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14
14화
비좁은 석실, 나무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두 남자가 마주 앉아 있다.
뱀파이어처럼 창백한 얼굴에 감정을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한 눈을 지닌 남자, 셀은 송곳의 손잡이를 잡으며 입술을 떼었다.
“유언은 다 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일으키며 송곳을 뻗었다.
“어머니의 죽음.”
척.
뾰족한 송곳이 눈동자 한 치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러나 가브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시선을 셀에게 고정시키고 있었다.
“의문을 품은 적이 있나?”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셀은 송곳을 치우지 않고 대답을 촉구했다.
“너의 눈빛은 남들과는 다르다. 복수는 강해지기 위한 가장 큰 원동력이다. 넌 마나가 깃들기 좋은 체질이다…….”
셀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태제는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3년간 직접 교육을 시킨다.
셀이 교육을 받을 때는 네 명의 동기가 있었지만 자신에게만 저 말을 했었다.
가브는 생각에 잠겨 있는 셀의 눈동자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게 이유였다. 내 가족이 산 채로 불에 타 죽은 이유, 너의 어머니가 독살을 당한 이유.”
태제 카로스는 뛰어난 재능을 지닌 아이를 보는 눈이 탁월했다. 그래서 그런 아이들을 손에 쥐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4년 전, 가브는 태제가 자신의 가족에게 끔찍한 짓을 벌였다는 것을 알아냈지만, 복수에 실패하고 죽음을 위장하여 숨어들었다.
마지막 표적 암살을 중간에 관두고 도망쳤다는 이유는 태제가 만든 대외적인 가짜 이유였을 뿐이다.
“시도는 좋았으나…….”
셀은 말을 하다가 멈추었다. 그의 견고했던 눈동자가 그제야 흔들린다.
방금 전에 희미하게 어머니가 죽기 전의 증상이 스치듯 떠오른 것이다.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은 아주 잘 알고 있는 독에 의한 증상과 일치한다는 것을…….
드르륵.
가브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 손을 내밀었다.
“지금도 카로스의 규율에 따르겠나?”
셀은 송곳을 내리고 그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가 직접 확인해야겠습니다.”
일단 의심이 든 것부터가 절반은 성공이다. 가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렸다.
“기다리지.”
셀은 손가락을 튕겨 송곳을 소매 안쪽으로 집어넣고는 바로 등을 보이며 방을 나섰다.
그는 신중하지만 한 번 결정하면 추진력도 좋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 * *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푸르른 정원에서 태제 카로스가 전지가위로 가지를 손질하고 있다.
반 발자국 뒤에 해수 두 명이 붙어 있고, 셀이 한 발자국 떨어져 있다.
“태제.”
“말해.”
태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질을 계속하며 대답했다.
“얼마 전에, 브랜에 다녀왔습니다.”
브랜은 셀의 고향이자, 태제와 처음 마주친 곳이다.
가지를 치는 태제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가 다시 움직였다. 셀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곳에서 이상한 말을 들었습니다.”
우지끈.
태제는 아무 말 없이 굵은 가지 하나를 손으로 부러트려 정원 밖으로 버렸다.
“저희 어머니, 병사가 아니라 독살이라고 하더군요. 그 증상이 우리가 쓰는…….”
“가츠를 만났냐.”
태제의 말에 셀의 눈이 번뜩였다. 태제 양쪽에 있는 해수들의 눈빛도 덩달아 날카로워진다.
“……예.”
셀의 대답과 동시에 해수들이 단검을 꺼내어 들었다. 태제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 생각은? 가츠 말이 맞는 것 같아?”
“저는…….”
셀이 입을 떼었을 때 사방에서 단검과 석궁을 든 해수들이 소리 없이 걸어 나왔다. 그 수는 스물이 넘었다.
태제는 셀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며 말을 이었다.
“대답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가츠를 만나고 보고하지 않은 순간부터 네 운명은 정해졌어.”
“…….”
“허무하군, 공 많이 들였는데. 이것도 다 내 과오지 …….”
그가 말하는 공이, 과오가 어떤 짓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된다.
셀은 바로 두 팔을 아래로 내려 양손에 송곳을 들었다.
처적.
그 모습에 태제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한 발자국 더 뒤로 물러났다.
“네 실력은 내가 제일 잘 알지. 어디 한번 발악해 봐.”
