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65
65화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그레이성이 있는 네브리아까지는 이틀 거리로, 하루 종일 달리면 한나절 만에 도달할 수 있다.
내성 문을 통과하자 연회복을 입은 중년인이 그곳에서 마차를 멈춰 세웠다.
그러고는 정중하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
“연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집사 데프입니다. 초대장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가브가 마차 창문을 열고 초대장을 내밀자, 집사는 그것을 확인하고 무언가를 같이 건네었다.
검은색 바탕에 흰색 깃털이 눈썹처럼 달려 있는 가면이었다.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연회는 모든 참석자분들이 가면을 쓰고 진행됩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가브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창문을 닫았다.
그는 집사가 준 가면을 이곳저곳 살펴보고 냄새도 맡아 봤다. 수상한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익명이 보장되는 곳, 원래부터 알던 자는 외형만으로도 눈치채겠지만 처음 본다면 누가 왔었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연회가 열리는 대전은 바깥문이 활짝 열려 있고, 정갈한 연회복을 입은 집사 둘이 입구에서 사람들을 맞이했다.
가브가 도착하자, 집사 중 한 명이 안으로 안내하며 외쳤다.
“서른일곱 번째 참석자님 들어가십니다!”
안에는 모두 가면을 쓰고 있었다.
가면은 제각기 다르게 생겼다.
표범이나 토끼 같은 동물을 표방한 가면들도 있었다.
“어서 오세요.”
“가면 연회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반가워요. 전에 뵀던 분인가? 아닌가?”
가브가 들어서자 몇 명이 다가와 그를 반겼다.
전에 만난 그레이 남작처럼 사람들의 분위기와 말투는 모두 친절했다.
연회는 본래 알던 연회와 조금 달랐다.
자리 자체가 중앙이 넓어 춤을 출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갖가지 음식이 차려진 원형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대전 상석 뒤에는 성인 몸통만 한 크기의 시계가 걸려 있었다.
시계가 정각을 가리키자 대전 안쪽 문에서 그레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하얀색에 입꼬리가 올라간 가면을 쓰고 있었다.
“가면 연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제 연회에 가면을 쓰는 이유는, 서로의 배경과 작위를 보지 않고 편하게 대화를 나누기 위함입니다. 그럼, 오늘도 즐겁고 소중한 만남의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는 상석에서 내려와 다른 사람들과 개별적으로 인사를 나눴다.
주변에 대기하던 호위병들은 귀족들에게 다가가 착석을 권유했다.
귀족들은 어느새 모두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한 테이블에 여섯 명이 앉을 수 있게 배치되어 있었다.
“오늘 이렇게 멋진 분들과 동석하게 되어 영광이에요.”
“제가 더 영광이죠, 레이디.”
“저는 이 연회만 기다렸어요, 어찌나 신선하고 재미있던지.”
사람들은 서로 초면인 것 같았지만 가면을 써서 그런지 어색하지 않았다.
가브의 옆에는 진녹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앉았다.
그녀는 어깨를 훤히 드러내고 가슴도 반쯤 드러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여기는 혹시, 처음이세요?”
“예.”
“어쩐지……. 이렇게 감사할 수가. 남작님이 또 좋은 일을 하셨구나. 앞으로도 자주 뵀으면 좋겠어요.”
“예.”
외형을 보고 낯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처음이라는 말에 같은 테이블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가브에게 관심을 보였다.
“처음이시구나. 혹시……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님? 아, 이런 질문은 하면 안 되나?”
“금지한다는 말은 없죠, 하하.”
가브는 질문한 사내를 바라보며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였다.
“예.”
“오, 저는 아직 아버님이 정정하셔서, 하하하. 그럼 제가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됩니까? 영주 교육받다가 궁금한 게 생겨서.”
“하십시오.”
“사람이 이 세계의 해악이오, 마물이 해악이오?”
그의 질문에 테이블은 순간 정적이 흘렀다.
어색함을 참지 못한 진녹색 드레스 여인이 헛웃음을 흘렸다.
“흣, 짓궂으시다. 처음 오셨다는데 당황하시겠어요.”
“농담 아닌데…….”
가브는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헷갈리시오?”
“예? 아, 뭐, 그냥 다른 영주님들의 생각이 궁금해서…….”
“마물은 악마와 같은 생물이라 하여 마물이라고 칭하오. 진정 헷갈리시오?”
가브의 목소리에는 무형의 기운이 담겼다.
사내는 형용할 수 없는 압박감에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 아, 난 그저 다양한 생각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에……. 여기가 그런 자리 아니오? 하하하.”
그가 멋쩍게 웃으며 애꿎은 음식만 해체시켰다.
진녹색 드레스 여인이 가브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눈웃음을 지었다.
“명쾌하시네요. 이 세상을 살다 보면 뭐가 옳고 그른지 헷갈리는 것들이 많지요. 자신의 기준이 바로 서서 신사분처럼 명쾌하게 단정 지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후로도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은 가브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자기들끼리 대화를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가브가 중심이었다.
