다. 빨리 돌아가야 해.’
“헉, 헉, 허억.”
벗어날 수 없다. 올 때는 이 정도 거리가 아니었는데 아무리 달려도 끝없는 숲만 펼쳐져 있다.
“젠장.”
조금 더 달렸을 때, 엘프들이 사는 그 거대한 나무와 마주했다.
환상이다. 이곳을 벗어날 수 없도록 광범위한 마법으로 환상을 걸어 놓은 것이다.
부모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길거리에 버려져 오물을 주워 먹고 살았는데 고귀하신 엘프의 피가 섞여 있는 줄은 몰랐다.
변한 것은 없다. 이런 일에 휘말려 기분이 조금 더 더러워졌을 뿐.
“방법이 있을 거야.”
세실리아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나뭇가지를 열심히 꺾었다.
“야.”
숲에서 달밤에도 눈이 부실 정도로 샛노란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여인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낮에 세실리아가 목을 찔렀던 에리얼이었다.
“날 제자리에 데려다놔.”
세실리아는 바로 품에서 단검을 꺼내어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에리얼은 질세라 빠르게 거리를 벌리며 놀리듯이 말했다.
“빠르네, 정말. 아무리 봐도 실프가 없는데. 인간 세상에서 좀 강하겠어.”
에리얼이 뒷짐을 진 채 미끄러지듯이 멀어지자 세실리아는 살기를 내뿜으며 무섭게 쫓았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그 얼굴을 하고도 정말 몰랐어? 원래 인간은 자라다 만 고구마처럼 생겼잖아. 얼굴에 양심이 있어야지.”
엘프는 인간의 열 배를 산다. 에리얼은 아직 백쉰 살밖에 되지 않은, 세상을 책으로 배운 어린 엘프였다.
엘프의 교육에는 엘프 존귀 사상이 깊게 박혀 있어, 때로는 엘프 중심적으로 왜곡된 사실도 많았다.
툭.
에리얼의 등 뒤가 큰 나무에 막혔다. 금세 세실리아가 따라붙어 그녀와 손을 섞었다.
터덕, 턱, 턱!
둘의 팔이 복잡하게 얽혔다. 세실리아의 단검 끝은 에리얼의 눈을 향하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나가면 죽고, 여기에 있으면 산다니까?”
세실리아는 그녀의 신비로운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씹어 먹듯이 말을 내뱉었다.
“이 씨발 엘프들아…… 죽고 사는 건 내가 판단해, 니네가 아니라.”
처음 듣는 귀에 쏙 박히는 욕에 에리얼의 눈동자가 커졌다.
“역시 인간은…… 어려서 그런가, 참 이해할 수가 없네.”
에리얼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무릎으로 세실리아의 배를 밀고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한번 잘 나가 보든지.”
에리얼은 그 말을 남기고 뒤돌아서 숲을 달렸다. 그러자 세실리아가 감히 쫓을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사라졌다.
지금까지는 봐줬다는 뜻이다. 세실리아는 작게 절망했다.
“엘프들은 다 저리 빠른 것인가…….”
아버지라 불리는 늙은이만 해도 손가락 하나로 검을 놓치게 만들었다.
세실리아는 그렇지 않아도 나약함을 느끼던 때에 이들을 만나 더욱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평생을 수련했는데…… 모자랐나?”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다. 엘프들도 잠은 잘 것이다.
세실리아는 거대한 나무 인근에 높은 나무에 올라가 엘프들의 집이 불이 꺼지고 고요해지기를 기다렸다.
크레아 왕국으로 오는 동안에도, 이곳에 와서도 거의 쉬지 않아서 세실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았다.
고개를 한 번 떨어트렸다가 다시 세웠을 때, 뿌연 시야 사이로 초록빛이 작게 일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시야가 점점 더 명확해지자, 자신의 무릎에 손가락 크기밖에 되지 않는 인간 형태의 무언가가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세실리아와 눈을 마주치자 그것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입을 벌렸다.
-꾸?
세실리아는 고민 없이 무릎 위의 그것에게 단검을 휘둘렀다.
* * *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케레스의 저택.
리온느는 힐의 방문 앞에 복도를 서성이며 초조해했다.
‘세실리아 선배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나 때문에……. 그 해수 새끼와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녀는 체력이 고갈된 와중에도 세실리아의 안위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검은 그림자가 그녀의 뒤로 다가왔다.
퍽.
리온느는 목에 충격을 받자마자 스르르 눈을 감았다. 검은 인영은 그녀의 몸을 소리 없이 눕히고 힐의 방으로 들어갔다.
“흐으으…….”
안에는 그림을 그린 듯이 아리따운 이목구비에 짙은 밤에도 빛나는 은빛 머리칼을 늘어트린 힐 아슈가 누워 있었다.
그녀를 보고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반짝인다. 그는 1구역의 장 피페로였다.
피페로는 힐의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내리다가 들어서 냄새를 깊게 맡았다.
“하아, 최고야……. 최고의 작품이 될 거야.”
“으, 음…….”
그의 혼잣말에 힐이 눈을 비비며 깨어났다. 피페로는 당황은커녕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준비된 말을 이었다.
“레이디, 가브 님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나와 함께 가시죠. 멋진 풍경과 예쁜 꽃밭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와, 꽃밭 냄새 좋아해요. 얼른 가요.”
힐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해맑게 웃음 지으며 피페로에게 이끌려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