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132
132화
삭막한 골짜기, 마물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고블린과 코볼트는 물론이고 오크와 트롤, 오우거까지도 섞여 있는 유례없는 마물 군단이었다.
그 너머 언덕에서는 황소 크기의 새까만 쿠거들과,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두에 있는 기사는 면갑에 길게 붉은 깃이 꽂혀 있었다.
그는 손을 내려 쿠거의 목을 매만지며 작게 입을 열었다.
“쿠베라, 부탁한다.”
-크르르.
쿠베라가 낮게 울었다. 디마는 비장한 눈을 하고 거대한 대검을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아슈의 기사들이여! 돌격하라!”
“돌격하라!”
투두둑, 투두둑, 투두둑!
쿠거들의 굵직한 근육이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쿠거들은 제국 최고의 기사들을 태우고 그보다 수백 배는 더 많은 마물들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콰광, 쾅, 쾅!
-캬오오!
쿠거들은 몸통 박치기와 두꺼운 앞발로 마물들의 몸통을 찢어발기며 전진했다.
기사들은 그 위에서 검이 아닌 창으로 앞에 있는 적들만 치웠다.
후웅, 훙!
그중에서도 디마의 활약은 단연 빛이 났다. 그는 검 끝에 마나를 실어 던지는 검기를 연속으로 사용하며 길을 뚫었다.
붉은달 기사들은 이미 디마의 뜻을 따를 때부터 결사의 마음이었다.
목숨을 불사르는 그들의 돌격은 무섭게 일직선으로 오크 로드에게 다가갔다.
디마와 붉은달 기사단은 금세 오크 로드가 있는 곳에 도달했다.
보통 오크들보다 덩치가 더 크고, 강철갑옷을 입은 오크 친위대가 그 앞을 견고하게 막고 있다.
“전하! 길을 열겠습니다!
“죽어, 이 자식들아!”
기사들은 몸을 던져 친위대를 막아섰고, 디마는 드디어 오크 로드를 마주했다.
오크 로드는 전에 만만찮은 실력으로 자신을 후퇴하게 만들었던 디마를 기억했다.
-카루, 쿠지트바!
이미 붉게 빛나고 있던 놈의 두 손이 디마에게 향했다.
“큭!”
강력한 열기가 디마를 덮쳤다. 그는 오크 로드의 마법을 쳐 내지 않고 온몸으로 맞으며 그 안쪽으로 검기를 실은 검을 쭉 뻗었다.
콰장창!
폭을 좁혀 위력을 높인 검기가 마법을 찢고 실드를 깨부수고 오크 로드의 가슴을 관통했다.
푹-!
디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혼신의 일격이 실패했다. 상처가 얕다.
양쪽과 뒤에는 이미 마물들에게 사지가 해체된 기사들의 팔다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지옥으로 가자!”
디마는 사방에서 덮쳐 오는 오크 친위대를 무시하며 오크 로드의 목을 향해 검을 다시금 휘둘렀다.
디마의 우직한 검이 오크 로드의 목을 반쯤 파고들었을 때, 무형의 기운이 그를 덮쳐 왔다.
쩌정!
디마는 홀로 공중에 붕 떠오르며 뒤로 날아갔다. 지상에 우글거리는 마물들이 보인다.
착지를 준비해야 하는데 충격에 손가락도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곧이어 그의 몸은 마물들을 깔아뭉개며 바닥에 떨어졌다.
쿠구궁!
떨어짐과 동시에 마물들이 덮쳐 올 줄 알았는데, 낯익은 얼굴이 바로 앞에 생겨났다.
별처럼 찬란한 은빛 머리칼, 창백한 피부, 장난스러운 미소.
“전하……?”
디마는 혼란스러웠다. 눈앞의 상대는 자신의 손으로 죽인 왕 론 아슈였다.
론 아슈는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로 디마를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하찮은 것들 틈에서 빛을 내더구나. 제법이야.”
* * *
세피아 왕국 국경에 걸쳐 있는 숲.
세실리아는 몸을 휙 돌리며 인기척이 들리는 곳으로 검을 겨누었다.
스슥, 스슥.
허리 높이까지 오는 수풀을 헤치며 모습을 드러낸 자는 진갈색 가죽코트를 입고 있는 가브였다.
“주군?”
가브는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트롤들의 사체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한가롭군.”
“죄송합니다.”
“죄송해야지, 얼마나 찾았는데.”
