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124
124화
일레이어 숲.
가브는 말도 타지 않고 이틀 만에 그곳에 도착하였다.
해수들은 온몸이 먼지와 땀으로 범벅된 가브를 보고는 흠칫 놀랐다.
“주군.”
렘이 인사하자 그제야 해수들도 급히 묵례했다. 가브는 고개도 끄덕이지 않고 바로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어디야?”
“이쪽입니다. 면목 없습니다.”
“됐다.”
가브는 그동안 마음이 타들어 갔을 렘의 어깨에 손을 툭 얹고는 걸음을 옮겼다.
가브는 유심히 주변을 살피며 숲을 돌았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 이상한 것을 느꼈다.
‘아까와 동일한 풍경이다.’
분명 앞으로만 걸었는데 한 시간 전과 같은 풍경이 나왔다.
계속 비슷한 풍경이었지만 나뭇잎과 나뭇가지, 나이테가 달랐다.
추적과 도주가 뛰어난 렘도 모를 정도로 비슷했다.
가브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난 기억력 덕에 알아챌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현상을 들어 본 적이 있다. 환상 마법을 광범위하게 펼쳐 같은 곳을 돌게 만드는 것.
가브는 마나에 집중하여 그곳을 살폈다.
‘마나가 엉켜 있다.’
거대한 공간에 마나가 비정상적으로 흐른다.
가브는 돌멩이를 하나 집어서 그곳에 던졌다.
훙-.
돌멩이가 사라졌다. 떨어지는 소리도, 어디에 맞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해수들은 그저 돌멩이를 멀리 던졌구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가브는 고개를 돌려 해수 한 명에게 손을 내밀었다.
“단검 좀 빌릴 수 있겠나?”
“예, 예! 선배님.”
해수는 다급히 자신의 단검을 꺼내어 가브에게 주었다.
단검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검신의 길이가 30센티가 조금 넘는 검이었다.
가브가 그것을 던지는 자세를 취하자 해수가 움찔했다. 그때 가브가 다시 손을 내리고 해수를 보았다.
“더, 던지셔도…….”
가브는 그에게 시선을 거두고 렘을 보며 말했다.
“오크 힘줄을 구해 오거라.”
“얼마나 구해 올까요?”
“최대한 많이.”
“예, 주군.”
렘은 해수들과 함께 마을로 내려가서 힘줄을 금세 구해 왔다.
가브는 그것을 모두 엮게 했다. 길이가 최소 300미터는 넘을 듯했다.
가브는 힘줄의 끝을 단검 손잡이에 묶고, 오른팔로 그것을 들고 뒤로 힘껏 젖혔다.
검은 비늘로 뒤덮인 근육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흡!”
쐐애액!
오크 힘줄을 단 단검은 무서운 소리를 내며 저 멀리 날아갔다.
* * *
일레이어 숲 깊은 곳, 아히가르족의 거주지.
-꾸!
초록색으로 빛나는 작고 하찮은 그것은 위로 날아올라 단검을 피하고는 두 손을 들어 손사래를 쳤다.
세실리아의 고운 미간이 좁혀졌다. 이곳은 어떤 존재건 자신의 검을 손쉽게 피한다.
쉭, 쉭.
세실리아는 더욱 날카롭게 공격을 이어 갔다.
그것은 요리조리 피하다가 세실리아가 올라가지 못하는 나뭇가지로 이동하여 놀리듯이 휙휙 돌았다.
그러곤 나뭇가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꾸, 꾸!
세실리아는 그것의 행동에 적의가 보이지 않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날개가 네 장이 있지만 하나는 비정상적으로 작았다.
아마도 그동안 그것이 날갯짓을 하고 있어서 제대로 보지 못한 듯했다.
그것의 정체를 추측해 보았다. 인간도 엘프도 곤충도 벌레도 아닌 것, 에리얼이 언급했던 실프.
실프는 고대어로 바람의 정령을 뜻한다.
다른 엘프가 보낸 감시자인 줄 알았는데 하는 짓을 보면 아닌 듯하다.
세실리아는 시선을 실프가 가리키고 있는 나뭇가지로 옮겼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판테르어로 글씨가 쓰여 있었다.
[나도 병신이야.]세실리아는 다시 고개를 들어 실프와 눈을 마주했다. 실프는 미소를 지으며 날개를 파닥거렸다. 그 모습이 그녀의 눈에는 흡사 인간이 조롱하는 듯 보였다.
“이…… 쥐방울이!”
세실리아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실프에게 단검을 휘둘렀다.
실프는 화들짝 놀라 다급히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세실리아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훙.
세실리아의 단검이 실프를 스쳤다. 그것은 마치 물을 베듯이 감촉은 있었지만 몸을 그대로 통과했다.
그러나 타격은 있는지 실프는 기겁하며 뒤로 도망쳤다.
뿌득.
“제길.”
밟고 있던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10미터는 넘는 높이다.
세실리아는 떨어지며 나무를 향해 팔을 휘저었다가 이내 포기하고 충격을 대비했다.
후웅.
