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8
8화
가브는 밤까마귀에서 나와 베라카의 옷부터 구매했다.
여자아이가 누가 봐도 성인 남성의 것으로 보이는 윗옷만 입고 다리는 훤히 드러내고 있으니 이상한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에런의 말에 신경이 더 쓰여서 그런 시선들이 잘 보인 것일 수도 있다.
“와아…… 역시 도시는 옷도 다 예쁘구나.”
하얀 블라우스에 옅은 갈색의 멜빵 원피스를 입은 베라카는 촌의 아이답지 않게 세련되어 보였다.
“가브, 원래 이렇게 돈 많았어요? 아빠가 쥐꼬리만큼 줬다고 했는데…….”
“그 영감이…….”
점원이 입구 쪽으로 발을 옮긴다. 가브는 헛기침을 하며 품에서 실버를 꺼내어 계산하고 바로 옷 가게를 나왔다.
그렇게 새로운 옷을 입히고, 좋은 여관에서 식사를 배 터지게 하고, 하룻밤 머물렀다가 아침 일찍 다시 다그 마을로 출발했다.
쏴아아아아.
높은 산맥 아래 푸르른 초원을 말을 타고 달리자, 베라카는 눈을 감고 두 손을 활짝 펼치고는 바람을 만끽했다.
“아- 시원하다. 좋다.”
베라카는 생전 처음 보는 험상궂은 사내들에게 납치를 당하고, 같은 마을 언니가 겁탈을 당하다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보고,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배가 갈려 창자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지금 앞에는 푸르른 초원이 펼쳐져 있고 등 뒤에 든든한 가브가 있으니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베라카는 가브가 해 줬던 말을 되새겼다.
“꿈이야, 꿈…….”
그녀는 지금 누구보다 나쁜 기억을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가브는 아무 말 없이 박차를 가했다.
* * *
“가브, 가브가 왔다!”
“베라카를 데리고 왔어!”
“가브가 돌아왔다!”
마치 기사 시험이라도 합격하고 온 것처럼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함성을 지르며 둘을 맞이했다.
납치를 당했던 마을 처녀들은 눈물까지 뿌리며 가브에게 달라붙었고, 촌장과 그의 아내는 맨발로 뛰어나와 베라카를 안아 들었다.
“오,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아…… 베라카, 내 딸, 이리 와…… 흐읍.”
“가브 님, 오셨습니까!”
마지막에는 마을 사람들에게 맞았는지 얼굴이 퉁퉁 부어 오크와 더 닮아진 발튼이 허리를 팍 숙였다.
가브는 그와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동의 재회가 한창인 이때, 덩치 큰 청년 한 명이 한 걸음 떨어져 가만히 지켜보다가 뒷걸음질로 벽에 다가가 풀썩 앉았다.
“후……흡.”
마을 청년들을 이끌고 나갔던 사내였다. 그가 그렇게 용기 냈던 이유, 순박한 미소를 잘 짓던 레이샤는 구울이 되었고 가브가 직접 목을 잘랐다.
이미 다른 여인들에게 그녀가 살해당했다고 얘기를 들었지만 가브가 돌아왔으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와 봤던 것이다.
가브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 * *
가브는 이번 납치 사건에 귀족이 엮여 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말한다면 자신이 소엘 남작의 막내를 죽였다고 시인하는 것과 마찬가지고, 같은 이유로 어차피 영주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경우라고 해도 귀족을 살해한 죄를 서민이 사형 이외에 다른 벌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내일은 교역장에 가야 하네. 밀이 떨어진 집이 많아.”
다그 마을처럼 외지고 작은 어촌에는 자급자족할 수 있는 물품들이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주마다 아랫마을에서 열리는 교역장에 들러 필요한 물품을 교환하거나 구매해서 온다.
그러나 최근 2주 동안에는 납치 관련 일로 장에 들르지 않아 마을 사람들이 불편을 겪고 있었다.
“예, 준비하겠습니다.”
“오! 가브가 간다면 안심이지.”
“나도, 헤시한테 가브도 같이 간다고 걱정 말라고 해야겠다.”
내일 교역장에 함께 갈 청년들이 가브의 동행에 한시름 놓았다. 최근에 도적들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있기 때문이다.
“가브 님이 가신다면 저도 가겠습니다!”
