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21
21화
대전사 결투, 양쪽 진영에서 내세운 대전사가 어떠한 조건을 걸고 일대일 결투를 벌이는 것이다.
보통 공증으로 판테르 대륙에서 가장 권위 높은 네비아 여신의 사제나 신관이 나서기 때문에 조건은 대부분 지켜진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네비아 교단의 명예를 훼손시킨 죄로 단죄된다.
“결투라……. 조건은?”
벨켄 최고의 기사 파키예트를 전령으로 보낸 시점부터 조금은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파키예트는 품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내었다. 티에르는 다리의 통증을 참으며 반듯하게 걸어가 그것을 받아 케리에드에게 건넸다.
티에르의 뒷모습을 보는 파키예트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간다.
조건은 구체적이었다. 벨켄 측이 승리할 경우 케리에드 남작령 인수, 마을 주민들과 케리에드 가문 식솔들의 안전은 책임진다.
케리에드 측이 승리할 경우에는 명분을 묻고 깔끔하게 물러나며 마을 재건 비용까지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다소 불합리해 보이지만 현재 궁지에 몰린 케리에드에는 반가운 조건이었다.
이대로는 승리한다고 해도 병사 수십 명이 희생당할 것은 뻔했고, 승리할 가능성도 낮은 게 사실이었다.
케리에드는 티에르와 눈을 마주하고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대전사 결투를…… 받아들이겠다.”
그의 발언에 기사 파키예트는 뿌듯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케리에드 성내에는 대전사로 티에르가 나간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졌다.
“대장님을 믿습니다!”
“대장님, 케리에드군의 힘을 보여 주십시오!”
티에르가 지나가자 무구를 손질하고 있던 병사들이 달라붙어 비장하게 응원한다. 티에르는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을 들어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천천히 걷지만 미세하게 절뚝거리는 것이 보인다. 오른쪽 다리가 완전히 회복되려면 최소 한 달은 걸릴 것이다.
대전사 결투는 바로 다음 날, 사지가 멀쩡해도 모자란데 다리가 저런 상태면 승패는 불 보듯 뻔했다.
가브는 성벽 계단을 오르는 그에게 바짝 다가갔다.
“다리 괜찮으십니까?”
가브의 말에 티에르가 뒤돌아서 잠시 바라보다가 한 손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탕탕 치며 웃어 보였다.
“멀쩡해. 가끔 다친 것도 까먹을 때가 있어서 문제지.”
가브의 굳어진 표정에 티에르도 미소를 지우고 말없이 그를 보았다.
“대전사 결투, 제가 나가겠습니다.”
“자네, 지금 내 명예를 저 밑바닥 쓰레기통에 처박았다는 건 알고 있나?”
“가족들에게는 죽은 자의 명예가 아닌 살아 있는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티에르의 눈빛에 싸늘한 살기가 어린다. 가브는 피하지도,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무미건조하게 마주 보았다.
심상치 않은 기운에 주변 사람들은 그들을 의식했으나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숨을 죽였다.
척.
이내, 티에르는 눈을 한 번 깜빡이고는 가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손아귀의 악력이 마치 어깨뼈를 우그러트릴 듯이 강력하다.
“지금 말은…… 못 들은 걸로 하지. 돌아가.”
가브는 한 치의 표정 변화도 없이 다시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이 새끼가 진짜, 너 죽고 싶어?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알기나……!”
그때, 티에르는 가브의 뒤쪽으로 다가오는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주군.”
케리에드 남작이었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브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까 했던 말, 다시 해 보게.”
한낱 용병이 자신이 가장 아끼는 기사의 명예를 욕보였다. 처형당해도 할 말이 없는 죄이기에 티에르는 기겁하며 가브의 앞을 막아섰다.
“주군, 이자는 제가…….”
“결투, 제가 나가겠습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또박또박 발음하는 가브의 말에 티에르는 순간 얼음이 되었다. 그런데 케리에드의 표정이 오묘하다.
분노와 슬픔, 미안함,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는 가브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티에르에게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티에르 경, 나는 누구보다 그대를 신뢰한다.”
“예, 주군! 실망시…….”
“자네가 선택하게. 누가 나가는 것이…… 케리에드를 위한 일이겠는가?”
질문을 하는 케리에드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린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아끼는 기사 티에르가 지금 상태로 결투에 나간다면 승리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지더라도 식솔과 주민을 살려 준다는 약속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던 것이다.