“혹시 엘프를 본 적이 있으신가요? 엘프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요? 세상이 엘프건 정령이건 모두가 함께 어울려서 살아가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
“아까는 그리 말씀하셨지만, 역사를 되짚어 보면 마물보다 인간이 이 판테르 대륙에 가장 큰 피해를 끼친 건 사실입니다. 120년 전의 트롤 로드 사건…….”
“저도 동감합니다. 어쩌면 마물은 우리 인간들을 심판하기 위해 온 하늘의 사자일 수도…….”
“전에 토벌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그 작고 어린 오크들도 무참히……. 이게 정녕 옳은 것인지 신에게 되묻게…….”
사람들은 주로 제국에서 이뤄지는 정책과 인간과 마물에 관련된 인과관계에 대해 토론했다.
얼핏 보면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다각도로 상황을 보고 생각할 수 있는 눈을 트이게 하는 것 같지만, 그 방향은 교묘하게 ‘인간은 해악이다.’라는 의식이 심기게 만들고 있었다.
같이 대화를 하고, 다른 사람들이 동조하거나 깨닫는 모습을 보며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들의 생각에 물드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세계로 이끄는 방법…….’
가브는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가끔 불편한 기색을 비쳤지만 연회가 끝날 즈음에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어머, 이렇게 생각이 깨어 있으신 분일 줄 몰랐어요. 처음에는 너무 무서웠는데,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신께 정말 감사하네요.”
진녹색 드레스 여인은 은근하게 가브의 손을 만지며 눈웃음을 지었다.
동이 틀 때쯤, 그레이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건넸다.
가브 차례가 되자 악수를 청하며 싱긋 웃었다.
“자리는 어떠셨습니까?”
“피곤하오.”
“하하, 즐거워 보이시던데. 그럼 다음에는 오지 않으실 겁니까?”
“생각해 보겠소.”
“꼭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건조한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겁니다.”
“예, 그럼.”
가브는 돌아서 걸음을 옮겼고, 그레이는 그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 * *
알레트 변방의 한 주점, 구석에 사람들이 몰려 있다.
한 상인이 거칠게 생긴 사내들에게 소리쳤다.
“50골드!”
“아이, 안 한다니까.”
“60골드! 더 이상은 안 돼!”
“안 한다고! 안 해! 꺼지라고! 우리가 목숨이 두 개냐?”
“왜 엄살이야, 진 와이번도 잡았다며? 사실상 제일 잘나가는 토벌대 아니야?”
상인 앞에 마주 앉은 사내, 게스기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아, 몰라. 가. 당분간 안 받으니까.”
“에잇! 더럽게 비싸게 구네! 내가 딴 애들 쓴다, 써. 퉤!”
“어허, 저게 진짜.”
게스기에게는 이번 일주일 사이에만 수십 건의 마물 사냥 의뢰가 들어왔다.
가격도 높게 측정되었지만 그중에는 게스기의 토벌대가 감당하지 못할 토벌 건이 절반이었다.
이게 모두 진 와이번 사냥의 소문 때문이었다.
가능한 건은 대충 가격을 올려서 받고 처리하면 되지만 게스기는 마음 한구석 어딘가 허전한 것을 느꼈다.
“대장, 근데 왜 죄다 돌려보내요? 우리 돈 그렇게 많아? 나는 왜 안 줘?”
“아, 썅. 좀 닥쳐. 생각 좀 해 보자.”
“예이.”
게스기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시팔, 나를 욕해도 된다. 때려도 된다. 떠나도 된다. 난 지금 당장 가츠 아이드 자작한테 갈 거니까, 따라올 사람은 따라와.”
“예?”
“누, 누구요?”
“그, 거, 아, 어…….”
“대장! 같이 가!”
게스기의 대원들은 몇 명을 제외하고 그의 뒤를 쫓았다.
아이드 내성 입구, 가브 앞에는 게스기를 포함한 열 명의 사내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게스기는 고개를 푹 숙이며 크게 소리쳤다.
“자작님! 저희를 받아 주십시오! 제가 미쳤었습니다! 오만했습니다! 자작님처럼 위대하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싸가지 없이 굴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 인성 때문에 받지 않는다 하시면 인정하고 물러나겠습니다!”
게스기는 진심으로 보이기 위해 몰래 눈을 찔러 눈물까지 흘려 보였다.
가브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위케리스 십인대를 보며 대답했다.
“난 인성은 안 본다. 훈련받으면 되니까.”
그의 말에 십인대원들이 몸을 떨었다.
게스기는 감동하여 고개를 들어 올려 가브와 눈을 마주했다.
“감사합…….”
“너희는 십인대와 마찬가지로 특수 임무를 위한 훈련을 받을 것이다. 낙오된다면 일반 사병들과 함께 훈련을 받는다. 잘 받을 수 있겠는가?”
“예! 각하!”
“예, 각하!”
