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69
69화
“출전 검투사들, 앞으로!”
검은 가면이 외치자 번호가 적힌 목걸이를 걸고 있는 노예들이 나와 일렬로 줄을 섰다.
경매 때와는 달리 그들은 녹슨 무구를 걸치고 있었다.
노예들의 표정은 다양했다.
절망, 공포, 비장……. 긍정적인 표정은 아무도 없었다.
몇 명이 투구를 썼어도 그 너머로 우울한 눈빛은 감출 수 없었다.
장벽 하나로 다른 세상에 있는 귀족들은 그들을 보며 환호했다.
“와아! 오늘만 기다렸다!”
“3번! 너로 찍었다!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면 내가 먼저 죽인다!”
“오, 7번 뭐야, 몸이 좋네. 내가 왜 저런 애를 못 봤지?”
“우승자는 진리지! 11번! 오늘도 부탁한다!”
명예와 품위를 중시하는 귀족들도 이곳에서는 본능을 따른다.
크게 소리치고 마음껏 악한 마음을 분출한다.
어쩌면 이런 독특한 환경 때문에 귀족들은 아레아에 더 중독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 베팅을 시작하겠습니다.”
간절한 응원을 첨가하기에는 베팅만 한 것이 없다.
가죽 원피스를 입은 여인들이 바구니를 들고 다니며 티켓을 나눠 주었다.
그곳에 베팅할 검투사들의 번호와 금액을 쓰고, 첫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티켓을 다시 걷어 가는 방식이다.
여자 셋에 남자 여덟, 신체적 한계 때문에 여자 검투사에게 베팅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가장 마지막 번호, 11번은 전 회 차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우승자로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분위기에 맞게 아레아는 베팅 금액 제한이 없었다.
가브는 몸의 균형이 잘 잡힌 5번 검투사에게 1골드를 베팅했다.
아껴 써야 한다. 수만 골드를 호가하는 진 와이번 테라의 사체를 조금도 팔지 않았기 때문에 영지 운영자금은 언제나 부족하다.
“모두 베팅을 끝내셨습니까? 네, 그러면 바로 1회전 1경기 시작하겠습니다!”
“와아아아아!”
“얼른 해라!”
“다 찢어발겨!”
투기장 오른쪽 철창문이 열리며 녹슨 무구를 갖춰 입은 여인이 강제로 밀려 나왔다.
그리고 그 반대편의, 벽으로 생각했던 철문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드드드드드드.
-키히야아…….
철문이 올라가며 어둠 속에서 마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덜너덜한 옷, 뜯긴 목, 잇몸과 이빨이 훤히 드러난 얼굴, 몸을 기어 다니는 구더기.
스윽, 슥, 스윽, 슥.
모로 꺾인 한쪽 발을 질질 끌며 걸어가는 그것은, 죽어도 죽지 않은 인간, 좀비였다.
“으, 으, 으아!”
여인은 그 기괴한 모습에 두려움에 떨며 투기장 구석으로 도망쳤다.
좀비는 천천히 여유롭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저리 가!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여인은 좀비를 피해 장벽으로 도망치며 귀족들에게 애원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아이 씨! 뭐 하는 거야!”
“빨리 싸우든지 뒈지든지!”
“야! 내 손에 죽고 싶어?”
그 반응에 여인은 절망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
콱!
“헉.”
꽈득, 꽈드득.
“아, 아…….”
여인은 좀비에게 목을 한 움큼 물어뜯겼다.
새빨간 피가 분수처럼 쏘아져 나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거참, 맛있게도 먹네.”
“에이, 재미없어.”
“빨리빨리 진행합시다.”
그때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장벽 위에 있는 검은 가면이 손을 들어 주먹을 쥐어 보이며 신호를 보내자, 열심히 여인을 물어뜯던 좀비가 그 시체를 끌고 나왔던 곳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었다.
‘사령술!’
마물은 인간이 조련할 수 있는 종이 아니다.
수천 년 전에 갑자기 나타나, 인간을 파괴하기 위해서만 사는 놈들이다.
인간이 조종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마족의 힘이 담긴 사령술밖에 없었다.
전 대륙에서 사령술과 같은 흑마법은 금기되어 있건만, 귀족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다.