‘주군…….’
옆에서 모신 지 20년이 훌쩍 넘었다. 눈빛만 봐도 무슨 말을 하는지 읽을 수 있었다.
티에르는 가만히 그 눈을 마주하다가 가브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거운 짐을…… 지워 주게 됐군.”
가브는 케리에드를 보았다가 다시 티에르에게 고개를 돌리며 가볍게 대답했다.
“제 선택입니다.”
* * *
그날 밤, 티에르는 가브에게 딱 달라붙어 전장의 오우거 파키예트에 관해 상세히 알려 주었다.
“그는 검과 방패를 쓰는데 대검을 한손검처럼 들고 쓴다네. 한 방에 오크의 두개골을 가를 정도로 괴력도 엄청나지.”
몸소 행동으로 보여 주기도 했다.
“오른손잡이인데 방패를 오른손으로 들지. 사실 검보다 무서운 게 그의 방패야. 수십, 수백 명의 대가리를 깨부순 방패야, 그게.”
“예.”
티에르는 가브의 무미건조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구석에 놓인 검과 방패를 들었다.
“방패도 이거의 두 배는 된다고. 일어나 봐.”
“……예.”
결투, 목숨을 건 싸움이다. 자신을 대신하여 목숨을 걸었다고 생각하니 아무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은 티에르였다.
가브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중검을 뽑아 들었다.
“받아 봐. 간다.”
티에르는 바로 검을 휘둘렀다. 그 기세가 꽤 사납다. 가브의 검이 마주 부딪혔다.
츠즈즈즈.
가브는 티에르의 검을 비스듬히 받아 내어 옆으로 흘려보내고는 살짝 열린 틈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턱.
가브의 뾰족한 검 끝이 티에르의 쇄골에 닿았다. 티에르는 순간 얼어 있다가 눈을 껌뻑이며 검을 치웠다.
“이, 이렇게 하면 안 되지. 대검인데 그렇게 받으면 손목이 부러질 수도 있어. 큼, 흠. 그러니까 이렇게…….”
티에르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파키예트와의 결투에서 나올 경우의수를 보여 주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흠…… 알겠습니다.”
가브는 그의 노력과 마음을 인정하고 제대로 대련에 임했다. 아무리 다른 사람이라도 상상보다는 직접 겪어 보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
탁, 쿵.
“여기서 방패로 미는 힘이 몇 배는 더 강하니까 옆으로 흘려보내는 게 좋지. 그렇지, 그렇게…….”
가브는 본격적으로 티에르와 대련을 했다. 몇 시간 후, 티에르는 검을 내팽개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후…… 자넨 숨도 안 차는가.”
“찹니다.”
가브는 그의 옆에 걸터앉아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훔쳤다.
“사람은 사람이구만. 다행이야. 이렇게 상대할수록 자네가 더 믿음직스러워져.”
가브가 강하다는 것을 알수록 티에르는 죽음을 안겨 줬다는 죄책감을 조금씩 내려놓고 희망을 보게 되었다.
가브는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고는 그에게 물었다.
“영지전은 왜 일어났습니까?”
귀족 간의 영지전은 명분이 전부다. 아무리 강한 귀족이라도 마땅한 명분 없이 약한 귀족을 친다면 왕실의 철퇴를 맞게 된다.
영지전에서 승리하더라도 해당 영지를 손에 넣는 것은 왕실의 정식 승인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간단해. 벨켄 남작의 막내아들이 우리 남작령에서 해코지를 당했어. 범인은 하늘로 솟았는지 찾을 수 없었고 벨켄 남작은 주군에게 책임을 물으며 헤딘 도련님의 목숨을 원했고, 결국 영지전이 벌어졌지.”
“아들을 팔아 명분을 만들었군요.”
“아마도……. 후, 그건 벨켄 남작만 아는 거지. 어쨌든 그의 아들이 여기서 손가락 하나를 날려 먹은 것은 사실이니까.”
가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쉬어야겠습니다.”
“그래, 몸 관리가 중요하지. 푹 쉬어.”
내성에 마련되어 있는 숙소, 원래 다른 병사들과 함께 숙소를 썼지만 대전사로 결정된 후에 바로 몸 상태를 고려하여 좋은 방을 배정해 줬다.
침상에 누워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며 차분하게 숨을 내쉬었다.
“흐음…….”
가브는 눈을 천천히 감고 파키예트를 떠올렸다.