땅에 닿기 직전, 바람이 불었다. 바람의 방향이 정상적이지 않다. 아래에서 위로 불어왔다. 그 덕분에 속도가 일순간 낮아졌다.
터덕.
충격을 완전히 없애진 못했지만 완화되어 부상 없이 착지했다.
이 마법을 누가 부렸는지는 뻔했다. 세실리아는 고개를 들어 3미터쯤에 파닥거리고 있는 실프를 보았다.
“네가 실프냐?”
실프는 알아봐 줬다는 것에 기쁜지 두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넌 저 뾰족귀 새끼들 편이 아니야?”
격한 표현에 실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 여기서 나가게 해 줄 수 있어?”
실프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나무에서 왔다 갔다 했다. 그러자 그곳이 파여 글씨가 새겨졌다.
[내 힘으로 안 됨.]세실리아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쓸모없는 것.”
실프가 몸을 축 늘어트리고 고개를 떨구었다.
세실리아는 다시 나무에 올라가 기다렸다. 불이 꺼지지 않는다.
몰래 안을 확인하니 책을 읽거나 가부좌를 틀고 뭐라 중얼거리고 있다.
“저것들은 잠도 안 자나.”
탈출도 체력이 있어야 한다. 세실리아는 나무에 등을 대고 눈을 감았다. 피곤했는지 금세 숨소리가 고르게 변했다.
어디론지 사라졌던 큰 날개 세 장의 실프가 살며시 날아왔다. 그것은 나뭇가지에 살포시 내려앉아 세실리아의 발끝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으음.”
세실리아가 움찔하자 실프도 화들짝 놀라 위로 휙 날아갔다.
다음 날, 햇볕이 들자 엘프들이 하나둘씩 나뭇잎 집에서 나와 돌아다녔다.
큰 나무 앞에 돌을 둥글게 쌓아 올린 아궁이 같은 곳에 불을 피우더니, 숲 안쪽에서 잡아 온 것으로 추측되는 멧돼지를 구워서 먹었다.
꼬르륵.
세실리아는 그제야 자신이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넓적한 나뭇잎에 고인 새벽이슬 몇 번 마신 것이 전부였다.
엘프들은 야무지게 돼지고기를 뜯어먹고는 한 군데에 모여 훈련했다.
인원은 대략 백 명, 훈련에 참가하지 않은 자들은 거의 없는 듯했다.
‘엘프들의 씨가 말랐군.’
그들은 하나같이 에리얼이라는 엘프처럼 빠르고 검술이 뛰어났다.
가장 뒤처지는 자도 최소 1급 해수의 실력을 지닌 듯했다.
특히 앞에서 훈련을 지도하는 푸티엘은 실력을 가늠할 수 없었다.
보조로 지도하는 자들도 열 명이 있는데, 그중에는 에리얼도 포함되어 있었다.
‘활은 폼인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검술 훈련에만 몰두하고, 등에 메고 있는 활은 전혀 쓰지 않았다.
쉬는 시간, 엘프들은 물로 땀을 닦아 내거나 마시며 자기들끼리 잡담을 나누었다.
외모는 하나같이 젊다. 1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 마치 외모로 뽑는 귀족들의 아카데미를 보는 듯했다.
“에리얼은 교관 자리를 내려놔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게. 그 까만 머리 인간한테 죽을 뻔했잖아. 나 같으면 쪽팔려서 마을로 돌아간다.”
“그렇게 잘난 체를 하더니…… 쯧쯧.”
“아버지가 너무 감싸시니까 콧대만 높아진 거야. 내가 항상 말했잖아, 실력에 비해 너무 고평가되었다고.”
갑자기 조용해졌다. 에리얼이 그 옆을 지나간 탓이다. 얼굴이 잔뜩 굳은 것이 이미 모두 들은 듯했다.
무리 중 한 명이 에리얼에게 손을 들어 올리며 말을 걸었다.
“에리얼, 목 괜찮아? 교관 계속할 수 있겠어?”
에리얼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휙 돌아갔다.
“닥쳐, 씨발아.”
세실리아가 했던 발음을 그대로 구현한 에리얼의 욕에 상대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일그러졌다.
“뭐, 머? 씨…… 뭐? 발?”
에리얼은 그의 반응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그곳을 벗어났다.
‘기회다.’
혼자 무리에서 이탈한다. 실력도 알고 있는 상대, 이보다 더한 기회는 없다.
속도로는 안 되지만 은신술은 자신 있다. 암습하여 발목 하나만 잘라 기동력을 없애고 길잡이로 쓴다.
세실리아는 숨을 죽이며 에리얼의 뒤를 쫓았다.
턱.
에리얼이 돌연 가던 길을 멈춰 섰다. 그녀는 평소와는 달리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얘기했었나? 아히가르족에서 전투 엘프가 되려면 실프와 계약해야 해. 실프와 계약하면…… 뒤에도 눈이 달린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녀가 날카롭게 소리치며 검을 뽑아 뒤로 휘둘렀다. 검에 새겨진 문자가 순간 하얗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후웅!
그러자 그녀에게로부터 시작된 바람이 부채꼴로 뻗어 나가며 숨어 있던 세실리아를 덮쳤다.
