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23
23화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이 뺨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 준다.
바다 냄새가 물씬 풍기는 어촌 다그는 아침부터 활기가 넘쳤다.
쿵, 쿵.
“마츠리! 이쪽으로 던져~.”
“여기 밧줄 좀 더 주세요!”
두 개의 마을 입구부터 그 주변으로 빙 두른 울타리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달라붙어 분주하게 움직인다.
“대장! 이건 어디에 놓을까요?”
가브는 망치질을 멈추고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에 갖다줘라.”
“예, 대장!”
발튼이 사라지자 세실리아가 바짝 다가왔다.
“조장, 저 덩치는 왜 조장에게 하나하나 다 묻고 행동합니까? 바보입니까?”
그녀의 질문에 가브는 고개를 돌려 발튼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마음에 빚이 있으면, 행동이 조심스러워지는 법이지…… 흠.”
가브는 돌연 미간을 확 찌푸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는 세실리아의 부축을 만류하며 울타리에 몸을 기대고 윗옷을 들췄다.
왼쪽 가슴에 붉게 빛나는 점이 사라지기는커녕 무언가를 알리는 듯이 더욱 진하게 빛나고 있다.
가브는 미간을 좁히며 마을 입구로 시선을 주었다.
“잠시 밖에 나갔다 오마.”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아니, 넌 여기 있어.”
가브는 세실리아에게 손바닥을 보이고는 망치 하나만 챙겨 들고 마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대낮에도 밤처럼 어두운 숲길, 한 소년이 말을 타고 거칠게 질주하고 있다.
“살아야 돼. 살아남아야…….”
푹!
“크흑!”
그 소년, 헤딘 케리에드의 어깨에 화살이 하나 날아와 박혔다. 순간 말에서 떨어질 뻔했지만, 이를 악물고 고삐를 부여잡았다.
열다섯 생일 때 선물로 받은 미스틸 체인갑옷이 아니었으면 완전히 관통당했을 것이다.
뒤에서 끈질기게 쫓아오는 용병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야, 이 씨! 아래에 쏘라고, 아래! 뒈지면 우리 돈 다 날아가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다시……!”
“됐어! 내가 쏜다!”
‘생포? 왜?’
벨켄 남작이 대전사 결투 때의 약조를 어기고 연회장에서 암습을 한 것이 알려지면 네비아 교단에 의해 멸문한다.
그래서 이미 케리에드성도 불타고 있었고, 자신도 악착같이 쫓아와 살인멸구 하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위험부담이 큰 생포라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푹.
히이잉!
의문도 잠시, 말이 화살에 맞음과 동시에 헤딘의 몸이 붕 떠올랐다.
쿠궁, 쿵, 쿠궁.
헤딘은 낙하하는 충격과 더불어 열 바퀴쯤 구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전속력으로 달리던 말에 굴러떨어진 자라고는 믿기지 않는 반사 신경이었다.
생명에 위험을 느끼니 잠재된 힘이 방출된 것이다.
타다다다닥.
헤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더 울창한 숲을 향해 뛰었다. 그의 오른쪽 발목은 바깥쪽으로 완전히 꺾였지만 본인도 알아채지 못했다.
“지네 가문이 몰살당했어도 살고 싶긴 한가 보네.”
용병들의 이죽거림에도 헤딘은 발을 놀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깊은 숲속이어도 한쪽 발목이 부러진 채로 말을 탄 자들에게서 벗어나는 것은 무리였다.
후웅, 후웅, 철커덕.
1미터 길이의 밧줄에 양쪽에는 쇠구슬이 달린 포박추가 헤딘의 한쪽 다리를 휘감았다. 놀란 것도 잠시, 곧이어 또 하나가 날아와 두 다리를 묶었다.
“큭.”
헤딘은 바닥에 한 바퀴 뒹굴고는 품에서 단검을 뽑으며 바로 뒤돌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처절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
“덤벼! 한 놈이라도 꼭 데려가 주겠다!”
“허허, 도련님 패기 보게.”
“눈에 독기가 가득하네. 팔 하나쯤은 잘라야 되겠어.”
용병 두 명이 검을 뽑아 들고 여유롭게 다가온다. 노련한 자들인지, 다가오는 모습에 빈틈이 없다.
“죽어!”
헤딘은 풀어낸 포박추를 한 놈에게 던지고 다른 놈에게 덤벼들었다.