태제가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스물이 넘는 해수들이 셀을 덮쳤다.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고 해도 이렇게 사방이 트인 곳에서 다수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칼 밥을 먹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것이 용기가 되어 해수들은 특급 해수 셀에게 칼을 들이밀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일이 언제나 이론대로 돌아가지만은 않는다.
스윽.
셀은 몸을 바짝 낮췄다. 허리 높이보다 더 아래로, 마치 코볼트 굴을 지나가는 것처럼 아주 낮게.
푹, 푹, 푸북!
그리고 해수들 사이를 빠르게 돌아다니며 발등이나 발목을 사정없이 찍었다.
언제나 급소만을 노리는 암살자들이라 급소 외의 공격에 대한 방어는 반 박자 느리게 반응했다.
특급 해수와 1급 해수의 차이는 근소하지만 크다. 배운 것을 완벽하게 써먹는 자와 틀을 벗어난 자의 차이는 어떤 것으로도 좁혀질 수 없다.
서걱.
뒤늦게 셀의 옷자락을 베는 해수가 나올 때까지 다섯 명의 발이 뚫렸다.
콰직!
셀은 아킬레스건이 뚫린 해수의 다리를 잡아 넘어트리고, 그를 방패 삼으며 한 방향을 견제했다.
그러자 단검을 든 해수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나며 석궁을 든 해수들이 앞으로 나와 방아쇠를 당겼다.
퓽, 퓨븅!
그들에게는 이미 인질로 잡혀 있는 동료의 안위 따위는 찰나의 고민거리도 되지 않았다.
화살은 사방에서 날아왔고 아무리 셀이라고 해도 모두 막아 낼 수는 없었다. 어느새 그의 허벅지와 어깨에 화살이 하나씩 박혀 있다.
그는 이를 악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체 언제…….’
히이잉!
그때, 꽤 가까운 곳에서 말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두구두, 두구두!
어떻게 정문을 통과했는지 짐을 잔뜩 실은 이두마차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온다. 마부석에는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정체불명의 남자가 타고 있었다.
그러나 태제는 그의 눈빛과 체형만 보고도 알아챌 수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더없이 커졌다.
“가츠, 가츠다! 저놈 먼저 잡아! 대가리에 화살을 꽂아 버려!”
태제가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자 해수들이 마차로 시선을 돌렸다.
돌진해 오는 마차를 향해 뛰어들지는 못하고, 석궁을 든 자들이 방아쇠를 당겼다.
이히잉!
가브는 마차와 연결되어 있는 걸이를 풀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콰광, 쾅!
뒤에 있던 짐이 해수들을 덮쳤다. 동시에 짐에서 복면인들 네 명이 튀어나오며 하얀 가루를 터트렸다. 그중 한 명은 가녀린 몸을 지니고 있었다.
가루는 양이 많고 미세하여 장내를 순식간에 뿌옇게 만들었다.
“콜록!”
“켁.”
“큽.”
가루를 들이마신 해수들은 매운 기운에 기침을 해 대었다. 시야 확보가 힘든 상황에서는 적을 찾아야 하는 다수보다 보이는 자들을 전부 치면 되는 소수가 유리해진다.
미리 준비했던 복면으로 코와 입을 가린 셀은 복면인들과 함께 마치 줄 풀린 사냥개처럼 해수들을 닥치는 대로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콜록, 큭. 이딴 잔재주로…….”
태제는 한 팔로 코와 입을 막고 주변을 날카롭게 둘러보았다. 뿌연 정원에서 검은 무언가가 갑자기 확 가까워진다. 그는 바로 단검을 들어 올렸다.
챙!
동시에 검 끝이 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가 튕겨 나갔다. 뿌연 안개 사이로 싸늘한 흑안이 보인다.
“가츠, 올 줄 알았다!”
채앵.
가브는 태제와 검을 맞대며 으르렁거렸다.
“알았으면 더 준비했어야죠.”
서걱.
가브는 갑자기 몸을 뒤로 물려 옆구리를 찔러 오는 해수의 목을 베고 다시 태제에게 붙었다.
“동생, 어디 있습니까?”
“큭, 동생 만나게 해 줄게!”
태제는 가브의 검을 밀치고 허리를 향해 검을 뻗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심장과 목 같은 급소 위주로 방어를 한다. 생사가 오가는 전투 중에는 하체 쪽이 시야에 잡히지 않아 오히려 치명상을 남기기 쉽다.
채쟁!
