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128
128화
따닥, 딱, 타닥-.
가브는 화로 앞에서 이글거리는 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피페로를 생채기 하나 나지 않고 제압할 수 있는 실력자.
철저하게 기운을 갈무리할 수 있는 능력자.
누구의 편인지 모를 위험 인자.
‘제거해야 하나.’
가브는 옷을 들춰 왼쪽 가슴을 보았다. 마지막 환상성이 여전히 옅은 빛을 내며 가만히 멈춰 있다.
‘방출해야 하나.’
그녀를 버리는 것도, 데리고 있는 것도 주변인들에게 해가 될 수 있으니 고민이 끝나지 않는다.
“주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세실리아.”
항상 차가움을 유지하려는 그녀의 눈빛에 걱정이 담겨 있다. 그것을 본 가브는 오묘한 감정이 일었다.
검이나 창에 찔리거나 내장이 쏟아진 것도 아닌데 타인이 이렇게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을 보니 신선했다.
“있다. 고민이…….”
가브는 세실리아의 흑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신기할 정도로 자신의 고민을 깨끗하게 털어놓았다.
세실리아의 대답은 금세 나왔다.
“말할 수 없는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비밀이 하나쯤 있지 않습니까?”
“그 비밀 때문에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도?”
“비밀은 언제나 상대적이니까. 주군에게는 별거 아니라고 해도 힐에게는 목숨보다 소중할 수 있습니다.”
세실리아는 눈을 들어 가브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그 아이의 중심을 보십시오. 힐이 우리를 해칠 것 같습니까? 아니면 우리 곁에 남고 싶어 합니까? 주군의 혜안은 그 아이의 비밀을 듣지 않아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실리아의 확신에 찬 눈빛에 가브는 절로 고개를 끄덕여졌다.
* * *
“들어간다.”
끼익-.
문을 열자 힐 아슈가 벌떡 일어나 구석에 붙어 이불을 끌어안았다.
마치 어디로 잡혀가기 직전인 것만 같았다.
가브는 그녀 앞으로 의자를 끌고 와서 앉았다.
힐의 얼굴에서 옆으로 흐른 마른 눈물 자국이 눈에 띄었다.
“힐 아슈.”
가브의 목소리의 온도가 전보다 따뜻하자 힐의 눈가가 다시금 촉촉해졌다.
“절 버리실 건가요?”
가브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심장을 후벼 팠다.
열 살 때 세상이 멈춘 소녀가, 사랑을 듬뿍 받아도 모자랄 소녀가 언제 버림받을지 몰라 두려워하는 모습이 감정을 건드렸다.
가브는 스스로 무뎌졌던 자신의 감정에 놀라며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너에게는 우리가 소중한가?”
의미심장한 질문에 힐은 가만히 가브를 보다가 침을 꼴깍 삼키고는 질문했다.
“당신은요? 가브 씨에게 나는?”
가브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감정을 그대로 내뱉었다.
“소중했으면 한다.”
툭.
가브의 진심에 힐의 눈에서 맑은 물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눈물을 왈칵 쏟아 냈다.
“나는, 나는 버림받고 싶지 않아요. 나는…… 당신들 곁에 있고 싶어요!”
그녀의 절박한 외침에 가브의 손이 들어 올려졌다. 그 두껍고 큰 손이 힐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었다.
툭.
가브의 손이 힐의 머리에 얹히자, 그 묵직한 무게감에 고개가 절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보다 묵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알았다.”
* * *
히스의 용병들은 개개인의 실력은 뛰어나나 그 전투 방식이 매우 악랄하고 생존과 이득 위주이기에 효율이 없다.
가브는 케레스의 저택 뒤편을 깔끔하게 밀어 연병장을 만들고, 그곳에 케레스의 부하들이었던 검사들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시키기 시작했다.
훈련은 발튼이 오기 전까지는 리온느가 맡고 있었다.
“더 내려가십시오! 더!”
“아우, 썅, 이러다 뒈지겠네.”
“진짜 뒈지게 해 줄게.”
“뭐, 뭐! 아악!”
