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35
35화
발튼은 세실리아의 그릇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파리도 먹을 게 없겠구만.”
가브는 이제 다섯 그릇을 비운 발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뜻한 물을 끓이는 큰솥은 방마다 있는 것이 아니다. 따로 구석에 물을 끓이는 곳이 존재한다.
그리고 한 번 씻을 만큼 물을 쓰려면 따로 계산을 해야 한다.
“저거 계산하고, 씻으려고 합니다.”
“오리 열 마리 드셨으니까…… 7실버입니다. 뜨거운 물 넣어 드릴까요?”
“7실버…….”
가브는 가죽 주머니를 살피다가 검지를 들어 올렸다.
“한 방에만.”
“네, 그럼 7실버 80코퍼 주시면 되겠습니다.”
뜨거운 물은 한 번 씻는 양이 80코퍼로 오리 한 마리보다 더 비싸다.
가브는 떨리는 손으로 돈을 건네고 방으로 올라갔다.
“먼저 씻어라.”
바로 따라 올라온 발튼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제가 어떻게 그럽니까? 가브 님 먼저 씻으십시오. 전 운동 좀 하고 씻겠습니다, 요즘 너무 못 해서.”
“그래.”
발튼은 웃통을 벗고는 벽에 발을 기댄 채 팔굽혀펴기를 하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고강도의 운동을 하는 걸 보면 사람 같지 않은 괴력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닌 듯싶었다.
촤아악.
가브는 먼지로 가득한 몸을 욕조 안에 푹 담갔다.
차가운 한기가 뼛속까지 침투하며 머리까지 싸늘하게 만들었다.
‘검은 로브…….’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피부, 목에 가로로 길게 그어져 있는 선명한 흉터, 이미 죽은 자라는 증거다.
죽은 자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며 마법까지 쓴다면,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 리치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누구든, 어떤 존재든 상관없다.’
가브는 눈을 뜨고 정수리까지 담갔던 머리를 들어 올렸다.
가브는 욕조에서 나와 대충 물기를 털고 바로 가죽옷까지 챙겨 입었다.
그 모습에 발튼이 일어서며 물었다.
“어디 나가십니까?”
가브는 중검이 달린 허리띠를 채우며 대답했다.
“쉬어라.”
“옙, 대장.”
발튼에겐 아직 가브가 많이 어려운 상대다.
끼익.
복도로 나오자 이제 막 씻고 편한 원피스로 갈아입은 세실리아와 마주쳤다.
그녀는 가브의 복장을 훑어보며 말했다.
“협회에 가십니까? 같이 가시지요. 금방 갈아입고 나오겠습니다.”
“협회는 외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알잖아.”
“제가 왜 외부…….”
세실리아는 말을 하다가 자신이 사해를 나왔다는 것을 떠올렸다.
가브는 말문이 막힌 그녀를 보며 손을 휘휘 저었다.
“혼자 다녀오는 게 편해. 쉬어라.”
“……알겠습니다.”
세실리아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묵례를 하고는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 * *
알레트는 권위 있는 후작이 다스리는 영지로, 상업이 발달하고 인구가 많은 곳이다.
해가 떨어진 저녁에도 거리는 랜턴 불빛으로 낮처럼 밝고 사람들이 넘쳐 났다.
밤은 감성을 부르고, 감성은 이성을 바라게 한다.
“오빠, 쉬다 가요. 싱싱한 처녀부터 농염한 과부까지…….”
“아가씨, 나랑 한잔하지 않을려? 내가 게르티아 전장에서 백 명의 목을 베었던 무용담을 얘기해 주지.”
“꺼져, 냄새나.”
알레트 도심에는 네 군데의 광장이 있다.
그중에도 단연 사람이 붐비는 곳은 제국의 초대 국왕 이카로네 아슈의 동상이 있는 광장이다.
“팝니다, 팔아요. 집 나간 아내가 아침밥 차려 주게 만드는 묘령의 약이 단돈 5실버!”
“……론강을 따라~ 랜턴 빛이 별빛처럼 흐르고 있어, 너를 향한 나의 마음도~.”
알레트 밤거리, 한쪽에서는 잡품을 팔고 다른 한쪽에서는 악기를 다루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가브가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들러붙기 전에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사이, 뒤쪽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펜릴 백작님 납시오!”
“펜릴 백작님 납시오!”
다그닥, 다그닥.
“헤엑, 펜릴 백작?”
