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78
78화
“헙.”
소년은 눈을 번쩍 떴다. 푸르스름한 석벽, 양쪽에 걸려 있는 횃불, 꿈에서 봤던 공간이다. 똑같은 악몽을 반복적으로 꾸는 느낌이다.
철컹, 철컹.
두 손과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다. 꿈에서 봤던 것보다 두 배는 더 크고 두꺼운 것이다.
“꾸미, 꿈이…… 아니야.”
꿈처럼 몽롱하게 떠오르는 기억들은 현실이다. 신관이라고 불리는 자가 몇 번이나 손바닥 눈알을 보여 주었다가 기절시키기를 반복했고, 족쇄를 끊고 움직이자 더 큰 족쇄를 채운 것이다.
“도망쳐야 하는데…….”
소년은 손을 들어 손목에 채워져 있는 족쇄를 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다. 손끝에 마치 테두리처럼 검은 아지랑이가 미세하게 일렁이고 있었던 것이다.
휙, 휙.
손을 따라 옅은 잔상을 남기며 따라온다. 손뿐만 아니라 다리, 몸통에도 검은 아지랑이가 보였다.
“이게…… 머지?”
소년은 손을 흔들다가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그러자 그곳으로 검은 아지랑이가 확 모이며 선명한 검은색으로 이글거렸다. 다시 손바닥을 펼치자 그것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파란색이 아니었어.”
검은 아지랑이가 지나간 자리에는 본래의 색이 잠시 보였다가 다시 파란색에 덮였다.
석벽이 파란색이 아니라 모든 것이 파랗게 보이는 것이었다. 자신의 피부마저도. 그러나 처음 깨어났을 때에 비해 많이 옅어진 것을 보면 곧 제대로 된 색을 구별할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소년은 검은 기운이 실체화될 수 있고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것으로 족쇄를 간단히 풀어내고 방을 나섰다.
“얼른 여기서 도망쳐야…….”
그러나 복도로 나가는 순간 훨씬 진해진 달콤한 냄새에 발끝을 반대로 돌렸다.
“배고파…….”
그가 도착한 곳은 동그란 방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시체나 다름없어 보이는 인간 열 명이 벽에 딱 붙은 채 족쇄로 묶여 있었고, 하나같이 발목 뒤의 절반이 잘려 있었다.
그들의 발목에서 나오는 피는 원뿔형으로 기울어진 방 한가운데로 흘러내려 가 주먹만 한 구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소년은 그것을 보고 머리를 해머로 두들겨 맞은 듯한 충격에 빠졌다. 자신이 미친 듯이 찾아 헤매던 달콤한 향이 저곳에서 가장 강하게 풍겼기 때문이다.
소년은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돌렸다. 기억이 없어도 사람을 이렇게 죽이고 피를 모으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판단할 수 있었다.
“나가야 해, 나가야 해, 끄……찍한 일을 당할 꺼야.”
마음 같아서는 뛰어가고 싶지만,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마치 제 몸이 아닌 것처럼 어색하다. 소년은 비틀거리면서 복도를 거닐었다.
“엇, 어엇!”
“여기! 신도님이 탈출했어요!”
그를 발견한 회색 로브를 입은 사람들은 저마다 놀라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이대로 다시 잡혀서 잠들 순 없다.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삶의 의지가 강할수록 머리는 차가워지고 시야는 또렷해졌다.
“이, 이거 놔아!”
소년이 팔을 신경질적으로 털자 사람들이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그 괴력에 본인이 더 놀랐다. 뒤에서 몸통을 껴안은 사내가 얼어붙은 게 느껴진다.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가, 각성…….”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두려움이 느껴진다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소년은 허리를 감싸고 있는 그의 두 팔을 잡고 앞으로 쭉 당겼다.
끄지직-.
“아아아악!”
사내의 두 팔이 뜯겨 나가며 달콤한 향이 훅 풍겨 왔다. 소년은 인상을 쓰며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내던지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몸을 감싸는 검은 기운은 꽤 먼 곳까지도 영향력을 끼쳤다. 그러나 멀어질수록 그 힘은 약했고, 가까워지면 강했다.
퍽, 푹!
“크학!”
