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134
134화
디마는 번쩍 눈을 떴다.
낯선 천장, 흔들리는 외부, 마차 안이다.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기억을 되짚던 중, 낯익은 사람이 얼굴을 드러냈다.
“깨어났소?”
새하얀 로브에 새하얀 머리, 현기가 도는 깊은 눈동자, 마법사 펜릴이었다.
그 주변으로 한 번쯤 보았던 다른 마법사들도 몇 명 보였다.
“읍.”
디마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실패했다. 펜릴은 그를 자제시키며 눈으로 배를 가리켰다.
“움직이지 마시오,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니.”
디마의 배에는 커다란 구멍이 두 개나 뚫려 있었다. 출혈은 잡았지만 언데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디마는 통증을 애써 외면하며 입을 뗐다.
“붉은달, 제 단원들은…….”
펜릴은 그와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두 숨을 쉴 때까지 기다리다가 입을 열었다.
“후작이 알고 있겠지요.”
디마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남았다는 것을.
그 절망적인, 처절한 기억을 본능적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디마는 다시 완전히 누워 눈을 감았다.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던 눈물이 흘러내려 머리를 적셨다.
“나는…… 왜 살리셨습니까?”
싸늘한 어조에 펜릴은 뚱하게 대답했다.
“사람을 살리는 데 이유가 있나?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구했고, 나머지는 못 구해서 안타까울 뿐이지.”
펜릴의 시선이 디마에게서 떨어져 창문 밖으로 향했다.
“마음 잘 추스르고 계시오, 우리는 일이 있으니.”
마차가 이내 멈췄고, 펜릴과 마법사들은 지팡이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 * *
히스 입구, 수를 셀 수 없는 마물들과 사람들이 성벽을 사이에 두고 처절한 전투를 치르고 있다.
저 멀리서 무언가가 반짝인다. 성인의 머리통만 한 화염구다. 그것이 마물들을 가로질러 성벽으로 향했다.
‘젠장.’
가브는 마음이 급했다. 방금 전 세실리아가 화염구를 쳐 낸 것도 기적적인 일이었는데, 기적이 또 일어날 리 없다.
그는 화염구의 도착 지점을 예측하며 허공에 최대한 넓게 실드를 만들었다.
성인 다섯 명 정도의 크기를 만들었을 때, 화염구가 들이닥쳤다.
콰아아앙!
얇디얇은 실드가 깨지며 화염이 사방으로 퍼졌다.
실드 안쪽으로는 열기밖에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 앞의 마물들과, 옆의 성벽에 올라서 있는 용병들에게는 화염이 퍼졌다.
“으아아악!”
“이, 이거 왜 안 꺼져!”
가브는 불에 피부가 녹아내리는 이들을 돌볼 수가 없었다.
언제 또 화염구가 날아올지 모르니 다시 실드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세실리아는 바쁘게 돌아다니며 망토로 불을 껐다.
쿠구구궁!
그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쪽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마물들은 불이 붙은 상태로 몸을 밀고 들어왔다. 한 번에 오크 스무 마리가 지나가도 될 정도의 크기였다.
-카루 구카!
-그아아아!
소름 돋는 포효에 성벽에 붙어 싸우던 다른 마물들도 방향을 꺾어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성벽이 무너졌다!”
“막아라!”
“막아야 해!”
성벽 뒤에 있던 용병들은 물론 위에 있던 용병들도 몇몇이 뛰어내리며 쏟아져 내리는 마물들과 몸을 부딪쳤다.
붉은색과 진녹색 피가 난무하는 전장에서 처절하게 전투를 치르다 보니 용병들의 눈빛에 독기가 생겼다.
후퇴할 곳이 없다는 결사의 각오 효과가 이제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우거는 말할 것도 없고, 트롤이나 오크 역시 웬만한 검사들이 혼자 상대할 수 없었다.
점점 안쪽에 마물들이 확산되는 중에, 성벽 위에서 누군가가 뛰어내렸다.
“비켜, 비켜!”
도끼는 등에 메고, 두 개의 방패는 양손에 각각 든 발튼이었다.
그는 방패를 앞세우며 마물들에게 돌진했다.
“다 디져라!”
콰광, 쾅쾅쾅!
그의 무지막지한 괴력에 마물들이 튕겨 나갔다. 백 킬로가 넘는 오크는 물론 트롤도 공중에 떠올랐다.
튕겨 나갔다고 마물이 죽는 것은 아니다. 일시적으로 자리에서 강제 이탈될 뿐이다.
푹!