“펜릴 백작님이면…… 마법사 아니야?”
“오오, 마법사라니…….”
사람들은 놀람을 금치 못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철컥, 철컥.
금속 마찰음이 들린다.
가브가 지나왔던 길이 홍해처럼 갈라지며 번쩍이는 백금갑옷을 입은 기사들 네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에는 중무장한 병사들 스무 명이 따르고, 중심에는 새하얀 로브를 입은 중년인이 고고하게 말을 끌고 있었다.
중년인 앞에 깃발을 든 병사가 앞을 보며 다시 크게 외쳤다.
“펜릴 백작님 납시오! 길을 비키시오!”
병사의 외침을 들은 사람들은 너도나도 길을 트고 고개를 숙이기 바빴다.
그렇다. 이 세계에서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는 기사나 귀족보다 더한 귀인 대접을 받는다.
마물의 습격, 타국과의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곳에서 절로 탄성이 나올 만큼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 수가 판테르 대륙을 통틀어 백 명이 넘지 않는다는 희귀함도 마법사의 권위에 크게 한몫했다.
‘마법사라…….’
가브도 그렇게 전 대륙을 돌아다녔지만 마법사를 본 적은 손가락에 꼽는다.
웬만한 귀족들은 모두 마차를 애용하는데 이 마법사는 소탈한 듯 보였다.
마법사는 그 나라의 보물이기에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공작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니고 있다.
콩.
“아윽.”
펜릴 백작은 돌연 들고 있는 지팡이로 깃발을 든 병사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마법사들은 마나를 증폭시키는 매개체로 마정석이 달린 지팡이를 하나씩 지니고 있다.
“야, 이놈아, 적당히 좀 해! 쪽팔려 죽겠네.”
“예, 옙! 죄송합니다!”
콩, 콩!
“들려 들려, 다 들려. 내 귀청을 찢을 생각이냐?”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마나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연구하는 마법사들은 괴짜가 많다더니 펜릴 백작도 괴짜인 듯 보였다.
그렇게 요란한 행렬이 가브의 앞을 지나칠 때, 펜릴 백작과 가브의 눈이 마주쳤다.
가브는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가 눈을 마주치고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펜릴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요란스러운 무리가 지나가고, 가브는 다시 협회 본부로 걸음을 옮겼다.
제국 협회 본부는 초대 국왕 이카로네 아슈의 동상이 있는 광장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10년 전에 용병패를 얻기 위해 제국에 머무를 때 한번 지나치기는 했지만 감회가 새로웠다.
4미터 높이의 웅장한 문은 누구든지 들어오라는 듯이 당당하게 열려 있다.
안에 들어서니 넓은 로비와 많은 용병들이 먼저 보였다.
한쪽에는 의뢰 안내원이 있는 창구가 여덟 개 배치되어 있고, 왼쪽 벽면에는 마물 재료와 마정석을 매입하는 잡화점이 두 개 입점되어 있었다.
마정석은 오랫동안 살아남아 강해진 마물의 몸에서 구할 수 있는 마나의 결정체다.
현상금 사냥꾼 협회는 보통 마물 사냥꾼 길드로 위장되어 있다.
그리고 실제로 사냥꾼들이 마물 사냥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브는 사람이 없는 창구로 가서 의뢰 안내원 앞에 섰다.
안내원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기계적으로 말했다.
“어서 오세요 레이브 길드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바다 건너왔소.”
사해를 뜻하는 가브의 말에, 무표정하게 서류를 넘기던 안내원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동공이 흔들리고 손이 떨린다.
‘왜 이렇게 불안해하지?’
“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가브는 창구 안쪽 쪽문으로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해의 해수라는 존재가 집행관 역할이지만 이렇게까지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잠시 후, 안내원과 함께 깔끔하게 차려입은 중년인이 나왔다.
그는 안내원이 가브를 가리키자 금세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부본부장 코르소입니다. 먼 걸음 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예.”
코르소는 창구 앞 판을 들어 올리며 안으로 들어오라 손짓했다.
가브는 셀이 미리 연락을 했다는 말을 떠올리며 그를 따랐다.
쪽문으로 들어가 계단을 오르니 견고한 철문이 그들을 맞이했다. 여기서부터 협회인 것이다.
문을 여니 긴 복도가 나왔다.
양옆에는 크고 작은 사무실들이 많이 있었다.
코르소는 앞장서서 걸어가며 설명했다.