소년은 검은 기운의 힘을 빌려 도주를 방해하는 무리를 처치하며 나아갔다. 인간 같지 않은 짓을 행하는 이들을 죽이는 데에 망설임은 전혀 없었다.
“어, 어서 신관님을…….”
‘신관?’
손에서 눈알이 나오는 자가 떠올랐다. 그 눈을 보고 있으면 어지럽고 머릿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며 괴로웠다.
소년은 재빨리 뒷걸음질을 치며 신관을 부른다는 자에게 손을 뻗었다. 쏜살처럼 뻗어 나간 검은 기운은 그의 몸을 칭칭 감아 소년에게 데려왔다. 소년은 그의 머리를 잡고 서슴없이 힘을 주었다.
“배고파, 배고파……. 머리도 아파, 머리 아파……. 도망쳐야 해. 얼른 여기…….”
척.
소년의 발이 갑자기 멈추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다. 어둠이 일렁이더니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얼굴이 왠지 낯익다.
둘이 대치하고 있는 그 억겁 같은 찰나의 시간이 중저음의 목소리에 깨어졌다.
“헤……딘.”
“헤……딘?”
‘헤딘, 헤딘, 헤딘……. 헤딘 케리에드!’
이름을 듣는 순간, 헤딘 케리에드의 머릿속에 짙게 드리워진 안개가 걷히고, 산산조각 나 있는 기억들이 마구 뭉치고 뒤엉켜졌다.
기억이 뒤죽박죽이지만 눈앞의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있었다.
“누, 누님? 어, 얼굴은 예쁜데 승질은 더러운 세, 세실리아 누님? 누님!”
스슥.
헤딘이 반가움에 두 손을 뻗으며 다가가자, 세실리아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송곳을 앞세웠다.
“너, 뭐야?”
헤딘은 그녀의 태도에 당황과 깊은 서운함을 느끼며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내리쳤다.
“나, 나, 나예요. 헤딩, 헤딘, 케리…….”
세실리아는 시선을 내려 그의 가슴을 보며 중얼거렸다.
“말도 하고 마법도 쓰는 구울이라…….”
헤딘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피부는 살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창백하고, 심장 부분에는 선명한 흉터가 보였다. 살가죽을 꿰매지 않아 안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곳에는 새까맣게 변한 심장이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헤딘은 그 모습에 피를 달콤하게 느낀다는 것을 알았을 때보다 더한 충격에 빠졌다.
“뭐지? 뭐지? 아니, 아니야! 아니에요! 나, 나는 죽기 싫어!”
그는 울음을 터트리며 현실을 부정했다. 세실리아는 사방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송곳을 더욱 가까이 했다.
“헤딘.”
“아니야! 이건, 내가, 아니야…….”
“헤딘!”
“내가 죽……. 예! 예?”
“네가 정말 그 꼴이 되었어도 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봐.”
“어, 어떻게…….”
세실리아는 들고 있는 송곳을 휙휙 저으며 말을 이었다.
“돌아서서 앞장서. 지금부터 주군을 찾는다.”
“주군? 주군?”
“너의 스승. 걸리적거리는 놈들은 다 죽여 버려, 네가 직접.”
“아! 네, 네, 넵! 누, 누님은 더럽게 세지만! 뒤, 뒤만 따라와요!”
헤딘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뒤돌아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세실리아는 다시 어둠 속으로 스며들며 그의 뒤를 천천히 쫓았다.
* * *
‘지독한 걸 마셨군.’
가브는 시체처럼 몸이 축 처진 채 기사 두 명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맹독만큼은 아니지만 마비 독도 면역력이 강한데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것을 보면, 새로 조합시킨 강력한 마비 독인 듯하다.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건 눈꺼풀뿐이다.
가브는 끌려가며 주변을 머릿속에 넣었다. 꽤 먼 길을 끌려가 도착한 곳은 깊은 동굴 안이었다.
기사들은 사방이 돌로 되어 있는 방으로 데려가 가브를 벽에 붙이고 팔다리, 목에 족쇄를 채웠다.
그레이는 가브의 몸을 천천히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볼수록 놀라운 몸이군요, 기절도 하지 않다니. 당신이 씨앗이라면 참 좋았을 텐데.”
알 수 없는 단어에 의문을 품자, 눈을 마주친 그레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 태어날 때부터 마의 씨앗을 지닌 분들이 있습니다. 선택받은 분들이죠. 물론 저나 당신은 해당되지 않습니다만…….”
