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43
43화
“하…….”
이엘 아이드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순간 다리가 풀려 주저앉으려는 것을 가브가 두 어깨를 잡아 주어 버틸 수 있었다.
푸른 드레스 여인은 재미있는 장면을 망쳤다는 생각에 눈을 흘기며 이죽거렸다.
“호위병이 몸을 막 만져도 놔두네? 누가 몸 팔러 온 창녀 아니랄까 봐…….”
뒷말은 작게 얘기했지만 이엘과 가브에게는 똑똑히 들렸다.
이엘은 그 모욕적이고 공격적인 언사에 정신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비웃음을 날리며 동감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아니라고 말하기만 하면 되는데 입이 잘 떨어지지가 않는다.
그때, 뒤에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과하시지요.”
아이드 남작가의 유일한 기사 멜론의 등장이다.
그는 이엘에게 등을 보이며 서서 푸른 드레스 여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뭐? 사과?”
“아이드가를 모시는 기사로서, 방금 아가씨께 하신 모욕은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라도 사과를 받아야겠습니다.”
“허 참, 목숨? 허틀 경, 쟤 뭐라는 거야, 지금?”
나이가 들었어도 기사는 기사다.
그가 뿜어내는 기백에 눌린 여인은 뒷걸음질을 치며 자신의 호위 기사 뒤에 숨었다.
허틀 경이라고 불린 기사는 바로 허리춤의 장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감히 제이니 아가씨를 겁박해? 죽고 싶은 게냐!”
“맞아, 죽고 싶은 거야?”
이엘은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재미있는 볼거리를 보듯이 웃음기로 가득한 시선들, 헤이달 남작과 장남 필립 헤이달마저도 같은 반응이다.
어디에도 자신의 편은 없다.
필립 헤이달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가 마치 도와준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짝, 짝, 짝.
“자 자, 분위기가 많이 어수선해졌는데 제가 파티의 흥을 돋울 겸 제안 하나 하겠습니다. 두 가문의 호위 기사가 결투를 하는 겁니다. 제이니 크레스의 기사가 지면 사과를 하고, 이엘 아이드의 기사가 지면…… 팔 하나를 자르는 걸로.”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휘유~!”
“와아아!”
“좋다!”
이엘은 자신을 첩으로 맞이한다는 필립이 편을 들기는커녕 자신을 이렇게 몰아세울 줄은 몰랐다.
연회의 주최자가 주도하자 분위기는 금세 고조되었다. 관중의 환호에 허틀은 검을 고쳐 잡으며 외쳤다.
“결투를 청합니다!”
이대로 결투를 받지 않으면 아이드 가문의 수치로 이어진다. 평생 아이드가의 기사로 살면서 자긍심이 높았던 멜론은 이를 꽉 깨물며 허틀에게 몸을 돌렸다.
“결투를…… 받겠습니다.”
“멜론 경!”
멜론은 이엘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 검을 빼 들었다.
필립 헤이달의 지휘로 연회장 중앙에 무대가 만들어졌고, 그곳에서 두 기사의 결투가 시작되었다.
멜론의 주무기는 양손검이었으나 연회장이니만큼 장검밖에 없었기에 그대로 결투에 임했다.
챙, 채쟁, 챙!
멜론은 노련하지만 나이라는 벽을 무시할 수 없었다.
허틀은 힘과 속도로 멜론을 몰아붙였고, 멜론은 힘겹게 공격을 흘리기에 바빴다.
‘이대로는 당한다. 반격으로 공세를 뒤집어야 돼.’
츠즈즈!
멜론은 옆구리를 향하는 상대의 검이 깊게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늦게 검로를 틀어 버리고, 겨드랑이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푹.
싸늘한 소리와 함께 장내에 정적이 왔다.
멜론은 소리와는 달리 자신의 손끝에 걸리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
반대로 멜론의 겨드랑이에 허틀의 검이 꽂혀 있다.
허틀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늙으면…… 뒈져야지!”
허틀은 검을 뽑고 번쩍 들어 올렸다가 수직으로 내려쳤다.
그 검로에는 멜론의 팔이 있었다.
스각!
“크흡!”