방패병사의 대방패에 대검을 한손검처럼 쓰는 괴력의 사내, 그의 키는 발튼보다도 더 커 보였다.
미리 준비한 암살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의 결투, 그 정도 덩치에 기사급 마나를 지닌 자와는 단 한 번도 결투를 해 본 적이 없다.
한 번의 실수만으로 머리통이 부서지고 팔다리가 으깨질 것이다.
가브는 그와의 대결을 지속적으로 상상하다가 잠에 들었다.
* * *
결전의 날, 지나치는 사람마다 눈을 마주치고 비장한 응원을 건넨다.
“가브, 믿습니다!”
“부디 승리로 이끌어 주십시오.”
“안 봐도 뻔하지. 난 저자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걸 봤어.”
“미친놈, 헛소리 좀 작작 해라.”
굳건한 믿음을 지닌 것 같은 병사들의 반응과는 달리, 어젯밤에도 탈영병이 아홉 명이나 나왔다.
누가 보아도 무명의 용병보다는 전장의 오우거라는 무시무시한 별호를 지닌 파키예트가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상식적이다.
약속된 시간을 기다리며 구석에서 검날을 다듬고 있을 때, 고급 의복을 입은 한 소년이 가까이 다가왔다.
“가브.”
케리에드 남작의 장남 헤딘 케리에드였다. 그는 가브 옆에 앉아 얼굴을 들이밀며 속삭였다.
“혹시 아버지가 금은보화를 약속했나요? 만약 그거라면 지금이라도 도망치세요. 거짓말입니다. 우리 집에 돈 없어요.”
“아닙니다.”
“아…… 그러면 대체 왜 우리 가문을 위해 목숨을 거는 건가요? 이해가 안 돼요.”
가브는 검에서 시선을 떼고, 한낱 용병에게도 말을 꼬박꼬박 높이는 예의 바른 도련님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케리에드 가문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가 살기 위해서입니다.”
“살기 위해서…….”
“그리고, 결투라고 해도 목숨을 건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예? 그건 또 무슨…….”
헤딘은 의문을 표했지만 가브는 더 이상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는 혼자서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다가 포기하고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저기, 이거.”
그가 내민 것은 케리에드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배지였다. 동전보다 두 배 정도 큰 크기에 녹색 바탕에 하얀 방패가 그려져 있다.
“전장에 나갈 때 이걸 지니면 우리 가문의 조상님이 수호해 준대요.”
“……네, 잠시 빌리겠습니다.”
“주는 거예요. 이기지 않아도 되니까 살아서 돌아와 주세요.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
가브는 중검을 검집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척, 척, 척, 척.
케리에드성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평야, 이제 백 명이 넘지 않는 병사들이 총동원되어 벨켄군과 마주 섰다.
벨켄군도 용병들은 모두 돌려보내어 현재 병사들의 수는 비슷해 보였다.
총 이백여 명의 병사들이 철갑옷을 갖춰 입고 쭉 나열한 모습은 장관이었다.
벨켄군 쪽에서 하얀 로브를 입은 사제가 병사들 네 명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 나온다. 그는 두 진영의 중간에 멈춰 서서 하얀 깃발을 들어 올렸다.
“결투에 임할 대전사는 앞으로 나오십시오.”
“결투에 임할 대전사는 앞으로!”
철컥, 철컥, 철컥, 철컥.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은 갑주로 무장한 거대한 덩치의 파키예트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지축이 울리는 그 묵직함은 케리에드군에게 두려움을 자아냈다.
그는 소문대로 방패조 전용 대방패와 대검을 각각 한 손에 들고 있었다. 워낙 덩치가 커서인지 괴리감은 전혀 없어 보였다.
저벅저벅.
가브는 병사들을 제치고 앞으로 가다가 티에르와 눈을 마주했다.
그는 입을 꽉 다물고 고개를 깊이 끄덕였고, 가브도 마주 끄덕였다.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죄책감이 깃들어 있었다.
척.
중간에 케리에드 남작이 가브의 어깨를 잡았다. 그는 입을 한 번 꾹 닫았다가 떼었다.
“자네의 손에 우리의 운명이 걸려 있네. 부디, 승리를 가져와 주게.”
가브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걸어 나가 파키예트와 마주 섰다.
그와의 거리는 대략 스무 걸음.