용병은 흥분한 데다가 중심도 제대로 못 잡는 헤딘의 공격을 몸을 틀어 손쉽게 피하고 한쪽 다리를 걸었다.
쿵!
볼썽사납게 엎어진 헤딘의 뒷모습을 보며 용병이 검을 추켜올렸다.
“너나 뒈져, 이 새끼야!”
푸확!
검이 휘둘려 몸 어딘가를 벨 타이밍에 들려오는 낯선 타격음, 등에 묻은 뜨거운 무언가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뒤돌아서니 머리 반쪽이 터져 나간 용병이 보였다. 그가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동자를 굴리다가 천천히 쓰러졌다.
털썩.
용병의 뒤에는 어울리지 않는 분홍 머리 끈으로 잿빛 머리를 대충 묶은 남자가 보였다.
처음 보았을 때의 단단한 갑옷에 무거운 철검이 아닌, 후줄근한 천 옷에 뭉툭한 망치를 들었지만 그 존재감은 감출 수 없었다.
“가, 가브!”
가브는 눈을 한번 맞추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바로 발을 움직였다.
낯선 자의 등장에 용병들도 긴장하며 말에서 내려 달려들었다. 그 수가 다섯.
“저건 뭐야!”
“저 새끼 먼저 죽여!”
가장 가까이에 있는 한 놈이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가브는 급히 허리를 숙이며 망치로 놈의 발등을 내려찍었다.
“크악!”
퍽!
찌릿한 통증에 비명을 내지르는 사이에 다시 일어나 놈의 관자놀이에 망치를 찍었다. 놈은 옆머리가 움푹 들어가며 누가 민 것처럼 옆으로 쓰러졌다.
그사이 뒤에서 두 명의 발소리가 급격히 가까워진다. 가브는 뒤돌아서며 바로 한 놈에게 망치를 던졌다.
푹.
망치의 머리 부분이 놈의 코를 정확히 찍으며 넘어트렸다. 가브가 맨손이 되자 다른 한 놈은 기세등등하게 달려와 검을 찔러 넣었다.
“뒈져!”
스걱.
가브는 몸을 살짝 틀어 그의 검을 피했다. 헐렁한 천 옷을 용병의 검이 꿰뚫을 만큼 미세한 차이였다.
턱.
그만큼 서로 가까워진 거리, 가브가 검을 든 손목을 잡자 용병은 당황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악력에 도망쳐야 한다는 본능이 일깨워진 사이, 커다란 주먹이 눈앞에 들이닥쳤다.
퍽, 퍼석.
주먹 한 방에 코뼈가 이마보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고, 또 한 방이 꽂히자 이미 제자리에 없는 눈알 사이로 뇌수가 흘러나왔다.
가브는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쓰러지는 용병의 검을 빼앗아 들고, 망치에 코를 맞아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려는 놈의 심장에 가볍게 찔렀다가 뺐다.
훙!
바람을 가르는 소리, 가브는 보기도 전에 남은 용병들이 있었던 위치와 소리로 거리를 추측하여 뒤돌아서며 고개를 틀었다.
서걱.
날카로운 화살촉이 옆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순식간에 네 명이 당하자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멀리서 화살을 쏜 것이다. 나머지 한 명은 이미 뒤돌아서 말에 올라타고 있다.
가브는 검을 고쳐 잡고 화살을 다시 메기고 있는 용병에게 달려갔다.
“우으아아악!”
용병은 맹수 한 마리가 덮쳐 오는 위압감에 소리를 내지르며 활시위를 놓았다.
팅!
그러나 가브는 용병의 바람을 가볍게 무시하며 달리던 속도도 줄이지 않고 화살을 검으로 정확히 쳐 내었다.
촤아악!
금세 이미 전의를 상실한 용병에게 다다른 가브는 그의 목을 깔끔하게 베고, 그가 가지고 있던 활과 화살을 들었다.
이히잉!
죄 없는 말을 보채며 줄행랑을 치는 마지막 용병 한 명. 거리는 대략 50미터.
거침없이 활시위를 당긴 가브는 망설임 없이 바로 시위를 놓았다.
푹!
화살은 용병의 목뒤에 꽂혀 목젖으로 튀어나왔다. 말은 얼마 가지 않아 등에 있는 고깃덩어리를 떨어트리고 다시 달려갔다.
저벅저벅.
헤딘은 묵직한 발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금세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저 피가 남의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남자, 죽음의 위기에서 판단한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위로해 주는 것만 같은 안도감.