“꺄아아악! 아저씨!”
이엘은 멜론의 팔 절단면에서 솟구치는 피를 두 손으로 막으면서도 어쩔 줄 몰라 했고, 허틀과 제이니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제도 모르고 까불다가 기사 생활이 끝났군.”
“쯧쯧, 이제는 기사가 한 명도 없네요? 기사 없는 가문이라니…… 풉.”
이엘은 그들의 비아냥거림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어렸을 때부터 가문을 굳건히 지켜 주던 기사가 무너지는 모습에 정신이 팔렸을 뿐이다.
“어떡해, 어떡해! 누가 좀 도와주세요!”
“저, 저는 괜찮습니…….”
부우욱.
그때, 천이 찢어지는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옮겨졌다.
이엘의 호위병 가브가 윗옷을 벗고 맨손으로 거칠게 찢고 있는 것이었다.
“놓고 나와 보십시오.”
“예? 아-.”
가브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마주한 이엘은 자신도 모르게 피를 막고 있던 손을 놓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피가 울컥울컥 쏟아지는 멜론의 팔을 절대 놓지 않았을 것이다.
절단면은 겨드랑이와 팔꿈치 사이였다.
가브는 그 둘레를 천으로 빡빡하게 감아 혈관을 압박하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팔도 챙겨 들어 천으로 둘렀다.
“신관을 불러 주십시오.”
“신관, 신관이…….”
연회장에서 결투까지는 아니지만 대련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래서 연회장에 신관 한 명 이상은 항상 대기하고 있다.
이엘은 구석에서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하얀 로브의 신관을 발견했다.
그녀는 신관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신관은 귀족이 이끄니 어쩔 수 없이 끌려가면서도 헤이달 남작가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 필립 헤이달이 손을 들었다.
“아아, 패배했는데 다시 팔을 붙이면 그건 정당한 벌이 아니지, 안 그렇소, 신관?”
“예……옙.”
신관은 이엘의 손을 뿌리치고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는 고통에 신음하는 멜론과 신관을 번갈아 보다가 눈에서 눈물을 왈칵 쏟았다.
이게 모두 가문이 힘을 잃어 생기는 굴욕이다.
가지 말라는 마물 토벌에 나섰다가 쓰러진 아버지도, 자신만 생각하고 집을 나간 오빠도 모두 원망스럽고 이 상황이 저주스러웠다.
이엘은 주먹을 강하게 말아 쥐고 헤이달 남작가가 앉아 있는 상석 앞에 다가가 입술을 열었다.
“필립 헤이달 님, 저는 저와 제 가문을 괄시하는 당신의 첩으로 절대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병상에 계시는 아버님도 제 불행을 바라지 않으실 거예요. 돌아가서도 이곳에서 받은 곤욕을 떠올리며 하루하루 헤이달 가문을 저주할 겁니다. 그럼.”
이엘이 뒤돌아서는데 웃음 섞인 필립 헤이달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병상? 이런, 이런…… 아직 모르시는군. 나도 방금 전달받았는데, 폴 아이드 남작은 이미 죽었어. 늙어서 고비를 못 넘긴 모양이야, 쯧쯧.”
“뭐, 뭐라고요?”
필립 헤이달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엘을 내려다보며 이죽거렸다.
“당신은 방금 귀족의 명맥을 이을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찼어, 집안에 귀족도 없고, 귀족의 아내도 아니면…… 뭐지?”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아빠가…….”
이엘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충격에 빠졌다.
가브는 그 위태로운 뒷모습을 보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출정식을 참석한다고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게 아니었다.
출정식 때 병상에 있던 폴 아이드 남작이 죽는 게 우연일까?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가브는 이엘의 하녀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고, 그녀는 은밀히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평민이야, 평민……. 큭, 평민 주제에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우리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죄, 눈깔 똑바로 뜨고 가문을 저주한 죗값은 받아야지?”
헤이달 남작가는 애초에 이엘 아이드를 첩으로 받아들일 생각도 없었다.
적당한 명분을 뒤집어씌우고 무력으로 영지를 삼켜 버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실수였다. 차라리 출정식에 오지 말고 아이드성을 지켰다면 지금과 같은 일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앞당겨야겠다.