이렇게 가까이 붙으니 둘의 몸집 차이가 더욱 돋보인다. 가브가 180이 넘는데도 마치 어린아이처럼 작아 보였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가브가 나오자 벨켄군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뭐지, 저건?”
“티에르가 나오는 거 아니었나?”
“어디서 이상한 놈 하나 데려왔군. 케리에드 남작이 급하긴 급했나 보네.”
가브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헤딘은 잠시 어수선해진 틈을 타 티에르에게 다가갔다.
“티에르 경, 결투라고 해도 목숨을 건다고 생각한 적 없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예? 그건…… 흠, 결투 중간에 불리하면 도망치겠다는 뜻 아닐까요? 아니면…….”
“아니면?”
“아니면, 결투 대상이 목숨을 걸 만한 실력이…….”
그때, 중앙에 있는 네비아 교단의 사제가 다시 하얀 깃발을 들어 올렸다.
“양측 대전사는, 대전사 결투의 예를 취하십시오.”
사제의 목소리는 중저음에 작았지만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신성력은 마나와는 다르지만 신비로운 힘을 지녔다.
그의 말에 파키예트가 먼저 대검을 하늘 높이 추켜올리며 크게 외쳤다.
“나, 벨켄 남작의 기사 파키예트! 케리에드 남작의 대전사에게 결투를 청한다!”
“케리에드 남작의 병사 가브, 대전사 결투를 받아들이겠다.”
병사, 가브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그 파급력은 상당히 컸다.
벨켄 남작은 물론 그의 기사, 병사까지도 비웃음을 참지 않고 내뱉으며 이죽거렸다.
“내가 방금 잘못 들은 거지? 병사? 벼엉사?”
“케리에드가 진짜 미쳤나 보다. 거기 인재가 그렇게 없나?”
“파키예트 경이 나갈 필요 없이 그냥 내가 나갈 걸 그랬나…….”
그때, 네비아 교단의 사제가 하얀 깃발을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동시에 장내의 모든 시선이 둘에게 집중되었다.
“대전사 결투, 시작하십시오!”
사제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파키예트는 대방패를 앞세우며 달려들었다. 정면에서 마주하니 그 기세가 성난 황소처럼 사납고 거칠었다.
“우으아아아아!”
그의 포효는 초대형 마물 오우거를 연상케 하며 두려움을 자극했다.
마주 선 가브는 중검을 아래로 늘어트린 채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양쪽 병사들은 생각했다, 단연코 그는 마주한 공포에 사지가 얼어붙은 것이라고.
‘더, 더 가까이.’
그러나 가브의 눈동자는 사냥감 앞에서 웅크린 사자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크하아아!”
다섯 걸음 언저리, 파키예트가 바닥을 박차고 성벽처럼 견고하게 들고 있던 방패를 열며 대검을 추켜올렸다.
동시에 동상처럼 가만히 있던 가브의 몸도 드디어 움직였다. 그는 몸을 살짝 낮추며 중검을 들어 올렸다.
“아, 안 돼!”
“지금 저게 뭐 하는 짓이야!”
휘두르는 것도 아니고 바로 눈앞에 다가온 파키예트에게 마치 화살을 겨누듯이 중검을 겨누고 있다.
저 상태로 파키예트를 맞이한다면 검과 함께 몸도 산산조각이 날 것이 뻔했다.
스릉.
그때, 파키예트의 대검이 지척에 다다르자 가브의 검 끝이 살짝 방향을 틀었다. 대검을 휘두르는 운동 방향의 반대, 바깥쪽이다.
츠즈즈즈.
두 개의 검날이 부딪쳐 갈리며 미세한 불꽃이 튄다. 가브는 그제야 파키예트의 오른쪽으로 발을 옮기며 검날을 밀었다.
달려오는 가속도와 더불어 운동 방향으로 미는 힘에 파키예트는 순간 반대로 휘두르기가 힘들었다.
그사이에 가브의 검 끝이 그의 두꺼운 목을 파고들어 갔다.
스걱.
소름 돋는 절삭음과 함께 가브와 파키예트가 교차했다. 제어력을 잃은 파키예트의 거대한 몸이 케리에드군 방향으로 날아간다.
콰광, 쾅! 쿠궁!
파키예트의 몸은 묵직한 굉음을 내며 몇 바퀴 구르고서야 간신히 멈춰 섰다.
주변에는 그로 인해 흙먼지가 뿌옇게 일었고, 전장에는 지독한 적막이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