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85
85화
아하리트 요새.
몇 명 남지 않은 군 식당 창문 너머로 붉은 석양이 지고 있다.
“하암~ 배도 부르니 헤라한테 가 볼까.”
“미친, 오늘만 몇 번이나 터는 겨?”
“내일모레면 가잖냐. 또 올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인생 마지막 날처럼 털어야지.”
“그래라. 나는 살련다.”
“그게 맘대로 되면 여기에 안 있지.”
죽음과 가까이 사는 병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기자, 린 바레스도 그들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가브는 그의 바람대로 시선을 뗐다.
전에 그늘졌지만 희망을 갖고 있던 얼굴과는 전혀 분위기가 달라서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그렇게 간절히 원하던 기사 시험에 합격 후 바레스 후작가의 배지도 건네주면서 자신만만하게 떠났던 린 바레스. 말은 하지 않아도 그 이후에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만만치 않은 삶을 살아왔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슥.
가브는 린이 준 감자를 들어 한참을 바라보았다. 감자를 바라보고 있을 때만큼은 초점이 잠시 돌아왔다.
탁!
그때 머리에 흉터가 있는 사내가 감자를 낚아채고 가브의 눈앞에서 그것을 한입에 먹어 치웠다.
“음, 맛있네. 너 어차피 안 먹잖아, 제발 빨리 뒈져라. 알았지?”
그는 친절하게 눈웃음까지 보이고는 식당을 나섰다.
가브는 감자가 있던 자신의 손바닥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으로 가져가 남겨진 부스러기를 먹었다.
‘그래도 살자. 염치가 없어도 살자. 살아 있어야…… 이엘이 산다.’
그러나 가브는 이곳에서 탈출하여 감옥에 갇혀 있을 이엘을 구해 낼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엘마저도 잃을까 두려웠다.
이틀 뒤, 백인대장 레이븐은 우물가 앞에 백인대를 모두 불러 모았다. 그는 먼저 나와 있는 가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죽긴 싫었나 보네? 그런데 여긴 의지로만 살 수 있는 데가 아니야.”
지직, 지직.
레이븐은 가브의 오른쪽 어깨의 아직 아물지 않은 절단면을 손가락으로 후벼 파며 중얼거렸다.
“팔 없는 병신이라고 봐주지도 않아.”
상처가 벌어져 피가 새어 나오는데도 가브는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처음 표정 그대로였다. 그 모습에 레이븐은 살짝 고개를 기울이더니 손가락을 뺐다.
“잘해라……. 중대장들! 자기 대원들 다 왔는지 확인해!”
“예! 안 온 사람, 손!”
“3중대는 다 왔습니다!”
한 달이라는 긴 휴가가 끝나고 다시 전장으로 나가는 날이라 그런지, 대원들의 얼굴에는 그늘이 가득 드리워져 있었다. 단 한 명도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있는 이들은 없었다.
“그래, 가자!”
아하리트 요새와 연결되어 있는 전초기지는 세 개, 초소는 여덟 개다.
전초기지에는 장벽이 있는 방향으로 7미터 높이의 돌로 된 벽이 쌓여 있다. 장벽이 뚫릴 경우를 대비한 2차 방어선인 것이다.
레이븐 백인대가 사용할 전초기지에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던 다른 병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휘유!”
“왜 이제 와, 이 새끼들아! 느려 터진 새끼들!”
“하, 드디어 요새로 간다. 시팔, 얼른 가서 죽어라 털어야지.”
“기다려라, 에리사!”
그들은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개했다. 그들의 백인대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레이븐에게 다가왔다.
“참 일찍도 오셨네. 눈알 빠지는 줄 알았다. 얼른 애들 보내서 초소에 우리 애들 빼라.”
“시펄, 새벽부터 출발했고만 지랄이야.”
레이븐은 인상을 확 찌푸리며 자신의 부하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야! 1중대 바로 초소 투입.”
“숨 쉴 틈도 없네. 알겠습니다~. 1중대 가자!”
1중대 대원들은 죽을상을 하며 바로 무기와 짐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중대는 대략 서른 명이 소속되어 있다. 서른 명은 다시 열 명씩 소대로 나뉘어 세 개 초소에서 근무를 서게 된다.
나머지 2개 중대는 전초기지에서 대기하며 이틀꼴로 교대를 하거나 비상시에 출전을 한다.
가브는 가장 마지막인 3중대 소속이었다.