오늘도 한 명의 팔이 부러졌다. 훈련병들은 자신의 인성을 어디 버리지 못하고 하루에 한두 명씩 리온느에게 박살 나는 중이었다.
“눈 돌리지 마십시오. 손가락 떨지 마십시오. 그렇게 휘두르면 방금 다리 한쪽이 잘린 겁니다.”
지난번에 데려온 해수 네 명은 부관으로서 피와 눈물을 쏙 빼는 훈련을 잘 시키고 있었다.
“음…….”
가브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할 일을 생각했다.
그때, 훈련병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연병장에 자주 나타나기에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세실리아가 등장한 것이다.
“주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저 때문에 해수들의 수색이 중지된 걸로 압니다. 제가 가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세실리아는 실프와의 계약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곤 해도 그 이후로 항상 임무에 실패한 것이 마음에 걸렸었다.
그녀의 말에 리온느의 그림자에 숨어 있던 렘이 튀어나와 이쪽으로 다가왔다.
“제 실수입니다. 같이 다녀오겠습니다.”
그때 부관 해수 한 명이 다가왔다.
“저희가 떠나기 전에 미리 연락망에 소식을 남겨 놨습니다. 길이 엇갈리실 수 있으니 조금 기다리다가 찾으러 가심이 어떠십니까?”
가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렘을 보았다.
“그래…… 렘, 언제부터 리온느에게 붙어 있었지?”
마나를 깨닫고 기감이 말도 안 되게 민감해졌는데도 꽤 가까운 렘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항상 은신 수련을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점점 더 뛰어나지는 렘이었다.
적이 된다면 가장 조심해야 할 존재다.
“도착하고 난 뒤에……. 같이 오셨던 분들에게 이리저리 옮겨다니고 있었습니다.”
세실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반응에 렘은 건조한 눈이 살짝 커지더니 조금 빠르게 말을 이었다.
“세실리아 선배님에게는 가지 않았습니다, 네비아 여신께 맹세코.”
가브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보면 네비아 교단 사제인 줄 알겠군. 넌 이제부터 세실리아와 하루에 두 시간씩 대련으로 검술을 강화한다. 장소는 알아서 찾고.”
렘이 소리 없이 놀라며 세실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바람검 세르크의 검병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마침 상대가 필요했는데……. 두 시간으로 되겠습니까? 여덟 시간씩 하겠습니다.”
가브는 손을 휘휘 저어 둘을 보냈다.
다음 날, 가브는 처음으로 렘이 침대에서 지쳐 쓰러져 잠든 모습을 보았다.
* * *
며칠 뒤, 히스의 수문장인 사자 머리 빌헬트는 신기한 무리와 마주했다.
저벅저벅저벅.
햇빛이 반사되지 않는 검은 천옷에, 양손에는 무기 하나 들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풍기는 기운이 예사롭지가 않아 함부로 다가갈 수가 없었다.
“통행료, 두당 50실버. 열 명이니까 4골드로 깎아 줄게.”
빌헬트의 말에 사내 한 명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러곤 건조한 표정으로 품에 손을 넣는 순간, 빌헬트는 뒤로 물러나며 도끼를 꺼내어 들었다.
잊을 수 없는 그 특유의 기운, 그와 너무 닮았다.
빌헬트는 도끼를 강하게 쥐며 물었다.
“살수 놈들이구나. 그 손 내려.”
그의 말에 사내가 손을 천천히 빼서 아래로 내렸다. 손에는 금화 네 개가 들려 있었다.
빌헬트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나, 과민반응인 거야?’
그때 사내가 입을 열었다.
“살수 맞소. 가츠 님을 뵈러 왔소.”
가츠라는 말에 빌헬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 *
빌헬트에게 소식을 들은 가브는 저택에서 한참 마중을 나와 해수들을 맞이했다.
그 수는 열 명, 눈에 익은 1급 해수가 둘에 나머지는 2급이었다.
이제 리온느를 포함하여 해수가 총 열다섯 명이 되었다.
“선배님을…… 뵙습니다.”
