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3
3화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도 숲은 밤처럼 어둡다.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가느다란 빛에 의지하여 한 남자가 바닥을 살피고 있다.
그는 마차 바퀴를 보다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마차는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다그 마을에 지낸 지 4년, 다부진 몸 덕분에 마을 밖으로 나갈 일이 있으면 촌장이 항상 동원시켰다. 그래서 이 주변 지리는 빠삭하게 익히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당분간 갈림길이 나오지 않는다. 마을로 들어서면 발자취를 쫓기가 힘들어진다. 그 전에 따라잡아야 한다.
가브는 길을 벗어나 우거진 숲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투둑, 툭, 투둑.
수풀과 나뭇가지가 그의 얼굴과 몸을 정신없이 때린다. 마을 청년들과 헤어지고 난 뒤에도 몇 시간을 달렸지만 달리는 속도는 그리 줄지 않았다.
언제든지 떠나기 위해서는 지구력 관리가 필수였다. 매일 아침 백사장을 거의 전속력으로 두 시간씩 달리며 강한 체력과 날렵한 체중을 유지했다.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행동이든 한계를 반복해서 하다 보면 어느새 해당 부분에 마나가 깃들고, 그 행동을 할 때 마나가 활성화된다는 이론이다.
그 극도의 숙련도가 쌓여 마나가 깃들면 근소하지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가브의 다리근육과 폐는 물론 온몸에 농도 짙은 마나가 깃들어 있었다.
“흡, 흡, 후욱, 후욱.”
가공할 속도로 야생의 숲을 가로질러 다시 길이 나왔지만 마차 바퀴는 그대로 찍혀 있었다.
이미 출발 자체도 늦었고 아무리 빨리 달려도 말을 따라잡기는 힘든 것이다.
바큇자국이 저 멀리 보이는 마을로 이어진다. 케리에드 남작령 가장 끄트머리에 속하는 푸카 마을이다. 가브는 고민 없이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기, 멈추시오.”
이 마을은 다그와는 달리 통나무 울타리 높이도 3미터는 되고 목책도 하나 세워져 있고, 입구에는 자경단원 둘이 창을 들고 지키고 서 있다.
그중 하나가 가브의 허리춤에 달린 몽둥이를 힐끔거리곤 창을 사선으로 뻗어 길을 막았다.
“어디서 오셨소?”
“북쪽에서 왔습니다.”
다그 마을은 동쪽에 있지만 무기를 들고 있으니 시간을 끄는 의심은 피하는 것이 좋다. 북쪽은 왕국의 수도와 가까운 곳으로 기름진 영토가 많아 영지전이 잦다.
“용병?”
가브는 대답 대신 품을 뒤적거리다가 동패 하나를 꺼내어 보였다.
제국을 상징하는 붉은 용이 음각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가로로 작대기 두 개가 새겨져 있다.
그 패를 보자 자경단원은 살짝 움찔하며 창을 거뒀다.
“십인대장급……이 왜 혼자 다니시나?”
“쉬는 중입니다.”
“뭐, 쉴 때도 있어야지. 언제 가시오?”
외부인에게 이렇게 직업이나 방문 목적을 묻는 것만으로도 방범 효과가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경비도 하지 않는 마을이 대다수다. 모든 문을 지키며 교대 근무를 할 수 있을 만큼 자경단의 규모가 큰 곳은 드물기 때문이다.
“금방 가야죠.”
“그래요. 들어가쇼. 일 치지 말고.”
자경단원은 한 팔을 휘적거리며 가브를 들여보냈다.
가브는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바닥을 살폈다. 희미하게 자국이 남아 있지만 역시나 금세 다른 마차의 바큇자국에 묻혔다. 이제부터는 그들의 행동을 예측하고 움직여야 한다.
먼저 다른 영지의 방향인 서문으로 갔다. 서문에도 자경단원 두 명이 지키고 서서 드나드는 행인들을 매의 눈으로 감시하고 있다.
남문에서도 그렇고, 자경단원치고는 일을 너무 열심히 하고 있다.
‘혹시…….’
가브는 그들 중 한 명에게 다가가 자연스레 물었다.
“여긴 치안이 좋군요. 항상 이렇게 경비를 섭니까?”
“항상은 무슨, 어떤 새끼들이…….”
“델린!”
옆의 단원이 그의 말을 끊으며 따가운 눈초리를 보냈다. 그러자 그도 화들짝 놀라며 가브에게 손바닥을 보였다.
“아, 말 시키지 마시오. 가요, 가.”
“아, 예.”