세실리아는 검을 검집에 넣으며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가면서 얘기하지.”
“예, 주군.”
가브는 바로 몸을 돌리려다가 말고 세실리아를 쳐다보았다.
바로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흔치 않은 모습에 세실리아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어디…… 아프십니까?”
세실리아는 물으면서도 상대에게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라고 생각하며 피식했다.
가브는 검집을 꽉 잡고 용기 내어 물었다.
“세실리아, 체력은 충분한가?”
“예? 아, 예.”
“그럼…… 날 업고 가도록.”
세실리아는 헛웃음이 나올 뻔한 걸 참았다. 가브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가브는 귀환하자마자 세실리아의 몸을 살펴야 하기 때문에 마나와 체력을 아끼려는 것이다.
지금도 사흘간 잠을 청하지 못했다. 효율을 위해서 자존심을 버린다.
세실리아는 가브의 낯선 모습에 장난기가 발동했다.
“명령이십니까?”
“못 들은 걸로 하지.”
가브가 확 돌아서서 걸음을 옮기자, 세실리아가 그 앞으로 달려가 등을 내밀어 그를 업었다.
그러곤 그의 두 손을 잡아당겨 목에 감고 바닥을 박찼다.
“꽉 잡으십시오!”
뒤에서 보면 마치 이불을 휘감은 것처럼 세실리아의 몸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지만, 그녀는 아주 안정감 있고 빠르게 숲을 달려갔다.
세실리아도 눈치가 있기에 히스에 도착하기 전에 내려 주었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가브는 바로 세실리아를 불렀다.
“씻고 바로 집무실로.”
“예, 주군.”
세실리아는 차 한잔 마실 시간에 머리까지 싹 감고 실프의 힘으로 뽀송뽀송하게 말린 뒤 집무실을 찾아갔다.
가브는 바로 일어나 그녀를 구석에 있는 침상으로 데리고 갔다.
“코트는 벗고, 여기 누워라.”
가브의 거침없는 요구에 세실리아는 순간 당황했다. 절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왜 그러지? 혹시 부상을 당했나? 열이 있나?”
“아, 아닙니다.”
가브의 사무적인 반응에 세실리아는 재빨리 코트를 벗고 침상에 곧게 누웠다.
“실프와 계약했다고 너무 몸을 굴리지 마라.”
“예…… 주군.”
가브는 그녀의 몸 위에 반 뼘 정도 띄워서 손을 올렸다.
예상했던 대로 그녀의 몸에는 마나가 고루 깃들어 있었다.
은신이라는 특수성 덕분에 피부에도 마나가 깃들어 있는 렘보다도 그 총량이 월등히 많았다.
마나로 그녀의 몸을 한 바퀴 휘저어도 골고루 퍼지게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좋군.”
“주군……?”
가브는 말없이 두 손을 크게 휘저으며 그녀의 마나를 움직였다.
세실리아는 마나의 변화를 느끼고 재빨리 눈을 감고 집중했다.
가브는 이 작업을 ‘마나 일체화’라고 명명했다.
그렇게 성벽이 쌓일 동안 세실리아와 발튼, 렘의 몸에 마나 일체화 작업을 하여 그들의 발전에 기여했다.
‘발튼은…… 아직 멀었고.’
발튼은 마나 일체화 단계까지 오지도 못했지만 발전 가능성이 가장 컸다.
‘렘은 일어나야 효과가 좋겠군.’
렘은 세실리아만큼이나 마나가 고루 분포되어 있지만, 훈련을 하지 못하여 조금 더뎠다.
‘역시…….’
세실리아가 가장 순조롭고 빠르게 마나 일체화가 진행되었다.
며칠 만에 몰라보게 강해져, 벽돌을 발튼보다도 더 빠르게 많이 쌓았다.
가브는 그녀가 벽돌을 두 개씩 얹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 렘이 병상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빛은 평소와 달리 초롱초롱했다. 한 달 동안 누워만 있었지만 전과는 확실히 달라진 몸에 자신감이 차 있었다.
그가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은…….
“세실리아 선배님, 대련을 청합니다.”
“기다렸다. 가자.”
한적한 대련 장소를 찾아 길을 떠나는 둘의 발걸음은 서로 다른 이유로 날듯이 가벼웠다.
가브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지나가는 발튼을 불러 세웠다.
“발튼, 따라와.”
“예? 옙, 쥬군!”
