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67
67화
…….
킁-.
달콤한 향이 풍겨 왔다.
참을 수 없이 자극적이어서 뻑뻑한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낯선 곳이다. 천장이 마치 신전처럼 매우 높다.
등이 딱딱하고 차갑다.
상체를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파란 돌로 되어 있는 작은 동굴이다.
철컥, 철컥.
팔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내려다보니 팔다리에 족쇄가 채워져 있다.
“아…… 으.”
어쩌다 여기에, 이런 꼴이 되었을까?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을 더듬으려는데 잘 떠올려지지가 않는다.
짙은 안개에 가려진 것만 같다.
일단 여기서 탈출해야 한다.
먹을 것도 먹고 싶다. 저 달콤한 향을 따라가야겠다.
철컹, 철컥, 철컹!
조금만 더 하면 끊어질 것 같다.
팔을 더욱 강하게 흔들자 살가죽이 벗겨지고 하얀 뼈가 드러났다.
그 징그러운 모습을 보니 고통이 밀려왔다.
“아, 아.”
턱, 턱, 턱, 턱.
그때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회색 로브를 입은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소리쳤다.
“어, 일어났다! 일어났어! 신관님, 신관님!”
그녀는 몸을 돌려 왔던 길과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곧이어 붉은색 로브를 입은 사내가 함께 등장했다.
둘 다 후드를 깊게 눌러써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신관은 가까이 다가와 인자한 어투로 물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에, 아…… 어기가, 여기가 어디임, 나르을 애…….”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나, 나이 이르믄…… 어, 헤…….”
이내 신관이 실망한 표정을 짓는다.
그는 한 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였다.
“여길 보십시오.”
“어…….”
손금만 있던 손바닥에 혈선이 동그랗게 생기더니, 살 껍질이 벗겨지며 붉은 눈알이 나왔다.
“타, 탐스러……. 어 어?”
신관의 손바닥에 생겨난 눈이 이상하게 징그럽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 아래 손목에 익숙한 문양이 눈에 띈다.
기억 속에 있던 것이다.
“어…… 배, 뱀…….”
그 반응에 신관은 확 미간을 좁히더니 손을 쭉 뻗었다.
퍽!
* * *
아이드 성 성주의 침실, 가브는 외출 전에 진 와이번 내갑을 입었다.
내갑은 옷처럼 상의와 하의로 나뉘어 있다.
상의는 팔꿈치에서 한 치 아래, 하의는 무릎에서 두 치 아래까지 덮는다.
착용감이 상당히 좋다.
착용감을 위해 안쪽을 특수 처리를 했다는데 마치 일반 부드러운 천 옷을 입은 듯했다.
칼슨이 땀 배출을 위해 구멍을 뚫었었지만 자가 복원력으로 인해 다시 메워졌다고 한다.
회복력이 발휘되지 않을 정도로 크게 뚫는 해결책이 있었지만, 착용자들의 반대로 뚫지 않았다.
스슥.
가브는 그 위에 정복을 입었다.
내갑이 얇아 입은 티도 나지 않았다.
정복 안주머니에는 진 와이번의 송곳니로 만든 단검을 넣었다.
영주가 쓴다고 특별히 남은 가죽으로 검집까지 만들어 준 것이다.
검신만 한 뼘 길이인데도 다른 단검들보다 훨씬 가볍다는 장점이 있다.
끼익.
침실을 나오자 이미 진 와이번 가죽갑옷을 차려입은 세실리아가 보였다.
“모시겠습니다.”
가브는 발을 멈추고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아직 아니야.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아.”
세실리아의 얼굴에 순간 서운함이 깃들었다가 사라졌다.
그녀는 한 걸음 물러나 절도 있게 묵례했다.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가브는 평소와 같이 마부 한 명만을 데리고 그레이 남작령의 에르디 마을로 향했다.
초대장에 기재된 주소를 따라 베기스의 마구간이라는 곳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밀짚모자를 눌러쓴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가브를 발견하고는 마구간 문을 열었다.