“아냐, 거짓말이야…….”
이엘의 눈동자가 환상에서 보았던 그 공허한 눈으로 변해 가고 있다.
필립은 그 모습이 재밌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필립 님의 마음이 바다처럼 넓어서 말이야, 딱 한 번만 다시 기회를 주겠다. 첩으로 들어와라, 그러면 식솔들은 살려 주겠다.”
가문에 정식 귀족이 없는 날로부터 3개월 뒤에는 자격이 강제 박탈된다.
그러면 공백지가 되어 모든 귀족들에게 균등하게 기회가 주어진다.
그 전에 필립 헤이달이 선수를 치려는 것이다.
“아…….”
식솔들은 살려 주겠다는 말에 이엘은 찬물을 끼얹은 듯이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 반대로 선택을 잘못하면 식솔들을 모두 죽인다는 말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물방울로 가득한 눈을 들어 필립과 멜론을 번갈아 보았다.
억울하지만 이렇게 죄를 만들어 내 힘없는 가문을 멸문시키는 것은 공공연히 일어나는 일이다.
게다가 이곳에는 친헤이달파 귀족들만 모여 있다.
이엘은 고개를 떨구며 닭똥 같은 눈물을 떨어트렸다.
헤이달 남작가의 음모와 현실을 깨달은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린다.
“그렇게 한다면…….”
그때, 이엘에게 그늘이 드리워졌다.
눈앞에 검고 넓은 등판이 펼쳐져 있다.
만난 지 하루 만에 자신의 모든 사연을 털어놓게 만든 이상한 남자,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의지하게 되는 남자. 호위병 가드였다.
그의 묵직한 목소리가 귀에 울려 퍼졌다.
“가문 문장도 개새끼더니…….”
크지 않지만 묵직한 목소리에 적막함이 더하여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아.”
“엉?”
“음?”
사람들은 물론 필립 헤이달마저도 잘못 들은 줄 알고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그의 다음 행동이 곧 제대로 들은 것임을 깨닫게 해 주었다.
“개소리를 잘하는군.”
“가……드…… 씨?”
가브는 필립 헤이달에게 한 손을 뻗어 앞뒤로 까딱거렸다.
이엘은 현실을 부정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불렀으나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평생 들어 볼 일이 없던 욕을 들은 필립 헤이달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가브에게 손가락질했다.
“저, 저놈이 지금 뭐라고 지껄인 거냐? 개새끼? 호위병 주제에 지금 하늘 같은 귀족을 능멸해? 오냐, 너는 내 손으로 직접 사지를 찢어 주마.”
필립 헤이달은 호위 기사가 건네는 자신의 검도 마다하고 팔소매를 걷으며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앉아 있을 때도 예측했지만 흉흉한 인상에 2미터가 넘는 거구의 필립은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웬만한 사람들은 기에 눌려 오줌을 지린다.
“대체, 대체 어떡하려고 이래요…….”
이엘 역시 가브의 등 뒤에 숨어 오들오들 떨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넌 뭐 하는 놈인데 이렇게 간이 배 밖으로 나왔냐?”
“나, 얘 오빠다.”
“미친놈, 네 혀부터 뽑아야겠구나.”
180이 넘는 가브보다 머리통이 하나 더 있는 필립은 저 멀리서부터 긴 팔을 쭉 뻗었다.
손바닥 크기는 가브의 얼굴을 완전히 가릴 정도였다.
가브는 등에 붙어 있는 이엘의 배를 손바닥으로 살짝 밀어 떨어트리고, 옆으로 몸을 틀어 필립의 손을 피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쿵!
필립은 순간 장이 한꺼번에 뒤집히는 느낌을 받았다.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위로 솟구쳐 오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옆구리에 가브의 주먹이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읍, 우웨엑!”
가브는 한 발만 뒤로 물려 필립의 구토를 피하며 말을 이었다.
“못 알아들은 것 같으니까 다시 말해 주지.”
가브는 건조한 눈으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아이드 남작가의 장남, 가츠 아이드다!”
동시에 가브의 주먹이 필립의 아래턱에 꽂혔다.
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