가브는 눈을 깜빡이며 손가락을 부들거렸다. 아직 성대도 혓바닥도 뻣뻣하게 굳어 있는 것이다.
그레이는 안간힘을 쓰는 가브의 손가락 끝을 보곤 피식 실소를 흘렸다.
“애쓰지 마십시오. 이르테의 독은 오우거도 하루 종일 기절시킬 정도로 강하고 귀한 독입니다. 눈을 뜨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지요…….”
그레이는 가브의 눈앞에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신의 힘은 거짓이 아닙니다. 그 피에는 신의 힘을 조금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성스러운 피가 담겨 있었습니다. 당신은 마모트 님의 힘을 입어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마모트, 발튼의 환상에서 들었던 이름이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손바닥에 혈선이 생기더니 살 껍질이 천천히 벗겨졌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벅저벅저벅.
사람의 발소리는 마치 지문처럼 미세하지만 각기 다르다. 그레이는 그 발소리의 주인을 짐작하고 바로 손을 내리고 휙 돌아섰다.
그 타이밍에 맞춰 입구로 검은 로브에 후드를 깊게 눌러쓴 중년인이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장로님.”
“내가 직접 하지.”
장로라고 불린 검은 로브 중년인의 목소리는 마치 칼로 철판을 긁는 듯이 거북하고 위험했다.
그는 들어왔을 때부터 가브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레이는 다급히 발을 옮겨 자리를 비켜 주었다.
가브 역시 그림자로 가려진 그 얼굴을 뚫어질 듯이 노려보았다.
가브와 가까이에서 눈을 마주한 장로는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는 후드를 벗었다. 그의 목을 두르고 있는 선명한 흉터가 돋보인다.
“오랜만이야, 가츠. 이렇게 보니 더 반갑네.”
깊이를 알 수 없는 새까만 눈동자,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피부, 깔끔하게 쓸어 넘긴 새하얀 머리칼, 한때는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가브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초대 태제 카로스였다.
가브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카로스는 자신의 목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널 보니 여기가 또 시큰거리는 느낌이야. 가츠, 목 잘리는 기분 알아? 당장 겪게 해 줄까? 응? 말해 봐.”
그레이는 장로의 처음 보는 모습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부장으로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항상 감정이 없고 냉혹한 모습만 보았던 것이다.
카로스는 두 손으로 가브의 얼굴을 부여잡고 위협적으로 말을 내뱉다가 손을 내렸다.
“아니지, 아니지.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너 같은 놈을 또 어디서 구할 줄 알고. 그렇지? 근데…… 우리 잘나신 가츠 님께서 여기는 왜 오셨을까? 설마, 동생의 비밀을 알아냈어?”
카로스의 말에 가브의 눈이 부릅떠졌다. 대충 짐작은 했지만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것은 천지 차이다.
카로스는 혼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이유가 어찌 됐건 이제 상관없지. 나도 네가 와서 기쁘다. 이번에는 완벽하게 나의 충성스러운 부하가 되려무나.”
그는 말을 끝내고 가브에게 손바닥을 보였다.
손바닥에 검은 선이 생겼지만 피는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살 껍질이 벗겨지며 손바닥을 거의 전부 차지할 만큼 커다랗고 징그러운 눈알이 생겨났다.
가브는 그것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았지만 양옆에 있는 기사들이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가브의 동공이 텅 비었다. 이성은 눈을 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사람이 낼 수 없는 소리가 울렸다.
-Θα σου……. δώσω δύναμη…….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다.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강대한 힘이 느껴진다. 그런데 목소리가 드문드문 끊기는 것이 이상했다.
“끄, 끄으으…….”
몸이 갑자기 전에 피의 잔을 마셨을 때처럼 터질 듯이 뜨거워진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푸화아악!
그때 카로스의 손바닥에 나 있는 눈알이 터져 나가며 검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가브의 눈에 초점이 돌아오자 카로스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너, 너, 넌 대체 뭐냐!”
뚜둑, 뚜두둑-.
가브는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봉하고 있는 족쇄를 뜯어내고, 손목을 돌리며 카로스와 눈을 마주했다.
“나도 반갑다, 카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