가브가 마을로 귀환하자 베라카보다 더 달라붙어 다니는 발튼의 목소리였다. 가브는 고개를 돌려 건조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넌 마을에 있어.”
그의 단호한 말에 발튼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 * *
드르르르르, 크으으으으, 드드드…….
다음 날 새벽, 가브는 지진과도 같은 진동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는 발튼이 세상모르게 코를 골며 잠에 빠져 있었다.
이 마을에 딱히 집이 없는 발튼이니 데리고 와서 함께 지내기로 한 것이다.
“기감은 둔한가 보군…….”
가브는 그가 깨지 않게 일어나 고개를 내려 가슴께를 한번 보았다.
그의 몸의 수많은 흉터 중에서도 심장 어름에 인두로 지진 것 같은 흉터 두 개가 눈에 띈다. 그는 그것을 가만히 보다가 윗옷을 입고 촌장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착하니 이미 마을 청년 둘이 촌장과 함께 말 등에 교역품을 싣고 있었다.
다그 마을은 가난하여 말이 없었지만 발튼과 가브가 각각 한 마리씩 가져와 그 두 마리로 교역을 나가려는 것이다.
“이렇게 많이 실어도 될라나요?”
“에이, 더 실어도 돼, 더 실어도. 내가 잘 알잖아.”
그때 촌장이 가브를 발견하고 인사했다.
“자네 왔구만.”
“예.”
가브의 목소리가 들리자 안쪽 방문이 열리며 베라카가 뛰쳐나왔다.
“가브!”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가브에게 달려들어 포옥 안겼다. 가브는 그녀를 무심하게 떼어 놓으며 말했다.
“잘 자야 키 큰다. 가서 더 자.”
“뭐래, 나 안 커도 되니까 따라갈래요.”
사건 이후로 가브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심해진 베라카였다. 촌장은 그녀를 번쩍 들어 가브에게서 떼어 놓고는 손을 휘휘 저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들어가서 더 자라, 자~. 이제 슬슬 출발하자고. 늦으면 좋은 물건을 놓칠 거야.”
“예.”
“갑시다~.”
베라카는 남쪽 울타리 입구까지 따라 나오며 가브와 일행에게 손을 흔들었다.
“빨리 다녀와요! 여자들한테 한눈팔지 말고!”
가브는 낯간지러운 인사를 못 들은 채 무시하며 고삐를 끌었다.
“아주 애인이 따로 없어.”
“누가 연애하는지 모르겠네. 헤시는 쿨쿨 자고 있을 텐데.”
“요즘 재미 좋은가 보구만.”
가브는 시답잖은 농담을 들으며 촌장의 얼굴을 한번 살폈다가 시선을 거뒀다.
* * *
말을 타고 남쪽으로 반나절 정도 내려가면 나오는 바르드 마을은 다그 마을과 규모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위치만 아니었다면 분명 도시로 승격했을 정도로 인구가 많은 마을로, 오늘처럼 인근 소마을과의 교역의 장이 열리는 날에는 더욱 활기가 넘쳤다.
“벨리아산 기름 한 통에 단돈 1실버! 오늘 해 떨어지기 전까지만 특가입니다, 특가!”
“체인갑옷 팝니다! 체인갑옷! 미스틸도 많이 섞여 있어요!”
“온갖 마물 가죽, 이빨, 발톱 삽니다! 네비아 여신께 맹세코 오늘 우리가 제일 후하게 쳐줍니다! 오세요!”
“동쪽 세르티 숲으로 코볼트 목 따러 가실 사냥꾼 구합니다~!”
오늘도 광장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부대끼며 목청 돋워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유독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다.
챙, 챙.
사람들로 이루어진 울타리 안에서 두 사내가 날이 뭉툭한 검을 부딪치고 있다.
채앵!
“큭.”
“또 챔피언 승! 자, 도전자 있습니까? 히스에서 온 챔피언에게 도전할 용사 없습니까?”
바람잡이는 무기를 지니고 있다 싶으면 검사의 자존심을 건드리며 도발했고, 챔피언으로 보이는 사내는 어깨에 장검을 걸치고 거만하게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때, 그곳을 지나치던 가브와 눈이 마주쳤다.
“어- 거기, 나와 보지.”
사내가 검지로 가브를 가리키자, 구경꾼들의 이목이 금세 집중되었다. 가브는 살짝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싸움을 모르오.”