세실리아는 다급하게 근처에 있던 나뭇가지를 잡았지만 강력한 풍압에 그것도 부러지며 같이 날아갔다.
타닥.
세실리아는 10여 미터 날아가 바닥에 간신히 착지했다. 나뭇가지와 돌 부스러기에 긁혀 얼굴에 피가 흘렀다.
“요망한 재주가 있군.”
“너랑 놀 기분 아니니까 꺼져.”
“미친년.”
세실리아는 냉소를 흘리며 그녀에게 쏘아져 나갔다.
검을 휘두른 방향을 따라 부채꼴로 점점 더 커지는 바람 마법, 가까이 붙을수록 폭이 좁아지니 피하기도 쉬울 것이다.
“꺼져!”
후웅!
그녀가 검을 횡으로 넓게 휘둘렀다. 이전보다 풍압은 약하지만 그 범위가 어마어마했다.
나뭇잎이 뜯기고 흙바닥의 가죽이 뒤집히며 나뭇가지가 부러져 나갔다.
세실리아는 옆으로 피하다가 바람이 가까워졌을 때 바닥에 딱 붙어 날아가는 것을 면했다.
‘넌 끝이다.’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지 도망치지 않는다.
세실리아는 다리에 더욱 힘을 줘서 폭발적으로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둘의 거리가 급격히 좁혀졌다.
채쟁, 챙, 챙!
세실리아의 단검과 에리얼의 검이 어지럽게 부딪혔다. 단검은 초근접전에 유리하다.
거리를 빼앗긴 에리얼은 세실리아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스걱.
“아얏.”
순식간에 에리얼의 손가락과 손목이 베였다. 그로 인해 검병을 쥔 손에 힘이 풀렸을 때 세실리아가 그녀의 검을 발로 찼다.
티잉!
“거슬리는 건 치웠고.”
터덕.
에리얼은 맨손을 휘적거렸고 세실리아는 손쉽게 두 손을 봉쇄했다.
“감히 더러운 피가 섞인 주제에……. 진짜 죽고 싶구나?”
세실리아는 단검의 끝을 그녀의 목에 가까이 가져가며 스산하게 말했다.
“네 목을 잘라도 그 늙은이가 다시 붙일 수 있을까?”
에리얼은 순간 깃든 공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곤 이내 인상을 확 찌푸리고 무릎으로 세실리아를 밀며 거리를 벌렸다.
세실리아는 그녀를 협박하느라 발목을 베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러나 다행이도 에리얼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등에 멘 활을 꺼내어 들었다.
“우리가 왜 검술만 훈련하는지 알아?”
그녀는 깃이 나뭇잎으로 된 화살을 먹이며 말했다.
“활은 더 이상 수련할 필요가 없어서야.”
핑.
세실리아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화살이 관자놀이를 스치며 머리카락 몇 가닥을 끊고 지나갔다.
이상하다.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화살이 도착했다. 상식을 넘어선 속도다.
이미 가까이 왔을 때는 늦는다. 활시위를 놓았을 때 피해야 한다.
“잘못됐다 싶지? 활 든 김에 네 폐에 구멍 하나 뚫어 주지. 걱정 마. 죽이진 않을게.”
피빙, 핑.
화살을 먹이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세실리아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화살을 피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슥.
그때 화살 하나가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공할 속도만큼 가죽은 손쉽게 찢어 버리는 관통력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화살이 휘어져?’
마치 화살에 눈이 달린 것처럼 따라오는 것이다. 직각으로 꺾일 정도는 아니지만 예측을 벗어나니 피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핑!
또다시 들려오는 소리, 당황한 사이 소리를 먼저 들었다는 것은 이미 늦은 것이다.
서슬 퍼런 화살촉이 이미 코앞까지 다가왔다.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위치는 소름 돋게도 그녀가 말했던 폐가 있는 부분이었다.
사고와는 달리 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시간도 되지 않던 그때.
팅.
검신이 유독 긴 단검이 날아와 화살의 허리를 자르고 나무에 박혔다.
퍽-.
가드가 없는 단검은 검신에 이어 손잡이까지 절반이나 나무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 끝에는 붉은색의 오크 힘줄이 묶여 있었다.
* * *
푸티엘은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들었다. 아히가르족 전투 엘프들의 거점은 두 개의 방어막이 설치되어 있다.
하나는 눈과 발을 속이는 환상 마법, 또 하나는 광범위하게 펼쳐진 강력한 실드 역할의 결계였다.
결계는 푸티엘의 정신과 이어져 있었다.
‘결계가 깨졌다.’
푸티엘의 얼굴에서 심각함을 인지한 엘프들이 조용히 검을 들고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곧이어 정찰병이 다급히 달려왔다. 푸티엘은 참지 못하고 먼저 물었다.
“오크 로드인가?”
“그것이, 마물도…… 인간도 아닌 것 같습니다!”
모호한 대답에 푸티엘이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작은 문자가 빼곡히 새겨진 활을 빼 들며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정예 전투 엘프들이 기세등등하게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