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54
54화
허틀은 제이니 크레스의 호위 기사로 배정되었을 때 행운이 왔다고 생각했다.
행동은 까칠하지만 얼굴도 반반하고, 귀족가 영애와 호위 기사가 연인으로 발전하여 가문을 잇는 경우도 드물게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맡아 보니 그 도도함과 까칠함의 정도가 훨씬 심했다.
게다가 툭하면 사고를 치고 뒷수습을 자신에게 맡겼다.
남작에게 배정을 바꿔 달라고 해야 하나 고민하던 때에, 일이 터졌다.
“꺄아아악!”
“습격이다! 마물의 습격이다!”
진녹색의 물결이 일렁인다.
마비 독침을 쏘는 고블린과 괴력 오크의 조합이다.
오랜만에 마물을 봐서인지 검을 쥐고 있는 손도 떨리는 허틀이었다.
‘제이니가 전장에 나갈 순 없으니, 내가 나설 일은 없겠지?’
“허틀 경! 뭐 해요? 얼른 가서 저 징그러운 무리를 막아요! 꺅! 주민들이 죽잖아!”
“네, 네? 예!”
‘시팔, 시팔!’
모시는 주군의 명에 불복한 기사에게 미래는 없다.
허틀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전장에 뛰어들었다.
-크라!
-크로크 마투!
챙, 채앵!
괴력의 오크들과 무기를 마주 부딪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백이면 백, 손아귀가 찢어지거나 무기가 부러진다.
기사인 허틀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간신히 몇 번 받아칠 수는 있지만 위험하고 비효율적인 방법이다.
그래서 공격을 피하거나 흘리고 반격으로 놈들을 상대해야 하는데, 그 뒤에서 고블린들이 손가락만 한 마비 독침을 쏘아 대니 오크들만 있는 것보다 훨씬 까다로운 조합이었다.
서걱.
“내가!”
푹!
“쉬어도!”
뎅겅!
“네놈들한테 당하진 않지!”
허틀은 오크 몇 마리를 잡고 나니 예전에 몸을 사리지 않고 전장으로 뛰어들었던 그때의 감각이 살아나며 자신감을 되찾았다.
기사답게 전체가 밀리는 와중에도 빛처럼 활약하던 때에, 유독 아래턱 송곳니가 긴 오크가 소리쳤다.
-카툴, 캅!
놈의 외침이 들리기가 무섭게 오크 세 마리가 허틀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집중 공격 명령임을 눈치채고 재빨리 뒤로 빠졌다.
푹.
그때 발목 언저리에서 싸늘한 느낌을 받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작은 가시가 각반 이음매 사이에 박혀 있었다.
“이런 젠장.”
마비 독은 치명적이지 않은 대신 빠르게 퍼져 나간다.
벌써 발가락에 감각이 없는 듯하다.
-케로타!
그때 오크 한 마리가 거대한 양손도끼를 내려찍었다.
허틀은 뒤로 피하려다가 오른발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그대로 공격을 받았다.
채앵!
“끄악!”
허틀은 다급하게 검을 들어 도끼를 받았지만, 검이 안쪽으로 꺾이며 그의 한쪽 어깨에 도끼가 깊이 박혔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해 한쪽 무릎이 접힌 상태였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
허틀은 도끼가 뽑히기도 전에 먼저 검을 고쳐 잡아 놈의 목을 향해 찔러 넣었다.
챙그랑!
오크는 예상했다는 듯이 손쉽게 한 팔로 허틀의 검을 쳐 냈다.
무기를 잃어버린 허틀은 순간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을 뒤덮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팔, 안 돼. 난 아직 동정이란 말이야…….’
-카툴-!
오크의 거대한 양손도끼가 허틀의 머리통을 쪼개기 위해 내리쳐졌다.
허틀은 순간 주마등이 스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
쩌어엉!
그때 귀를 찢는 파공음과 함께 양손도끼가 허틀의 바로 옆의 흙바닥을 찍었다.
허틀은 고개를 돌려 위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앞에 등을 보이고 우뚝 서 있는 한 남자가 보인다.
마주 오는 햇빛과 오크의 그림자 때문에 누군지 식별이 가지 않는다.
쿠우웅!
뭘 어떻게 했는지 눈앞의 오크가 금세 뒤로 나자빠졌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가 걷히며 반쯤 고개를 돌린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 다, 당신은…….”