“풉. 이봐, 나 히스 출신이야. 싸움을 몰라? 그 눈을 하고?”
“정말 모르오.”
가브가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지나가려는 순간, 사내가 돌연 달려가며 품에서 단검을 꺼내어 그에게 뻗었다.
그 돌발 행동에 바람잡이는 물론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놀랐다.
턱.
서슬 퍼런 검 끝이 가브의 턱 밑 한 치 앞에서 멈춰 섰다. 남들이 보기에 가브는 너무 놀라 몸이 얼어붙어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한 듯 보였다.
사내는 오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재밌는 친구네. 좋아, 이 정도 정성이면 모르는 척해 줘야지.”
사내는 단검을 거두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고, 가브는 그가 더 귀찮게 굴기 전에 촌장을 보채어 급히 발을 떼었다.
같은 바닷가라도 다그에서 잡히는 고기와 바르드에서 잡히는 고기는 어종이 다르다.
그 물고기를 돈을 받고 팔거나 마을에서 쓸 생필품과 교환하는 식으로 교역이 이루어진다.
다그 마을처럼 주기적으로 장에 나오는 경우에는 단골 상인이 있었다. 그래서 교역장에 물건을 내놓고 팔 거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일행은 말을 가져왔는데도 금세 교역품을 처리하고 필요한 물품 구입까지 마쳤다.
“자, 이제 여관을 찾자고.”
“촌장님, 오늘은 일도 빨리 끝났는데 바로 마을로 가는 건 어떤가요? 가브도 괜찮죠?”
다그에는 젊은 청년들이 몇 명 없어서 마을 사람들의 관심이 쏠린다.
이 청년은 요즘 한창 사랑을 싹틔우고 있는 것으로 마을에 소문이 자자했다.
그는 가브에게도 허락을 구했고, 촌장도 가브를 보며 의견을 물었다.
사건 이후로 결정의 비중이 커진 가브였다.
“저도 빨리 갔으면 합니다.”
“왜 왜, 베라카가 기다려서?”
“하하, 그래. 조금 서두르면 해가 질 때쯤 도착할 수도 있겠네. 가자, 그럼.”
“내가 이래서 촌장님이 좋아. 어어, 내가 할께요, 내가.”
기분이 좋아진 청년은 교역으로 얻은 물품을 말 위에 메느라 동분서주하며 도움을 주었다.
‘별일 없겠지.’
가브는 마을에서 멀어졌다는 불안감을 애써 무시하며 말을 끌었다.
* * *
퍽, 퍽, 퍽! 콰지직.
“오, 넘어간다, 넘어간다!”
콰아아아앙!
6미터는 될 법한 나무가 도끼질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 옆에 선 사내는 일반 도끼가 손도끼처럼 보일 정도로 덩치가 우람했다.
“도끼질을 몇 번이나 했다고, 확실히 힘이 장사여, 장사.”
“꼭 예전의 가브 보는 거 같네.”
“아냐, 힘은 확실히 가브보다 더 세.”
사람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사내는 나무 대가리 쪽으로 가서 잔가지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가브 님과 비교할 바가 아니지요. 이제 마을로 가져가면 됩니까?”
“그래그래, 같이 들고 가자고.”
덩치 사내, 발튼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통나무를 들고 마을로 향했다.
발튼이 다그 마을에 온 지 일주일째, 처음에는 정말로 돌을 던지거나 침을 뱉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노예사냥꾼들 중에 유일하게 잘해 줬다는 마을 처녀들의 발언과 잘못을 비는 모습에 점점 그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발튼 일행이 입구에 다다랐는데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좋게 말하면 못 알아 처먹으실까? 그 애새끼만 데리고 오면 조용히 가 준다니까?”
“모, 모, 몰라요. 정말이에요…… 흐윽.”
검이나 도끼, 쇠몽둥이를 찬 이방인 무리가 마을 사람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체인갑옷을 입은 사내의 오른손에는 한 여인의 머리채가 잡혀 있었다.
쿠웅!
“어이쿠.”
“허업.”
발튼은 바로 통나무를 바닥에 떨어트리고, 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때, 마을 사람들 사이로 베라카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발튼은 그 타이밍에 거대한 덩치로 그녀를 가리며 체인갑옷 사내의 손을 잡아챘다.
“넌 뭐 하는 새…….”
우드득.
“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