전초기지에서의 생활은 요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쌓아 놓은 식량도 있고, 불도 피울 수 있어 따뜻한 식사가 가능했다.
나흘이 지나 3중대가 교대를 가는 날이 다가왔다. 중대장은 가브에게 다가와 빠른 속도로 설명했다.
“신입, 잘 들어. 초소에서 먹는 건 물과 육포, 빵이야. 빵은 딱딱해서 입에 넣고 녹여서 먹어야 해. 물은 금세 얼어서 마시지 못하니까 가기 전에 최대한 많이 마시고 가. 비상시를 대비해서 물을 가져가기는 하지만 몸 어디에 품어도 녹이기 쉽지는 않을 거다. 다 숙지했지?”
팍, 팍.
중대장은 가브의 머리를 두 손으로 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3중대 곧 출발한다. 물들 마셔라, 2중대 새끼들이 지랄하기 전에.”
전초기지에서 초소까지는 10킬로미터 내외다. 중대장은 곧 출발을 명했다.
“뒈지러 가자~ 3중대.”
사박, 사박, 사박.
최북 전선은 1년 중 눈이 녹는 날을 손으로 꼽을 정도로 기온이 낮고 눈이 자주 내린다. 가브는 눈을 밟으며 장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우 씨, 이 지겨운 데를 또 왔네. 썅…….”
한 사내의 불만을 시작으로 대원들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길이 103킬로미터, 높이 50미터, 너비 10미터, 인간이 쌓은 가장 높고 견고한 장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웅장함에 대원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젠장.”
“씨불.”
“이카로네…… 장벽.”
이카로네 장벽은 전 대륙이 아슈 제국을 제국으로 인정하는 가장 큰 이유다.
북쪽의 척박한 땅은 인간과 동물이 살기에 적절하지 않았으나 마물은 달랐다. 마물은 그곳에서 더욱 번식하고 성장하여 인간들이 감히 지배할 수 없는 땅이 되었다.
그래서 당시 가장 강력한 전력을 지니고 북쪽 땅과 맞닿아 있던 아슈 왕국이 십수 년에 걸쳐 초대 왕의 이름을 딴 이카로네 장벽을 세웠고, 벽 아래 대륙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이로 인해 아슈 왕국은 제국으로 거듭났고, 북쪽의 수많은 마물들을 홀로 막고 있는 제국을 타 국가들은 암묵적으로 건드리지 말아야 할 신성한 국가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장벽이 세워질 당시에는 가장 용감하고 강한 왕족과 귀족이 군대를 이끌고 그곳을 지켰고, 돌아오면 영웅으로 대접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평화가 지속되자 장벽의 영광은 사그라들었고, 너 나 할 것 없이 죽음이 가득한 그곳을 피하다 보니 어느새 범죄자들의 무덤으로 변질된 것이다.
“자, 여기서 다들 찢어진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각자 초소로 출발.”
“출발~ 씨팔.”
가브를 포함한 3중대는 2중대와 초소 근무 교대를 했다.
4, 5, 6초소 중에 가브는 6초소로 가게 되었다. 린 바레스와 같은 초소였다.
초소는 장벽 위에 위치하고 있다. 초소로 올라가는 계단은 지그재그로 되어 있고, 난간 같은 것은 없었다.
한 대원이 한참을 올라가다가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여기서 떨어지면 뒈지겠지?”
“다리부터 떨어지면 운 좋으면 살겠지. 근데 떨어진 애들은 다 뒈졌어.”
“아, 아…….”
린은 그들의 말을 듣자 더욱 불안해졌다. 앞에서 걸어가는 가브의 뒷모습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벽 꼭대기에 올라서자 몸이 흔들릴 정도로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초소는 너비 5미터 정도에 사방이 돌로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창문은 양쪽과 전방으로 작게 나 있는 여닫이창이었다.
“와 씨, 드디어 교대다.”
“후, 살았네.”
먼저 안에 있던 2중대 대원들은 시간을 아까워하며 바로 밖으로 나갔다.
6초소에 배속된 3중대 2소대의 소대장은 가브의 감자를 빼앗아 먹었던 대머리에 흉터가 있는 사내 무로지였다.
무로지는 초소에 들어가 철퍼덕 앉으며 가브와 린을 가리켰다.
“너, 너, 왼쪽으로, 너랑 너는 오른쪽! 바로 튀어 가!”
경계 근무는 튼튼한 초소 안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초소를 기준으로 양쪽에 봉화대가 따로 설치되어 있는 곳에 가서 2인 1조로 근무를 하는 것이다.