그제야 온몸에 통증과 졸음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헤딘은 감기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며 입을 달싹였다.
“가브…….”
“……일단 쉬십시오.”
가브는 어느새 까무룩 잠이 든 헤딘을 번쩍 안아 들고 걸음을 옮겼다.
* * *
마을 광장인 우물가에 촌장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심각한 표정으로 촌장의 집을 힐끔거리고 있다.
그곳 손님방에서 잠을 자고 있는 한 사람 때문이다.
“헤딘…… 케리에드?”
“예, 케리에드 영주님의 적자, 헤딘 케리에드입니다.”
“어찌 그런 귀한 분이…… 저런 꼴이 되어 이곳으로 온 것이지……?”
“가브가 전쟁은 끝났다고 했잖아!”
“이제 다 안전하다며?”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불안감에 쏟아지는 질문에 가브는 고개를 미세하게 저으며 촌장을 보았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일단 경계를 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야겠군. 어쩌다 이리…….”
가브는 촌장과 눈을 잠시 마주했다. 촌장은 지혜롭고 현명하다. 그 잠깐의 눈 맞춤으로 가브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대충이나마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브는 촌장에게 뒷일을 맡기고 그곳을 벗어났다.
“세실리아.”
“예, 조장.”
세실리아는 그의 부름에 아무런 질문도 없이 바로 따라붙었다. 고개를 돌리던 가브는 발튼의 간절한 눈과 마주치고는 멈칫했다.
“저는…… 마을을 지켜야겠지요?”
“그래.”
비전문가에, 발자국이 깊게 찍히는 발튼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브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을 밖으로 발을 옮겼다.
추적군이 올 수도 있으니 흔적을 지우러 가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을 알려 불안감을 가중시킬 필요는 없다.
“지저분하게 죽이셨네요.”
세실리아가 머리가 터진 시체를 수습하며 말했다. 가브는 발자국을 지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망치밖에 없었다.”
“도구를 탓하는 건 핑계입니다. 그동안 너무 오래 쉬신 거죠.”
“…….”
“이 마을에 계속 머무르실 겁니까?”
그녀의 질문에 바삐 움직이던 가브의 손이 멈칫했다.
“그래.”
“동생분을 그렇게 만든 놈은요?”
“이미 죽였잖아.”
“그럼 왜 밤까마귀에 그런 의뢰를 맡겼습니까?”
가브는 고개를 돌려 세실리아를 한 번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마을의 안전만 생각하자.”
“예.”
세실리아는 대답이 되었다는 듯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일단은 마을의 상황에 집중하자는 뜻으로 해석했다.
지금 어촌 생활은 평화롭지만 따분한 세실리아였다.
* * *
피로 얼룩져 있는 연회장, 벨켄 남작은 여유로운 걸음으로 시체를 수습하는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지긋지긋한 것들, 이렇게 한번에 끝날 새끼들이…… 바퀴벌레처럼 끈질겼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그의 호위 기사 에파드가 바로 말을 받았다.
“창녀들에게 푹 빠져 정신을 못 차렸죠.”
“그렇지, 지들도 꼴에 사내놈들이라고……. 그건 어떻게 됐어?”
“그 깨끗한 척하던 사제 놈도 20골드에 넘어오더군요. 잘 처리되었습니다. 케리에드 놈들도 모두 무기를 품고 체인갑옷을 안에 입고 온 덕분에 수월했습니다.”
“그렇지, 잔뜩 쫄아 준 덕에 명분이 섰지. 그 애새끼는 아직이야?”
에파드는 미세하게 고개를 저으며 약간 작아진 목소리로 답했다.
“예, 아직 귀환하지 않았습니다. 오후까지 기다리고 더 보내 보려고 합니다.”
“남쪽이랬나?”
“예.”
“그쪽에 마을이 뭐 뭐 있지?”
“알아본 바로는 사무겟 마을과 다그 마을이 있습니다.”
듣는 중에 벨켄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다그? 그 결투에 나선 촌뜨기가 다그 마을 출신 아니야?”
“설마 군대를 피해서 그 한 명을 찾아갔을까요?”
“아직 열일곱 애새끼야. 한 명이 군대를 막을 수 있을 줄 알지. 네가 갔다 와,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다 죽이고.”
에파드는 한 손을 들어 올리고 고개를 절도 있게 숙이며 명을 받았다.
“예. 다녀오겠습니다, 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