“선배님을 뵙습니다.”
“가츠 님을 뵙습니다!”
쪽지 하나로, 자신의 이름만 보고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찾아와 준 자들이다.
가브는 말없이 다가가 그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잘…… 왔다. 이제부터 여기가 너희의 보금자리다.”
몇 명이 해수들답지 않게 어깨가 살짝 떨렸다.
사해가 와해되고 난 뒤에 해수의 마음가짐을 잃어버린 탓이 클 것이다.
미리 와 있던 해수들도 달려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아직 재회가 끝나지 않았을 때, 저 멀리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한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에는 연한 녹색 머리칼에 에메랄드 같은 눈동자를 지닌 여인이 있었고, 그 옆에는 앉은키도 여인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덩치가 보였다.
성벽을 쌓을 돌을 구하러 간 발튼과 이엘이 귀환한 것이다.
“쥬군!”
발튼이 크게 외치며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가브는 자신도 모르게 마주 손을 들다가 멋쩍게 내렸다.
그런데 발튼과 이엘 사이에 낯익은 얼굴이 스쳤다. 가브는 고개를 기울이며 그 뒤를 확인했다.
하얀색 짧은 머리, 고집스러운 입, 강직한 턱, 자잘한 흉터. 생각지도 못했던 얼굴이다.
가까이 다가온 위케리스는 가브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주군! 늦었습니다!”
“가츠 아이드 각하를 뵙습니다!”
위케리스와 특무대원들이다.
가브 일행이 크레아 왕국으로 향했을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제국을 탈출하여 가던 중 위기에 처한 마을을 보고 도우러 갔다가 발튼과 조우하게 된 것이다.
가브는 자신을 찾기 위해 대륙을 돌아다녀 결국 여기까지 온 특무대를 보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가지고 싶지 않아 미리 쳐 냈던 책임감이라는 감정이 묵직하게 들어찼다.
가브는 주먹을 꽉 쥐고 해수들과 특무대원들, 히스의 용병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무미건조한 가운데 보기 드물게 꿈틀거리는 그의 표정에, 그가 벅차올라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들은 없었다.
사람들은 절로 가브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드디어 가브가 입을 뗐다.
“들어가자.”
“예?”
“들어가자고. 바로 씻어라.”
“예, 옙. 쥬군.”
발튼은 자신의 옷의 냄새를 맡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가브는 죽을 고비를 넘기며 자신을 찾아온 이들을 보며 굳게 다짐했다.
‘견고한 성을 세우겠다. 그 누구도 무너트릴 수 없는 성을…….’
* * *
한편, 저 멀리서 가브와 그의 무리의 모습을 몰래 지켜보는 한 청년이 있었다.
스슥, 스슥-.
가브의 뒤를 따라가는 청년의 움직임은 고양이처럼 은밀하고 날렵했다.
‘어디 한번 보자. 네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자의 배를 갈라 내장을 잘근잘근 씹어 주마…….’
그는 제국에서 가브에게서 팔 하나를 떼어 주고 간신히 도망쳤던 도플갱어였다.
그 이후로 수십 명을 잡아먹어 마나와 신체 능력을 더욱 증가시켜 자신감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그는 가브가 머물고 있는 저택에 하인으로 들어가 유심히 살폈다.
“이봐! 청소 빨리빨리 안 해? 언제까지 복도 청소만 할 거야?”
“아, 예예. 죄송합니다. 빨리할게요.”
‘젠장, 가브를 처리하면 내가 저 집사의 목부터 비틀어 버린다. 그나저나…… 대체 누굴 아끼는 거지?’
며칠 살펴본 결과, 가브는 항상 같은 얼굴과 같은 어조로 사람들을 대하여 누굴 소중히 여기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집무실에 자주 들르는 사람들이 있지만 서로 매우 사무적으로 보였다.
‘그냥 가까이 갈 수 있는 사람의 몸을 차지해서 확 죽여 버려?’
가브에게 소중한 사람이 없다고 판단한 도플갱어는 방금 집무실을 나서는 세실리아의 뒤를 몰래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