가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섰다. 다른 일이 우연히 터진 것일 수도 있지만, 마을 청년들이 영주를 찾아가 신고를 한 게 먹힌 것으로 추측된다.
‘부지런한 영주군.’
그들은 마차와 말이 있기에 몰래 나갈 수 있는 행색이 아니다. 몰래 나가려면 납치한 처녀들을 버리고 모두 흩어져 나가야 한다.
자경단의 행동을 보면 이 마을에서 전서구를 받고 난 이후에 나가지는 않은 듯했다. 그 전에 나갔거나, 아직 이 마을에 갇혀 있을 것이다.
시간을 계산해 보면 아직 마을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도 마을 사람들과 영주가 이리 발 빠르게 움직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귀족들이란 이익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귀하신 족속들이니까.
가브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선 마을이라고 해도 구조는 대부분 비슷하다.
사람들의 동선이 겹치는 중앙 우물가에 장터를 담당하는 광장이 있고, 그 주변으로 음식점이나 상점, 그 뒤로 민가, 구석에는 냄새가 나는 마구간이나 도축장, 창녀촌 등이 자리를 잡는다.
‘가장 높은 곳…….’
가브의 시선이 광장 인근의 높은 예배당에 꽂혔다. 이 세계는 신과 밀접하게 소통하기 때문에 신을 모시는 자들의 권위가 매우 높다.
그는 바로 예배당으로 올라가 마을을 내려다보며 기감에 귀를 기울였다.
후우웅.
까악, 까악.
웅성웅성.
수많은 소리가 기와 귀를 스쳐 간다.
자경단이 순찰까지 하는 이 타이밍에 처녀들을 사 줄 간 큰 밀상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 처녀들을 데리고 숨어 있다. 네 마리 이상의 말을 맡길 수 있고, 마차에서 처녀들이 내릴 때 눈에 띄지 않는, 인적이 드문 곳에…….
저벅저벅.
가브는 예배당에서 내려와 마을의 어둠을 담당하는 거리로 걸음을 옮겼다.
마음먹고 숨은 자들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말을 숨기기도 쉽지 않다.
다그 마을보다 몇 배는 규모가 큰 푸카 마을에서도 말은 희귀하니 그들은 말이 있는 곳 가까이에 있을 것이다.
가브는 품에서 P 모양의 호각을 꺼내어 입에 물었다.
카난이라는 마물이 있다. 인간처럼 이족 보행에 2미터 크기의 중형 마물임에도 오우거에 버금가는 강력한 힘을 지녔고, 강철도 찢어발기는 날카로운 손톱과 웨어울프도 따라가지 못할 민첩함이 완벽하게 어우러져 마물의 왕이라고 불리고 있다.
마물의 왕 카난은 같은 마물에게도 공포의 대명사다. 그래서 카난이 나타나면 눈이 좋은 코볼트들이 먼저 발견하고 울음소리로 동족들에게 위험을 알린다.
삐르르, 삐르르르.
이 호각은 코볼트의 울음소리와 매우 유사한 소리를 낸다.
그 소리가 울려 퍼지면 자연스레 다른 마물들이나 동물들도 두려움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도망치는 것이 학습되었다.
이히이잉!
히이잉!
‘북쪽.’
그 본능은 말에게도 해당된다.
가브는 말 여러 마리의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푸카 마을 외곽에 위치한 선술집. 푸근한 인상의 주인과, 민머리에 근육질인 사내 둘만이 자리를 채우고 있다.
끼익.
문이 열리며 가죽옷에 거무튀튀한 헝겊 망토를 걸친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민머리 사내는 그의 옷차림과 허리춤에 달린 몽둥이를 힐끗 보고는 시선을 거뒀다.
저벅저벅.
가브는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주인에게 걸어가 자리에 앉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여기에 말을 맡긴 자들, 어디 있습니까?”
그의 질문에 민머리 사내의 눈이 살짝 빛났다. 가브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주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말을 맡기다니? 여기 말이 어디 있다고.”
주인의 발뺌이 확신을 더한다.
가브는 제국 문양이 찍힌 금빛 동전 한 개를 주인에게 내밀었다.
1골드는 성인 한 명의 한 달 치 품삯이다.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오늘 오후에 말을 맡긴 진갈색 가죽조끼를 입은 자들, 어디 있습니까?”
“도통 무슨 말인지…….”
가브의 위압적인 어투에 주인이 식은땀을 흘리자, 옆의 민머리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이, 주인장 말 안 들-.”
으득.
그때, 민머리 사내의 손이 가브의 어깨에 닿기 전에 잡혀 반대로 꺾였다. 동시에 그의 얼굴이 바로 앞 나무 테이블에 꽂혔다.