“그대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마부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를 몰아 마구간 안으로 들어갔다.
밀짚모자 사내는 가브의 초대장을 확인하고는 그 안쪽에 있는 문을 열고 앞장섰다.
안쪽은 하차프 자작을 미행할 때 발견했던 곳과 마찬가지로 긴 동굴이 이어져 있었고, 그 끝에는 두꺼운 철문이 있었다.
사내는 품에서 입꼬리가 올라간 하얀색 가면을 꺼내어 가브에게 건넸다.
가브가 하얀 가면을 받아 들자 사내는 열쇠로 자물쇠를 따고 문을 열어 주었다.
“끝나면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가브는 자물쇠를 딸 때 살짝 내려간 소매 아래로 그의 손목을 살펴보았다.
뱀 문양이 보이지는 않는다.
가브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100미터는 될 법한 긴 복도가 나왔다.
중간중간에 다른 철문들도 보인다.
복도 끝의 꺾어지는 길에는 경갑을 입은 병사 하나가 다른 귀족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쪽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가브는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복도는 네모, 철문은 한 면에 세 개, 위로 올라가는 계단은 한 개.’
지키고 있는 병사가 많지는 않지만 구조가 단순하고 복도가 밝아 숨어들기는 쉽지 않은 곳이다.
위로 올라가자 천장이 높은 소극장 같은 공간이 나왔다.
계단식의 관중석이 있고, 앞에는 가로세로 30미터 정도 되는 공터가 있었다.
특이한 것은 마치 콜로세움처럼 공터와 관중석 사이가 두꺼운 벽으로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귀족들은 띄엄띄엄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그 수가 서른 명은 되어 보였다.
그들도 공통적으로 호위 기사나 종자 한 명도 데리고 오지 않았다.
“흐, 언제 시작하나.”
“너무 일찍 왔군.”
“오셨습니까?”
“아, 어, 그래요. 자주 보는군.”
그들은 모두 동일한 하얀 가면을 썼는데도 서로서로 알아보는 듯했다.
자주 마주한다면 어떤 귀족인지는 몰라도 전에 봤던 사람이라고는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거나.
관중석 끝에서 딱 붙는 가죽 원피스를 입은 여인 두 명이 번호가 적힌 막대를 나눠 주기 시작했다.
가브도 뒤쪽에 앉아 무언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그때 누군가가 옆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처음 오셨군.”
낯익은 목소리. 전에 흑마법사로 의심되어 미행했던 하차프 자작이다.
그로 인해 이곳을 알게 되었었다.
가브는 그를 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예.”
“역시, 반갑소. 행운아시군.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는 들어 보셨소?”
“아직.”
하차프 자작이 몸을 조금 더 틀어 본격적으로 말하려고 할 때, 공터 한쪽의 철창문이 열리며 검은 가면을 쓴 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귀족들에게 깊이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오늘도 이렇게 아레아에 찾아 주신 회원님들께 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그의 말에 가브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연회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검은 가면의 공통점이 떠올라서다.
‘이들은…… 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
여러 신이 있으니 이름을 붙이는 것이 기본이건만,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 분명하다.
이들은 평소에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다른 신을 섬기고 있다.
검은 가면은 천천히 관중석을 둘러보고는 다시 입을 떼었다.
“그럼, 시간이 늦었으니 바로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목소리, 체격, 눈동자, 무엇을 봐도 중개인은 그레이 남작은 아니다.
짝짝.
검은 가면의 중개인이 손뼉을 치자 입구에서 수십 명의 젊은 남녀가 걸어 나왔다.
또각또각또각또각.
높은 굽의 구두에 속살이 비치는 붉은 원피스를 입은 여인들, 검은 바지에 하얀 셔츠는 단추를 네 개나 풀고 나오는 사내들.
그들은 공통적으로 수려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귀족들은 의자에서 등을 떼고 열심히 상품들을 살폈다.
이어서 하차프 자작이 옆에서 설명을 덧붙였다.