“죽으면 안 되지. 뒤로 빠져.”
그는 그 말만 남기고 바로 다른 오크들을 향해 튀어 나갔다.
그 남자, 가브는 고블린들이 어디에 있든 상관하지 않고 오크 무리로 파고들어 검을 마음껏 휘두른다.
마비 독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크들을 방패막이 삼아 마비 독이 날아올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세 마리 사이에 초근접하여 공격이 서로 얽히게 하거나, 공격을 원하는 방향으로 흘려 다른 오크를 공격하게 한다.
가끔은 괴력 오크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드는 압도적인 힘으로 도끼를 쳐 내고 목을 베어 버린다.
오크 무리를 사냥하는 그의 신들린 무위에 허틀은 물론 위케리스도 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가히…… 압도적이다.’
촤악!
“대장! 정신 차려!”
“아, 어, 그래. 고맙다.”
위케리스는 눈앞에서 쓰러지는 고블린을 보고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검을 추켜올렸다.
수년 간 맞춰 온 팀워크로 오크들을 찬찬히 처리해 나가면서도 위케리스의 머릿속에는 가브가 싸우던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대륙적으로 유명한 용병대의 대장도, 백여 명의 기사단을 이끄는 기사단장도 만나 봤지만 저렇게 부드럽고 위력적이지 않았다.
위케리스는 검을 강하게 움켜쥐며 다짐했다.
‘이분이다. 우리의 평생을 바칠 군주.’
오크는 코볼트만큼이나 지능이 높은 마물로 유명하다.
특유의 광기가 없었다면 인간은 오크에게 지배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전문가의 견해도 있었다.
크레스 남작가가 머무는 라마논 마을을 덮친 오크들은 가브 일행의 개입에 전세가 바뀌자 퇴각했다.
크레스 남작은 눈에 확 띄게 활약을 한 가브 일행을 발견하곤 포상을 주기 위해 불러들였다.
‘허업! 저, 저 남자는…….’
가브를 알아본 제이니는 입을 틀어막고 허틀을 찾았다.
그러나 허틀은 부상으로 치료를 받느라고 곁에 없었다.
턱이 뾰족하고 이마가 좁아 까다로운 인상을 주는 크레스 남작이 가브에게 두 손을 뻗으며 반겼다.
“활약을 지켜보았소! 덕분에 그 무식한 오크 놈들에게서 마을을 지킬 수 있었소! 이거 보상이라도 좀 해 주고 싶은데, 어디 가문의 사람이오?”
가브는 크레스에게 살짝 묵례를 하고는 대답했다.
“처음 뵙습니다. 저는 가츠 아이드라고 합니다. 따님과는 구면이군요.”
“가츠…… 아이드?”
크레스는 아이드라는 성을 듣고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지은 죄가 있으니 마음 편히 환영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 온 목적은, 제가 새로이 남작 작위를 받아 약소하게나마 축하를 받고 싶어서였습니다만, 말씀하신 대로 목숨을 걸고 마을을 지켰으니 조금 더 욕심을 내야겠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오? 욕심이라니…….”
가브의 직설적인 말에 크레스 남작이 당황할 때, 제이니가 튀어나왔다.
“저기요! 저한테 볼일이 있는 거 아닌가요? 왜 개인적인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들어요? 아주 병사들까지 데리고 웃겨, 진짜.”
“정말 개인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럼 뭔데요? 이엘 씨가 잘 먹길래 더 주려던 거고, 그게 그쪽은 자존심이 상해서……. 아, 그 늙은 기사의 팔을 자른 것 때문에…….”
그때 크레스 남작이 제이니의 거침없는 입을 막았다.
“그만! 그 입 닥치거라. 넌 모르겠느냐?”
“뭐, 뭘요?”
“이분은…… 다 알고 오신 거다.”
괜히 영주가 아닌 듯, 크레스 남작은 제 분수를 알고 상황 판단이 빨랐다.
제이니가 가장 앞장서서 이엘에게 모욕을 준 것에는 개인 성향의 영향이 크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크레스 남작은 환영할 때와는 다르게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가브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무엇을 원하시오?”
가브는 무심한 눈으로 크레스 남작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크레스 남작령.”
“뭐, 뭣이?”
“이 사람이 진짜! 미쳤어요?”
가브는 길길이 날뛰는 제이니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지진이라도 난 듯이 눈동자가 흔들리는 크레스를 보며 말을 이었다.