발튼의 경우, 급한 대로 무기를 주로 휘두르는 오른팔 위주로 마나 일체화 작업을 했다.
덕분에 현재 오른팔에 깃든 마나 조각은 하나의 덩어리에 가장 가까웠다.
연병장에 도착한 가브는 전처럼 방패 두 개를 겹쳐서 그 옆면을 잡고 발튼에게 내밀었다.
가브가 왼팔로 든 것을 보고 발튼도 왼팔을 들어 그것을 잡았다.
“오른팔로.”
“네, 넵.”
발튼이 머쓱해하며 오른팔로 잡자마자 가브가 바로 힘을 줬다.
“버텨.”
“흡!”
우지직-.
서로가 힘을 주자마자 방패 두 개가 종잇장처럼 확 우그러졌다.
발튼도 이런 결과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멍하니 자신의 오른팔을 보았다.
가브는 주변에 대체할 것을 둘러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발튼도 손을 마주 내밀어 깍지를 끼고, 다른 손은 뒷짐을 진 채 밀기 시작했다.
지지지직-.
시작하자마자 가브의 몸이 속절없이 밀렸다.
터덕!
그는 발을 바꾸며 중심을 다잡고 더 많은 마나를 왼팔에 집중시켰다.
“크흐…….”
발튼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징그럽게 튀어나온 팔뚝 근육과 힘줄, 핏줄이 그의 상태를 짐작케 했다.
우두둑!
“끄윽!”
발튼이 힘이 빠진 순간, 어깨뼈가 밀리며 손가락뼈도 뒤로 넘어갔다.
가브는 고통스러워하는 그에게 바로 붙으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가만있어.”
“예, 옙. 큭…… 여, 역시 저의 쥬군이심니다!”
가브는 말없이 그의 뼈를 맞췄다.
몸 전체 마나의 5할 이상을 왼팔에 집중시켜서야 그와 동수를 이뤘다.
마나를 깨닫기 전이라면 무조건 밀리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을 추켜세우는 발튼을 보며 가브는 마음이 복잡 미묘해졌다.
‘그동안 수련을 너무 게을리했군.’
그때 렘이 세실리아에게 업혀 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가브와 눈이 마주치자 뭘 훔쳐 먹다 걸린 것처럼 뜨끔해했다.
“부상인가?”
“혼절입니다.”
“물 뿌려.”
“예, 주군.”
세실리아는 바로 렘을 눕히고 착실하게 가브의 명을 이행했다.
촤아악!
찬물에 벌떡 일어난 렘은 세실리아와 다시 대련을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그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 * *
가브는 바다 끝부터 끝까지 이어진 성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래 봤자 3킬로미터가 넘지 않는 길이다.
‘높이가 낮지만…….’
일에 박차를 가하자 벌써 성벽이 외관상으로는 거의 완성되었다.
본래 생각한 높이인 20미터의 절반도 되지 않는 7미터로 정하여 급히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때 사내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와…… 쟤가 걔?”
“나는 실제로 처음 본다.”
“피페로가 반할 만하네…….”
가브는 누가 오는 것인지 예상하며 고개를 돌렸다.
힐 아슈가 신비로운 은발을 흩날리며 성벽 계단을 올라오고 있다.
무엇이 급한지 두 손으로 더듬거리며 빠르게 올라오고 있었다.
“읏.”
그러다 발목을 한번 접질리자 그녀를 지켜보던 사내들은 자신들의 다리가 잘린 것처럼 안타까워했다.
힐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올라가 가브와 마주했다.
“그가, 그가 오고 있어요! 가까워요! 아주 가까워요!”
항상 평온했던 그녀의 얼굴에 조급함이 가득했다.
가브는 자연스레 오크 로드를 떠올리며 고개를 성벽 너머로 돌렸다.
저 멀리, 하늘이 뿌옇다.
지평선에 걸친 새까만 무리가 보인다.
덜커덕, 덜커덕, 덜커덕.
그 선두에 검은색 쿠거를 탄 기사들이 보였다.
진녹색과 적색이 뒤섞인 피를 갑옷에 잔뜩 묻히고, 오른손에는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은 검을 들고 있다.
갑주와 무기가 엉망이지만 그들 특유의 강렬한 기운은 멀리서도 전해졌다.
제국 최고, 아니 대륙 최강의 기사들이라 불리는…….
“붉은달…… 기사단.”
그들의 면갑 안의 눈동자는 흰자까지 새까맣게 변하여 번들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