바둥거리며 일어나려는 오크의 머리통에 검이 꽂혔다.
특무대 대장 위케리스였다. 그 뒤로 특무대 열 명이 바짝 따라붙었다.
“교관님! 돕겠습니다!”
그들의 활약으로 용병들이 힘을 얻어 마물들을 압박해 갔다.
다시 성벽이 무너진 곳까지 밀고 있는 중에 발튼에게 날카로운 공격이 들어왔다.
채앵!
발튼은 다급히 공격을 쳐 내고 연속으로 그곳에 방패를 뻗었다. 그러나 상대가 금세 빠져 허공만 찼다.
“윽!”
“조심해!”
특무대에게도 동시에 위협이 들이닥쳤다.
처음에 보았던, 히스의 용병들을 두려움에 빠지게 했던 존재들, 붉은달 기사단의 등장이었다.
그들을 상대하는 동안 다시 길이 열리며 마물들이 들어왔다.
실드를 만들면서 주변을 살피던 가브가 세실리아에게 외쳤다.
“내려가!”
다시 바람을 일으킬 수 있어 성벽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세실리아는, 가브의 명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가브는 아까보다 배는 더 커다란 실드를 만들며 오크 로드를 주시했다.
그때, 진동이 일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드드드드, 드드드.
가브는 물론 히스의 용병들도 불안감에 주변을 살폈다.
진동과 소리는 점점 더 커지더니, 이내 성벽 양쪽에 바닷물이 위로 솟구쳐 올랐다.
촤아아아아-!
성벽 높이의 몇 배에 달하는, 바닥에 있는 바닷물을 모두 끌어모은 듯한 물의 벽이 생겨났다.
그 장엄한 자태에 용병들은 물론 마물들마저도 잠시 경직되어 그것을 쳐다보았다.
이런 마법을 쓸 수 있는 존재는 이 정장에서 단 하나뿐이다. 용병들의 얼굴에 절망이 깃들었다.
가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만든 하찮은 실드를 보며 허망함에 빠졌다.
“오크 로드의 힘이…… 이 정도인가.”
아무리 강해졌다 한들, 광범위 마법 앞에서는 하찮은 하나의 인간일 뿐이었다.
그가 무기력감을 느끼며 실드를 거두려고 할 때, 물의 벽이 휘어지며 목표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콰과과과과광!
그런데 쏟아지는 물의 방향이 조금 다르다. 성벽 너머 마물들을 쓸어 간다.
처음 물을 맞이했던 마물들은 몸이 터져 나가고, 그 뒤로도 오우거를 포함하여 그 강력한 물살에 모두 뒤로 밀려났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콰광! 치지지직-.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마물들에게 번개가 내리쳤다. 그것은 하늘에서가 아닌 다른 곳에 이어져 있었다.
가브는 번개가 시작된 곳을 확인했다.
언덕 위,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하…….”
가브는 그를 이곳에서 이런 때에 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펜릴 백작과 마법사단이었다. 그도 가브가 보이는지 이쪽으로 눈을 마주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치이이익-.
그때, 날카로운 소리가 정신이 번쩍 들게 했다.
물이 어느 지점에서부터 들어가지 못하고 수증기가 되어 짙은 안개를 만들고 있었다.
오크 로드의 짓이다. 그 많은 물을 해체시키는 데에는 큰 힘이 들어갔을 것이다.
‘지금이다.’
언제 마법이 들어올지 전전긍긍하며 버티다가는 필패할 것이다.
가브는 검을 쥐고 성벽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러곤 저 멀리 보이는 짙은 안개를 향해 달려갔다.
* * *
안개를 뚫고 전격 마법에 당하지 않은 마물들이 튀어나왔다.
놈들은 바닥에 널브러진 마물의 사체를 밟으며 무섭게 달렸다.
그 수만 마리의 마물들에게 홀로 덤벼드는 이가 있다.
은빛 갑옷을 번쩍이며,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굵은 중검을 늘어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발을 뗀다.
그는 이내 마물들의 파도와 부딪혔다.
쾅, 쾅! 퍼석!
발튼이 힘, 세실리아가 속도라면 가브는 그 모든 것을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디마를 신경 쓰고 오크 로드의 마법을 견제하느라 제대로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던 가브는, 그 응어리를 풀어내듯이 시원하게 검을 휘둘렀다.
한 번에 한 마리씩, 고블린도, 오크도, 심지어 트롤까지도 그 한 방에 목숨을 잃거나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밀려오는 마물의 파도를 역으로 거슬러 오르던 가브는 돌연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쾅!