“아시겠지만, 우리 아슈 제국 협회는 다른 왕국들과는 달리 일곱 개의 지부가 존재합니다. 각 지부마다 등록된 암살자의 수를 합하면 만 명이 넘지요.”
“예.”
“그리고 이곳은 그 지부들 전부를 관리하는 제국 협회 본부로, 고용되어 있는 정예 대원만 삼백 명이 넘습니다. 웬만한 용병단은 물론 기사단도 단숨에 무너트릴 실력자들이지요.”
가브는 슬슬 지겨워졌다.
셀이 요청한 정보를 알려 줄 줄 알았는데, 코르소는 본부를 구석구석 돌며 얼마나 대단한 전력을 지녔는지 보여 주느라 바빴다.
“……이건 섬 왕국 파키에트에서 직수입한 무기들입니다. 머리카락을 떨어트려도 잘릴 정도로 날카롭고 미스틸 함유량이 3할이나 되어 강도가-.”
“이제 그만 정보를 듣고 싶은데.”
훈련실 안쪽에 장식된 무기들을 설명하던 코르소는 자신의 말이 끊기자 살짝 미간을 좁히며 뒤돌아서 눈을 마주했다.
“정보…… 드려야죠. 드려야 당연하지요. 그런데 태제가 바뀌었다고 들었습니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낸다. 가브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저희 본부장님께서는 직접적인 도움을 줬던 초대 태제의 부탁 외에는 다른 회원들처럼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움, 부탁, 단어 하나하나가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이자는, 아니 이들은 지금 상황을 미리 준비했던 것이 틀림없다.
“정보료라면 지급하지.”
“하하, 돈은 저희도 많습니다. 계신 곳은 백여 명도 되지 않는데도 강한 전력을 지녔다고 들었습니다. 과연 우리 정예 대원들에 비해 얼마나 대단하신지 궁금하군요.”
짝짝.
그가 손뼉을 두 번 치자, 한쪽 구석의 문이 열리며 근육질의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수는 스물이 조금 넘었다.
“뭐 하자는 거지?”
“사막 때문에 바다를 건너오신 분을 맞이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잖습니까? 저희 본부장님은 귀한 분께서 우리 쪽 대원들에게 한 수 가르쳐 주기를 원하십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일대일이니까.”
가브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코르소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게 사해에 대한 제국 협회의 대답인가?”
직설적인 물음에 코르소는 순간 멈칫했다.
그러다 눈동자를 움직여 뒤의 사내들을 한번 확인하고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
“본부장님은 사해의 일방적인 통보에 의아해하고 계십니다. 이번 일로 사해와 제국 협회와의 관계를 똑바로 정립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 본부장이란 작자는 입이 없나 보군, 당신한테 다 전달시키는 걸 보면.”
협회의 입장을 확인하자 말투부터 바뀐 가브였다.
본부장을 거론하자 뒤에 있던 근육질 사내들 몇 명이 움찔거렸다.
“저 새끼가…….”
“감히…….”
가브는 그들을 살짝 둘러보고는 뒤돌아서 단련실 출구로 걸음을 옮겼다.
“제국 협회의 생각은 잘 말해 주지.”
코르소는 가브의 뒤통수에 대고 이죽거렸다.
“역시 예상대로 해수는 소문만 무성했군요. 막상 마주하니 겁먹고 도망치는 꼴이란…… 쯧쯧.”
“큽, 크흑.”
“크크큭, 아, 웃겨.”
코르소가 혀를 차자 각을 잡고 있던 사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배를 부여잡고 비웃었다.
가브는 그들의 조롱에도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저긴 다 고아랬나? 저러니 부모가 버렸지. 나 같아도 버리겠다. 아니, 다 뒈진 건가?”
척.
가브의 발이 문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돌연 두 팔을 벌려 단련실의 양문형 문고리를 잡아당겨 문을 닫으며 입을 열었다.
“너희는 안 되겠구나.”
철컥.
가브가 쇠로 된 잠금장치를 채우자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뭐라는 거야, 이 미친 새끼가!”
가브는 바로 뒤돌아서며 선반에 있는 돌 아령을 낚아채어 욕을 지껄이는 사내를 향해 던졌다.
퍼억!
사내는 돌 아령에 얼굴이 함몰되며 뒤로 나자빠졌다.
가브는 완전히 돌아서 근육질 사내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교육 좀 받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