가브는 오늘도 옆자리에 앉아 열심히 설명해 주던 하차프 자작에게 물었다.
“저건 사령술 아니오?”
“아, 맞지. 맞는데, 그냥 재미를 위해 몇 명만 두고 하는 거요. 안 그러면 마물을 어떻게 조련하겠소? 그러다 더 큰 일 터지지. 사령술사들이 피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재미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겠소?”
말을 하는 하차프의 눈동자에 순간 붉은 기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그도 흑마법을 연구하는 자다.
사령술사일 가능성이 크다.
“음…….”
가브는 포도 씨가 목에 걸린 것처럼 마음에 불편함을 느끼며 고개를 돌리다가 등골이 오싹해졌다.
수십 개의 하얀 가면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그들에게 속마음이 들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가브는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어디서도 보지 못할 구경거리를 위해서…….”
“그렇지. 귀한 곳이오. 사소한 것을 생각하느라 큰 것을 놓치면 아니 되오.”
“예, 아레아만의…… 매력이죠.”
그제야 하얀 가면이 하나둘씩 시선을 거뒀다.
가브는 이마에 식은땀 한 방울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한 명도 이곳의 법칙에 의아함을 제기하지 않는 이유, 이곳에 열광하는 귀족들만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우아악! 우악! 우악! 우악!”
마지막 11번 검투사가 도끼를 우악스럽게 휘둘러 좀비의 머리통을 두부처럼 으깨고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 야수 같은 모습에 귀족들은 환호했다.
“오우, 좋아!”
“역시 우승자! 멋있다!”
“재미를 좀 아네.”
좀비와 싸우는 1회전이 끝났고, 열한 명 중에 다섯 명이 살아남았다.
다른 노예들이 나와 바닥에 널브러진 살 조각들을 정리하는 사이, 검은 가면이 나와 귀족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다들 재밌게 즐기고 계십니까? 느릿느릿한 것들은 역시 너무 시시하죠? 이제부터 더욱 격렬해질 겁니다. 2회전! 시작하겠습니다!”
2회전이 시작되자 여유롭게 좀비를 잡았던 5번 검투사가 잔뜩 긴장하여 몸을 움츠렸다.
드드드드드드.
철문이 반쯤 올라갔을 때, 그것을 못 기다리고 거무튀튀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캬하악!
바닥을 네발로 뛰며 빠르게 상대에게 덤벼드는 그것은, 이미 썩을 대로 썩어 버린 구울이었다.
“핫, 하앗!”
텅, 텅!
5번은 한손방패로 놈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견제하다가 그 힘에 밀려 바닥에 엎어졌다.
“아이고, 뒈졌네.”
구울이 맹수처럼 그에게 달려들 때, 뾰족한 검이 놈의 등 뒤로 툭 튀어나왔다.
털커덕.
5번은 심장이 뚫린 구울을 옆으로 치우고, 침착하게 방패로 머리를 으깨었다.
“와아아아!”
“5번! 네가 해낼 줄 알았다!”
“나도 쟤한테 걸 걸 그랬나. 잘하네?”
5번은 그 큰 환호에도 단 한 번도 귀족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터덜터덜 안으로 돌아갔다.
구울의 기량은 천차만별이었다.
운이 좋아야만 살아남는 것이다.
2회전은 5번과 몸이 가장 좋은 7번, 단둘만이 살아남았다.
전 회 차 우승자 11번은 구울을 이겼지만 팔을 물렸고, 결국 다시 나오지 못했다.
저벅저벅.
정갈한 발소리, 고개를 돌려 보니 하얀 가면을 쓴 거구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레이 남작이다.
이상한 것은, 하차프 자작이 조용히 일어나 자리를 비켜 주는 것이었다.
그가 찰나에 풍겼던 기운은 두려움이었다.
그레이는 자연스럽게 가브 옆에 앉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잘 즐기고 계십니까?”
“나를 왜 여기에 초대했는지 모르겠군.”
“다들 처음에는 그러십니다. 가장 깊은 곳에 꽁꽁 숨겨 둔 감정을 공유해야…… 진정한 형제가 되는 겁니다.”
“형제라…….”
“잘 적응하시는 모습을 보니 뿌듯합니다. 궁금하신 점은 없습니까?”
“로열…… 등급에 대해 알고 싶소.”