동시에 그가 있던 자리에 오우거의 주먹이 박혔다. 트롤과 고블린이 그 주먹에 깔려 터지며 녹색 피를 뿌렸다.
가브는 오우거의 팔을 타고 올라가며 검을 오른손으로 잡고 강하게 휘둘렀다.
스걱-!
가브가 다시 바닥에 착지했을 때는 오우거의 목 절반이 잘려 녹색 피를 폭포수처럼 쏟아 내고 있었다.
그때 하늘이 반짝였다.
서걱-.
그와 동시에 덜렁거리던 오우거의 목 일부가 마저 잘려 나가며 완전히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세실리아였다. 그녀는 금세 가브 옆에 따라붙어 검을 휘둘렀다.
“넌 왜 와!”
“주군은 언데드입니까?”
잠시 마주친 그녀의 눈빛이 꽤 고집스럽다.
가브는 묵묵히 검을 휘두르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말없이 옆으로 따라붙었다.
쾅, 쾅! 서걱- 쾅!
둘이서 길을 뚫으니 훨씬 빨라졌지만 오크 로드가 있는 곳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었다.
가브와 세실리아의 접근을 알고 그곳으로 오우거들이 모여들었다.
오우거는 아무리 가브라고 해도 한 방만 제대로 공격당하면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상상도 못 할 방법으로 처리하고 있지만, 주변에 화살과 창을 막고 피하며 오우거를 상대하려니 속도가 절반 이하로 느려졌다.
-그아아아아!
그때, 옆에서 오우거의 주먹이 날아왔다.
동료 오우거의 부상도 상관하지 않는 그 공격에 가브는 피할 겨를이 없어 두 손으로 검면을 위로 올리고 막으려 했다.
콰앙!
오우거의 주먹이 예측과는 달리 바로 옆에 꽂혔다.
어느새 나타난 발튼이 방패로 오우거의 팔을 쳐 낸 것이다.
그는 무릎을 살짝 굽혀 낮은 자세로 방패를 비스듬히 세우며 외쳤다.
“쥬군! 제가 길 뚫겠슴니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많은 마물들을 향해 돌진했다.
콰광, 쾅쾅, 콰과광!
그의 방패에 부딪히자 마물들이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튕겨 나갔다.
7미터에 달하는 오우거마저도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괴력을 보여 줬다.
그가 지나간 길이 일직선으로 뚫리기 시작했다.
가브와 세실리아는 재빨리 그 뒤를 바짝 붙었다.
어마어마한 괴력으로 신나게 길을 뚫던 발튼은 돌연 날카로운 검격에 몸을 틀어 피했다.
오크 친위대의 창이었다. 목적지에 다다른 것이다.
“오크 로드!”
오크 로드는 저 멀리서 날아오는 마법들을 해체하느라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열 마리 남짓한 오크 친위대를 믿는 듯했다.
가브는 이것이 펜릴과 마법사단이 만들어 낸 기회임을 깨달았다.
그는 손을 뻗어 발튼의 목덜미를 잡아 뒤로 던지며 외쳤다.
“세실리아!”
“예, 주군!”
그때에 맞춰 세실리아가 앞으로 튀어 나가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바람검 세르크의 문자가 흰색으로 빛나며 강력한 돌풍을 일으켰다.
-카랍, 투 하브!
오크 로드는 갑작스러운 마법에 고개를 돌리고 지팡이를 뻗어 마법을 해체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마나와 궤를 달리 하는 정령 마법을 해체시킬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놈의 눈동자가 커졌다.
후우웅-!
그 돌풍에 강철 같은 근육과 묵직한 무게를 지닌 오크 친위대도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오크 로드만이 몇 발자국 밀려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가브는 그 사이로 파고들어 가 검을 뻗었다.
쩌정-.
묵직한 저항감과 함께 오크 로드의 실드가 깨졌다.
챙!
힘이 빠진 검을 오크 로드가 지팡이로 쳐 냈다. 가브는 순순히 검을 놓으며 오른손을 뻗었다.
그의 긴 손톱은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푸욱-!
가브의 검은 손이 오크 로드의 커다란 눈알을 파고 쑥 들어갔다.
오크 로드의 몸이 순간 경직되었다. 가브의 팔은 팔뚝까지 박혀 있었다.
콱, 콰직.
가브는 거침없이 그 안에 뇌로 추측되는 그것을 잡고 끄집어내었다.
츄아아악!
진녹색 피가 하늘로 비산하는 모습은 마치 폭죽을 떠올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