린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짐을 들고 먼저 밖으로 나갔다. 그를 따라 1킬로미터쯤 가니 벽돌이 타원형으로 쌓여 있는 봉화대가 보였다.
둘은 그 앞에 가만히 서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10여 분쯤 지났다. 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서 우리가 귀족이었던 걸 알면 죽이려 들지 모릅니다. 여기 놈들은 귀족을 병적으로 싫어해요.”
가브의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전방을 보았다. 린은 고개를 돌려 가브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형님을, 형님을…… 여기서 볼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정확히는 이렇게 초라한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린 바레스가 기억하는 가브는 언제나 당당하고 강인하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경외심이 드는 사람이었다.
가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린은 그렇게 된 그의 모습을 보고 우울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위로가 되는 마음이 들었다.
“기사가 됐으니 이제 떵떵거리고 살 생각만 했어요. 후계자가 될 욕심도 없었고. 그런데…… 그 여자 때문에…… 어머니가 당하셨어요. 전 어머니를 죽인 패륜아가 되었고요.”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린의 입술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장갑을 벗어 가브에게 맨손을 보여 주며 말을 이었다.
“다시는 검을 잡지 못하게 한다고…… 손을 망치로 모두 부숴 버렸어요. 검을 쓰지 않으니 몸 안에 깃들어 있던 마나도 다 사라진 것 같아요. 느껴지지가 않아요.”
린의 손은 징그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망치로 여러 번 내리쳐서 뼈를 모두 부숴 버린 것이다.
마나 역시 지속적으로 훈련하지 않는다면, 깃든 마나를 잡고 있을 힘이 부족하여 다시 대기로 흩어져 버린다. 그는 이제 일반인보다 못한 몸이 되었다.
“6년, 내가 이런 몸으로 6년을 여기서 버틸 수 있을까요…….”
가브는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았다가 다시 전방을 보았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대자연, 장벽 너머 끝없이 펼쳐진 하얀 숲은 끔찍한 마물들의 땅으로 보기에는 너무 아름다웠다.
12시간이 지나면 초소에 있던 대기조가 교대를 하러 온다. 경계 근무가 끝나고 초소로 돌아가자 무로지가 누워서 그들을 반겼다.
“와, 한 놈은 팔 병신, 한 놈은 두 손 다 병신이네. 야, 니네 둘이 나가면 어떻게 연기를 피우냐! 가기 전에 말을 해야지, 말을! 우리 둘 다 병신이라 같은 조 되면 안 된다고!”
“죄송합니다.”
그의 놀림 섞인 말에 린은 고개를 꾸벅 숙였고 다른 대원들은 킥킥거렸다. 가브는 말없이 구석에 가서 앉았다.
그 모습에 무로지가 인상을 확 찌푸리며 가브 앞에 쪼그려 앉았다.
“어이, 외팔이. 너 귀는 들리잖아, 내 말 안 들려?”
가브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자, 무로지가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
짜악!
“이제 들리나? 안 들려? 안 들리면 들릴 때까지 맞아야지.”
짝! 짝!
가브는 그의 줄따귀에도 아무런 느낌도, 감각도 없었다.
그러나 정작 바라보고 있는 린은 아니었다.
가브에 대한 경외심이 아직 남아 있어 저렇게 업신여기는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
탁-.
“어?”
뭔가 다른 감촉에 무로지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가브의 뺨에 꽂혔을 손이 린의 머리에 닿아 있다.
“죄, 죄송합니다.”
무로지는 자신 앞을 가로막은 린을 보고는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허, 허, 흐하! 이게 경계 한 번 갔다 왔다고 아주 전우애가 끝내주네! 그래, 한번 대신 처맞아 보자!”
퍽! 퍽, 퍼억!
무로지는 이성을 잃고 반쯤 눈이 돌아간 상태로 린을 무지막지하게 밟았다.
그러고도 린이 비명 한 번 지르지 않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지 갑자기 구석에 있는 벽돌을 집어 들었다. 바로 내려찍을 기세에 지켜보던 대원들도 움찔했지만 나서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은 마물에게 죽든 사람에게 죽든 심심치 않게 죽어 나가는 곳이었다.
그때 돌연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머리.”
작지만 묵직한 저음은 초소 내의 모든 대원들의 귀에 정확히 꽂혔다. 무로지는 벽돌을 든 채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얼굴이 벌게져 황당한 표정으로 가브에게 물었다.
“대, 대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