그러나 태제의 가장 뛰어난 제자가 가브다. 그는 손쉽게 태제의 검을 쳐 내면서 가까이 붙어 어깨로 몸을 밀었다.
태제가 뒤로 밀려나며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리는 그 순간, 가브의 중검이 그의 목을 향해 휘둘렸다.
스걱.
태제는 허리를 뒤로 확 젖혔고, 간발의 차이로 지나간 가브의 검 끝이 그의 머리카락을 잘라 냈다.
태제는 그 상태에서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두 발로 가브의 배를 차고 반동으로 거리를 벌렸다.
가브는 그가 일어날 틈을 주지 않으려 바짝 붙었지만 양옆에서 다른 해수들이 달라붙었다.
챙, 푹!
해수의 검은 급이 어떻게 되든 간에 무시할 수 없다. 가브가 그들의 검을 쳐 내는 사이, 태제는 주변을 훑어보고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카로스!”
가브는 빠르게 해수들을 물리고 그의 뒤를 쫓았다. 숨겨 둔 해수나 함정이 있을까 하여 경계하며 따라갔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쾅!
그가 멈춰 선 곳은 4층의 집무실이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창문에 등을 기댄 채 여유로운 표정으로 가브를 맞이했다.
“왔냐.”
태제는 몸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적 앞에서 등을 보인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의 시선은 아래 정원에서 벌어지는 피의 향연에 고정되어 있었다.
“놀랍지 않나? 전부 같은 훈련을 받았는데 저렇게 다른 것이?”
그의 눈동자는 늑대 무리에 들어가 휘젓고 다니는 사자 같은 셀을 보고 있다.
“너희들을 발견하고 난 기뻤다. 그 어떤 고고한 여자를 품었을 때보다, 천만금을 얻었을 때보다 더.”
그는 뒤돌아서 가브와 눈을 마주했다. 서늘한 검 끝이 자신의 목젖에 닿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네가 명령을 거부하고 베스를 살려 줬을 때, 두려움을 느꼈다.”
태제는 앞으로 얼굴을 더욱 가까이하며 가브와 눈을 마주했다. 그의 목에는 검 끝이 살짝 들어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가츠, 태어나서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낀 내 마음을 아나? 그것도 자식처럼 키운 놈에게?”
“자식처럼…….”
그 가증스러운 말에 가브는 지난날이 떠올랐다. 독사 굴에 던져지고 동료의 시체를 뜯어 먹으며 생존해야 했던 그때가.
“가츠, 가츠. 날 봐, 4년 전에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나?”
이제야 마지막 퍼즐이 끼워 맞춰진다. 가족의 몰살이 진실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그 흔적을 완벽하게 없애지 못한 태제의 능력이 항상 의심스러웠다.
그는 섬세하고 철저하다.
결국, 자신을 공식적으로 없애기 위해 일부러 배신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가브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태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가브는 다시 눈을 차갑게 가라앉히고는 입을 열었다.
“동생, 어디 있어?”
“또 그 질문인가? 아직 모르겠어? 대답 듣고 싶으면 아래 저 미친놈부터 없…….”
슥.
스산한 소리와 함께 태제의 목에 혈선이 길게 생겨났다.
핏, 치이이익.
곧이어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며 태제의 목이 아가미처럼 벌어졌다.
“내가 20년 전에 헤어진 동생 때문에 목숨을 걸 것이라고 생각했나? 당신은 날 그렇게 키우지 않았어.”
태제는 두 손으로 목을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말했다.
“크읍. 그래, 그렇지. 하…….”
그는 공허한 눈으로 가브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 동생, 죽은 지 오래됐지, 끅.”
그는 피가 가득한 두 손을 떼고 가브와 눈을 맞췄다.
“어차피 못 찾으면 너에게는 영원히 살아 있는 거잖…….”
서걱, 쿵.
붉은 카펫 위에 깔끔하게 잘린 태제의 머리가 떨어졌다. 그는 몇 초간 입을 벙긋거리더니 이내 움직임이 완전히 멈추었다.
가브는 눈을 부릅뜨고 있는 태제의 머리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때는 눈조차도 마주칠 수 없을 만큼 두려웠던 존재, 찌르면 파란 피가 나올 것만 같았던 존재.
그러나, 그도 결국 붉은 피를 지닌 인간이었다.
가브는 형용할 수 없는 허무감을 애써 뿌리치며 태제의 머리통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