“당황스러울 거요, 아무런 설명도 없었을 테니. 이 아레아에서의 경매는 저 특상품들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오. 이곳에서의 하룻밤만 빌리는 것이지.”
“그럼 큰돈이 오가지는 않겠군요.”
“모르는 소리, 돈이 넘치는 귀족들은 갖지 못하는 것들에 더 환장을 하지. 나도 그래서 여길 끊지 못하는 거고.”
하차프가 막 입을 다물었을 때, 타이밍에 맞춰 한 귀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0골드.”
“7번 10골드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세 번 호가하겠습니다. 10골드, 10골드, 10골드, 낙찰입니다.”
10골드, 노예를 사는 가격에 노예와 하룻밤을 보낸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미모의 상품들은 금세 팔려 나갔다.
“어때, 마음에 드는 상품이 있소?”
“잘 모르겠소.”
“어허, 전국 미인들이 이곳에 모여 있건만, 저들은 집에 가면 널려 있는 애들이랑은 격이 다르오.”
가브는 하차프 자작이 이렇게 말이 많은 자인 줄 처음 알았다.
말이 많으면 실수도 잦다. 가브는 그가 살짝 흥분한 것을 보고 슬며시 물었다.
“솔직히…… 그가 날 왜 이곳에 초대했는지 잘 모르겠소.”
“그? 아…… 음…… 이건 여기에 몇 번 오고 점수를 좀 따야만 알 수 있는 건데, 내가 그대에게는 특별히 알려 주겠소.”
가브가 귀를 기울이자 그가 작게 말을 이었다.
“저 경매는…… 매개체에 불과하오. 진짜는 저 위에 있소.”
“위?”
하차프는 천장을 가리키며 한껏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아레아는 일반 등급과…… 로열 등급으로 나뉘어 있소. 로열 등급은 저 상품들이 경매에 나오기 전에 먼저 택하는 것은 물론이고, 제국의 앞날을 논한다고 하지. 제국 권력의 핵심들이 모여 있거든.”
“누가 말이오?”
가브의 물음에 하차프는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야 나도 모르지? 아무튼 그런 소문이 있소. 그래서 나도 아득바득 등급을 올리려고 노력 중이고.”
“등급은 어떻게 올리는 것이오?”
“당연히……. 그건 나중에, 여기! 5골드!”
하차프는 자신의 딸뻘 되어 보이는 소녀를 낙찰받았다.
상품을 구매한 귀족들은 뒤의 들어왔던 입출구로 나갔다.
하차프는 소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확 끌어안고 가브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반가웠소. 다음에 또 봅시다.”
그 손을 보던 가브는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마주 잡았다.
가브의 키가 더 커서 하차프는 필연적으로 손을 살짝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가브는 그사이 살짝 내려간 소매 안쪽을 살폈다.
“예, 가십시오.”
하차프는 별 의심 없이 미소 지으며 자리를 떴다.
가브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있다.’
그의 손목에는, 아가리를 쩍 벌린 뱀의 옆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경매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가장 비싸게 팔린 상품은 우람한 체격의 사내로, 150골드에 낙찰되었다.
낙찰받은 귀족은 열 손가락에 금반지를 낀 중년 여인이었다.
경매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제 경매장에 남은 귀족은 가브뿐이었다.
상품도 다섯 명밖에 남지 않았다.
“자…….”
적막해진 경매장, 중개인은 몸을 돌려 가브와 눈을 맞추었다.
“회원님, 마음에 드는 상품이 없으십니까?”
가브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여인을 가리켰다.
“1골드.”
지목받은 여인은 얼굴에 화색이 돌며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여인의 몸에는 뱀 문양이 없었다.
“선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여인은 자연스럽게 가브의 팔짱을 끼며 가슴을 팔에 대었다.
그 물컹한 감촉에 가브가 발을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
“죄, 죄송해요. 잡지 않을게요.”
가브는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잠시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여인은 고개를 푹 숙이고 반걸음 앞장서서 출입구의 계단을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