“세금의 5할. 울타리는 견고하게 다시 세울 것이고, 오늘 같은 마물의 습격을 막기 위해 정예부대가 주기적으로 토벌에 나설 것입니다.”
“지금…… 같은 작위에게 귀속되라는 말이오?”
같은 작위끼리는 귀속 계약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크레스 남작의 얼굴은 처음보다 훨씬 일그러져 있었다.
가브는 그에게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1년은 가계약입니다. 그때도 동일한 작위라면 귀속을 해제하고 현재와 동일하게 모든 권리를 양도하겠습니다.”
크레스 남작은 자신도 모르게 1년간 그에게 바칠 세금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했다.
지금은 마을 울타리도 망가지고 젊은 사람들도 많이 죽어 내외부로 치안이 취약하다.
그런데 귀속이 된다면 들어오는 돈은 확 줄어들지만 이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이다.
지금 막 남작을 달았는데 1년 만에 승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처음에는 어이없었지만 지금 상황에 그리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답 시간이 길어지자 가브가 살짝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선택권이 있는 게 아닙니다만.”
적어도 열 살은 더 젊은 사람이 자신의 식솔들 앞에서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니 갑자기 확 자존심이 상하는 크레스 남작이었다.
“지금 내 땅에 와서, 나를 겁박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예.”
가브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그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명분도 넘치고, 전력도 넘칩니다.”
크레스 남작의 눈썹이 심하게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사병의 수는 이쪽이 더 많지만 마물들을 잡을 때 물 만난 듯이 날아다니던 그들의 활약이 떠오른 탓이다.
“저의 제안이 원인에 비해 가볍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네.”
“아빠!”
아무것도 모르는 망아지 같은 제이니가 또 날뛰려고 했다.
가브는 그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1년간은 가계약이니 인질을 데려가겠습니다.”
“인질?”
크레스 남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이니는 그보다 더 크게 떴다.
그때 집회실 안쪽 문으로 어깨에 붕대를 칭칭 감은 허틀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제이니 아가씨가 가는 곳은 어디든 가서 지키겠습니다!”
그렇게, 가브 일행은 돌아갈 때 인원이 두 명 더 늘었다.
* * *
가브 일행이 아이드 성으로 귀환했을 때, 멜론과 발튼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세실리아는 가브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그런데 사병들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몇 명은 얼굴에 피멍이 들어 있고, 몇 명은 팔다리에 붕대를 감고 있다.
“주군 오셨습니까?”
“쟤네들은 왜 저러지?”
가브의 말에 사병들이 바짝 군기가 들어 큰 소리로 외쳤다.
“예, 각하! 도적들을 만났습니다!”
“영주님이 물으시는데, 더 자세히 말해야지?”
세실리아의 말에 사병들은 땀을 삐질 흘리며 더욱 크게 외쳤다.
“고전했지만 대장님께서 처리해 주셨습니다!”
“대장님께서 처리해 주셨습니다!”
“음…… 신체 부위가 잘린 사람은 없나?”
속사정을 눈치챈 가브는 진심으로 물었다.
사병들은 이유도 모르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예, 없습니다!”
“없습니다!”
“그 도적이 살살 다뤘군. 고생했다. 들어가서 쉬어.”
“예, 각하!”
사병들을 들여보내고 난 뒤, 세실리아는 가브 뒤의 두 남녀를 가리키며 물었다.
“쟤넨 뭡니까?”
“천한 것이 감히! 내가 누……!”
퍽.
“꺽!”
한창 눈높이 교육을 하고 온 터라 세실리아의 주먹은 거침이 없었다.
제이니 크레스는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코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기절했다.
“아가씨, 아가씨!”
허틀은 뒤로 넘어가는 제이니를 한 손으로 잡아 줄 뿐, 전처럼 결투를 신청하거나 길길이 날뛰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의 시선은 쌍코피를 흘리는 제이니가 아니라 세실리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가브는 건조한 눈으로 제이니와 허틀을 보며 대답했다.
“인질.”
“아하.”
사신단 원정은 예상대로 성공적이었다.
멜론은 본래 정했던 보상보다 더 많은 이익을 약속받았다.
이제 안정적으로 남작령을 관리하며 승작을 위해 활약해야 할 때다.
‘1년 안에…… 그들의 눈에 든다.’
가브의 흑안이 날카롭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