가브는 자기 자신의 삶이 당당하지 않기 때문에 부하가 될 사람이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든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앞으로의 행동만 엄격히 지켜볼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검을 쓸 만한 사병이 부족한 마당에, 위케리스 십인대와 비등한 실력을 지녔다는 그들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저벅저벅저벅.
위케리스는 건들거리며 다가와 게스기의 턱을 잡으며 말했다.
“앞으로 선배님이라고 불러라.”
“뭐, 뭐, 이 갯!”
게스기는 욱했다가 가브를 힐끔 보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긋, 그러겠습니다, 선배님.”
“그렇지, 후배님. 선배한테 예쁨받으려면 열심히 하라고, 엉?”
“아오.”
“후…….”
위케리스는 속 터져도 욕 한마디 못 하는 그의 대원들을 보고 낄낄 웃으며 뒤돌아서 갔다.
위케리스의 십인대원들도 그 모습에 통쾌함을 느끼며 전에 있던 앙금이 조금은 깎인 듯했다.
훈련은 다음 날부터 바로 시작되었다.
가브가 처음으로 단체 훈련을 시켰던 위케리스 십인대원들의 정보를 토대로 단계를 나누었다.
첫 번째는 기초가 되는 체력 단련이다.
이쪽에 일가견이 있는 발튼이 교관이 되었다.
“이렇게 보니까 더 반갑네. 걱정하지 마. 그때 일 때문에 막 굴리고 그런 사람 아니야.”
“예예. 잘 부탁드립니다, 발튼 교……관님.”
발튼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외쳤다.
“자, 나는 생존에 가장 기초가 되는 체력 단련을 맡은 발튼이다! 잘 따라오면 너희들의 몸이 한 달 만에 강철이 되는 기적을 보여 주겠다! 힘들면 언제든 나가도 된다! 죽지 않는다! 그럼 갑옷 착용! 연병장 백 바퀴만 돌고 시작한다!”
발튼은 손수 자신도 철갑옷을 착용하고 앞장서서 연병장을 달렸다.
“헉, 헉, 헉. 저 괴물 새끼, 헉, 커헉.”
게스기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간신히 내뱉으며 저 멀리 달리고 있는 발튼을 욕했다.
예전에는 몰랐다.
자신이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초인적인 체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발튼은 훈련을 항상 함께했다.
무게는 배는 더 무겁게 하여 ‘지가 해 보라지.’라는 핑계 따위는 떠올릴 수 없게 만들었다.
“대, 대장, 미안해. 나는 진짜 못 버티겠다.”
“이거 너무한 거 아니야? 원래 이런 거 아닌 것 같아. 앙심 품고 이러는 거야. 난 더러워서 못 하겠다. 간다. 너나 잘해.”
강도 높은 체력 단련은 생사를 오가는 토벌을 다녔던 대원들도 버티기 힘들었다.
첫 번째 일정 일주일 만에 절반의 낙오자가 생겼다.
두 번째 일정은 기술 훈련이었다.
세실리아가 교관으로 소개될 때, 남은 다섯 명은 드디어 고생 끝에 낙이 왔다며 환호했다.
“교관님, 예뻐요!”
“참아 낸 보람이 있다!”
“얼른 훈련받고 싶습니다!”
세실리아는 목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바로 시작합시다.”
세실리아의 훈련은 실전 대련 위주였다.
우두둑!
“크악! 교, 교관님! 뼈가!”
“안 죽습니다. 그대로 있어요. 다음.”
훈련 중에 뼈가 부러지면 치료하고 부목을 댄 후에 그곳을 사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훈련을 이어 갔다.
게스기와 대원들은 두 번째에서 지옥을 맛봤다.
세실리아의 ‘다음’이라는 말을 꿈에서라도 들으면 소변을 지렸다.
그렇게 일주일이 거의 다 지날 즈음에, 의리로 버티던 대원들이 게스기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대장, 미안한데 나는 이제 못 하겠어. 그냥 일반 사병들이랑 같이 훈련받을래. 특수 임무는 무슨…….”
“나도 그만할래. 이러다 병신 되면 내 처자식 어떡해?”
남은 인원은 게스기까지 총 세 명, 게스기는 형제처럼 지냈다고 생각한 부하들이 떨어져 나가자 마음이 괴로웠다.
복도에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게스기를 발견한 위케리스가 다가왔다.
“뭐 하냐? 안 그래도 없는 머리 더 뜯으면 꼴 보기 싫어.”
“건드리지 마라, 선배님아.”
위케리스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 옆에 섰다.
“네가 자초한 일이야, 난 네가 이때까지 버틴 게 의외다. 생각보다 끈기가 있어.”
“허, 이 정도쯤은 1년 내내 받아도 된다.”
“그래? 다행이군. 내일부터가 진짠데, 기대할게.”
위케리스는 게스기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게스기는 순간 진심을 느끼고 안색이 파래졌다.
그는 위케리스의 뒤통수에 대고 중얼거렸다.
“아니지? 농담이지?”
다음 날, 연병장 중앙에는 가브가 서 있었다.
그는 진검을 빼 들고 남은 세 명을 맞이했다.
“어서 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