가브의 물음에 그레이가 스윽 고개를 돌려 하차프를 보았다.
하차프는 뜨끔하여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레이는 다시 가브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하얀 가면 너머로 입매가 보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로열 등급은…… 여러 가지 혜택을 가집니다. 경매 때 상품을 먼저 선택할 수 있고, 검투사들의 정보를 미리 알 수도 있지요. 그중에 가장 큰 것은…… 4층, 로열 층입니다. 그곳에서도 모두가 가면을 벗고 만나지요. 아주 끈끈한 친목이 도모되는 것입니다.”
“등급을 올리려면?”
“간단합니다. 경매에 쓸 상품을 데리고 오면 됩니다. 상품의 질에 따라 점수가 주어지죠, 상품 평가는 외모와 지식, 순결과…… 강함을 봅니다.”
“상품을 많이 데리고 오면 금방 되겠군.”
그레이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한 상품이 열 명의 가치를 지닐 때도 있지만, 많이 데려오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도 없지요. 하지만, 점수를 채운다고 바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승급 시험을 치를 자격이 주어지는 거지요.”
“시험?”
“예, 시험 내용은…… 저도 모릅니다.”
“번거롭군.”
그레이는 주먹을 입에 대고 쿡쿡 웃음 지었다.
“아레아에 큰 관심을 가져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호기심이오.”
“좋지요.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그레이는 기분 나쁜 말을 남기고 일어나 묵례를 하고는 미소 지으며 자리를 떴다.
대망의 3회전이 되었다.
3회전은 살아남은 자들이 모두 나와 팀을 이루고 마물들과 싸우는 것이다.
“나는 진짜 3회전이 제일 재밌더라.”
“다 잃었어도 아직 집구석에 안 들어가는 이유지.”
5번과 7번이 비장한 표정으로 투기장에 들어섰다.
곧이어 철문이 열리며 구울 세 마리가 튀어나왔다.
그중 한 마리는 다리 한쪽이 잘린 구울이었다.
툭!
구울들이 가까워졌을 때, 5번이 7번의 등을 발로 찼다.
7번이 배신감에 당황하는 사이 구울 두 마리가 그를 덮쳤다.
와작, 와그작!
7번의 몸이 분해되는 사이, 5번이 빠르게 구울 두 마리의 머리를 부수고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구울을 처리했다.
잔혹하지만 똑똑한 수였다.
“와아아!”
“5번! 5번! 5번!”
“저거 진짜 인물이네. 아깝네, 아까워.”
귀족들은 그의 행위에 열광했고 아까워했다.
투기장 출전이 확정된 검투사들은 아무리 귀족이 원한다고 해도 데려갈 수 없다.
단 한 가지 예외로, 3회 우승을 하여 챔피언이 되었을 경우에 로열 귀족이 데려갈 수 있다.
5번은 싸늘한 눈으로 관중석을 한번 훑고는 철창문으로 돌아갔다.
가브는 그날 5번 검투사 덕분에 140골드를 벌었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그레이의 별장에서 돌아와 잠을 청한 지 두 시간 만이었지만, 마나로 단련된 몸은 이 정도 휴식이면 충분했다.
“오라버니!”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이엘이 방정맞은 걸음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얼른 일어나셔요! 밖에 백, 백작님이 와 계세요!”
가브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큰 공을 세워 자작의 작위에 올랐어도, 친분을 쌓는다고 고고한 백작이 직접 찾아오지는 않는다.
이렇게 당돌하게 찾아올 백작은 단 한 명뿐이다.
가브는 간단히 세수를 한 뒤 테라경갑을 걸치고 응접실로 나갔다.
평소에 겉옷 대신 걸칠 만큼 가볍고 위화감도 없어서 즐겨 입었다.
응접실에 도착하자, 펜릴 백작이 마시던 차를 내려놓았다.
“두 시간 기다렸다.”
“이렇게 연락 없이 오시면, 두 달을 기다리실 수도 있습니다.”
“에이, 나쁜 놈.”
가브는 까칠한 말과는 달리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그에게 묵례를 했다.
“자작 됐다며?”
“그렇게 됐습니다.”
“기사 시험 본다며 징징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아무튼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가브가 맞은편 자리에 앉자, 펜릴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가브는 조용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 헬턴 그레이랑 노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