콰직!
“커흑!”
가브는 민머리의 얼굴을 짓누르며 주인을 다시 쳐다보았다. 싸늘한 표정과 눈빛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들, 어디 있어?”
“이, 이게 무슨 행팬가! 자경단을……!”
가브는 주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민머리 사내의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손등에 서슴없이 골드를 내리찍었다.
푹.
“끄아악!”
금빛 동전은 마치 칼이라도 된 것처럼 사내의 살가죽을 우습게 찢고 파고들었다.
주인은 사내의 손등을 관통하고 그 아래 테이블에까지 박혀 있는 동전을 보며 손을 번쩍 들었다.
“브, 브랜! 브랜의 여관으로 데리고 갔소!”
“브랜?”
“바로 맞은편에 있는 여관이오…….”
가브는 골드를 보았다가 그대로 놓고 뒤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쿵.
문이 닫힐 때까지 정지되어 있던 주인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민머리 사내를 챙겼다.
“자네! 괜찮나?”
“끄…… 괜찮겠슈? 아 씨, 어디서 저런 무지막지한 놈이 와서, 으…….”
“어서 치료를 해야지, 치료.”
민머리 사내는 그의 손을 뿌리쳐 거절하며 술을 자신의 손에 부었다.
“됐소. 출혈만 막으면 되지. 내가 이런 부상 처음 겪나?”
“아…… 근데 그렇게 꼼짝 못 하겠던가? 방심해서 그랬지?”
“방심은 개뿔, 몸이 예사롭지 않아서 긴장하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안 보였소. 빨라도 너무 빨라. 목 누르는 거 보니까 힘도 장난이 아니고.”
“그렇구만……. 하, 근데 그놈들이 복수하지 않을까? 우리가 말한 거 알 거 아냐.”
민머리 사내는 걱정하는 주인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보기엔…… 걔네도 밟혀요.”
“엉? 설마, 그놈들이 몇 명인데.”
“아니, 그래 봤자 처녀나 납치하는 풋내기들이지. 저놈 저거…… 제대로 피 칠갑 좀 입어 본 용병입니다. 확실해.”
민머리 사내는 가브가 나간 문을 바라보며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매만졌다.
* * *
브랜의 여관, 1층 로비에 네 개의 테이블이 놓여 있는 작고 허름한 여관이다.
끼익.
“어서 오세요~.”
가브는 여관지기의 나른한 인사를 무시하고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놈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벨리아산 기름 향이 나는 곳은 한 곳이었으니까.
저벅저벅.
그가 숙소가 있는 위층 계단도, 음식을 먹는 중앙 테이블도 아닌 구석으로 걸음을 옮기자 여관지기가 벌떡 일어서서 만류하려고 했다.
“저기, 거기 가시면 안…….”
툭.
여관지기는 무릎이 완전히 펴지기 전에 가브의 손에 의해 다시 공손히 앉혀졌다. 그 짧은 순간 느껴지는 악력과 살벌한 기운에 그는 다시 일어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
* * *
여관 구석에 있는 물품 창고로 들어가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 있다. 낮은 온도에서 술을 보관하는 지하 창고다.
그곳에 큰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고, 사내들 대여섯 명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크, 계속 생각나네.”
“뭐가?”
“뭐긴 뭐야, 옆방 년들이지. 어차피 내일 보내는데 잠깐 맛만 볼까?”
“그러다 상품에 생채기 나면 어쩌려고. 대장이 또 걸리면 거길 잘라 버린댔잖아.”
“생채기는 시팔, 자해했다고 하면 되지. 아, 못 참겠…….”
쾅!
한 사내가 일어서려는 그때, 지하 창고 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들은 그가 혼자인 것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욕을 내뱉었다.
“아이 씨팔. 간 떨어질 뻔했네.”
“어이, 당신 뭐야?”
가브는 그들의 얼굴을 빠르게 확인했다. 마을에서 마주쳤던 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인원도 예측했던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진갈색 가죽조끼와 벨리아산 기름 향은 이들이 한패라는 것을 증명했다.
가브는 그들의 말을 무시하며 안쪽 문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한 사내가 일어나 그를 막았다.
“어디 가, 이 때끼야? 디딜라고.”
사내가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혀 짧은 소리로 위협했다. 가브는 발을 멈추고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구나.”
“머?”
사내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되묻느라고 입을 살짝 벌리고 있을 때, 가브가 그의 입안에 두 손가락을 쑤셔 넣어 혀를 꽉 붙잡고 서슴없이 밖으로 뽑아냈다.
쥬아악!
“까아아아악!”
새끼손가락 길이의 붉은 덩어리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