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91
91화
분명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목소리다. 발튼은 시커먼 사내들을 뒤에 달고 천사처럼 자신에게 달려오는 세실리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디! 기신인가?”
“헛소리 말고 길 뚫어!”
“아라따!”
발튼에게는 그녀가 귀신이든 허상이든 상관없었다. 어찌 됐건 지금 눈앞에 보인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녀가 뚫으라면 뚫는다.
발튼은 자신이 끊은 굵은 밧줄을 양팔에 감고 두 팔뚝을 가슴께로 모은 자세로 앞으로 돌진했다.
“우아아! 다 꺼뎌!”
“비켜 비켜! 이 버러지 새끼들아!”
그의 돌진은 성난 코뿔소를 연상케 했다. 호기롭게 뻗은 창검은 부러지거나 튕겨 나가고, 그 경로에 있던 도적들은 속수무책으로 날아가 버렸다.
“미, 미친!”
“뭐야, 저 괴물은!”
도적들의 대장은 검을 들고 그들의 뒤를 열심히 쫓으며 소리쳤다.
“빨리 쫓아가, 이 쓸모없는 것들아! 화살을 쏴!”
그는 세실리아와 거리가 점점 더 벌어지자 들고 있던 검을 던졌다.
“오른쪽!”
“응!”
의문 따위는 없다. 그녀가 까라면 까는 거다. 발튼은 바로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고, 거의 동시에 원래 있던 자리에 검이 꽂혔다.
“와아아!”
“잡아라!”
발튼이 묶여 있던 곳은 진영의 중앙 부근, 아직 도적들의 영역을 완벽히 벗어나려면 100여 미터는 나가야 한다.
피슝, 퓽!
앞에서 막아서는 자들은 점점 더 줄어들고, 막기도 힘들어지자 도적들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달리면서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까지 피하는 것은 발튼은 물론 세실리아에게도 무척 힘든 일이다.
푹!
“끅.”
열심히 피하고 쳐 내던 세실리아는 결국 허벅지에 한 발을 허용했다. 화살촉이 날카로워 깊이 박힌 상태다.
“갠차나?”
이 와중에 그녀를 챙기는 발튼의 등에는 이미 화살 대여섯 발이 꽂혀 있었다. 세실리아는 이를 악물며 앞을 가리켰다.
“닥치고 달려, 이 멍충아! 뒤돌아보지 마! 나 신경 쓰지도 마!”
“아, 아라따!”
이제 숲이 얼마 남지 않았다. 숲으로 들어가면 화살을 막아 줄 나무와 몸을 가려 줄 수풀이 많다.
“이 개연놈들이!”
도적 대장은 입에 거품을 물고 말에 올라타 그들의 뒤를 쫓고 있다. 호위병도 말을 타고 가까이 붙으며 그를 말렸다.
“각하! 위험합니다!”
“닥치고 쫓기나 해! 저것들 못 잡으면 니네가 먼저 뒈질 줄 알아!”
“네, 넵!”
호위병은 괴팍한 그의 성정상 뱉은 말은 이루어질 것이라는 걸 알기에 호위를 그만두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도적 대장은 가까이 있던 다른 도적의 활을 빼앗아 그들의 뒤를 악착같이 쫓아갔다. 이득도 크지 않은데 왜 이렇게 집착하며 쫓아가는지 모르겠다. 마치 무엇에 홀린 것만 같았다.
관능적인 몸짓으로 밧줄을 풀어 달라고 했던 그녀가 지금도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이이익!”
그는 이를 악물며 두 개의 화살을 메기고 줄을 강하게 당겼다.
숲으로 막 들어서는 순간 세실리아는 날카로운 기운을 느꼈다.
“피해!”
“엉?”
발튼은 어디로 피해야 하는지마저 묻지 못했다. 그저 지금과 다른 곳으로 발을 움직였다.
쐐액!
방금 전까지 그들이 있던 자리에 두 개의 화살이 무서운 속도로 지나갔다. 뒤에서 도적 대장의 외침이 들려온다.
“이런 시팔! 미꾸라지 같은 새끼들!”
타다다다닥-.
이제 숲에 들어선 이상 원거리의 위험은 대폭 줄었다. 체력과 속도의 싸움이지만 둘 다 몸 상태가 최악이기에 탈출을 쉽게 점칠 수 없다.
그것을 입증하듯이 말을 탄 도적들이 빠르게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발튼은 감각이 무디지만 넓은 시야와 상황 판단은 세실리아 못지않다. 그는 저 멀리 나무가 비정상적으로 흔들리는 것을 보곤 검지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뎌기로!”
그가 가리킨 방향은 도주로에서 약간 틀어지기 때문에 쫓아오는 도적들과 가까워질 수 있기에 세실리아는 의문을 표했다.
“왜! 발음은 아까부터 왜 그래?”
“가댜!”
발튼은 긴 설명 없이 몸을 틀었다. 세실리아는 의문이 들었지만 몸이 먼저 그를 믿고 발끝을 돌렸다.
두구두, 두구두!
가장 가까이 다가온 호위병이 발튼을 향해 창을 뻗었다.
“죽어라!”
콱!
발튼은 살짝 고개만 돌렸다가 팔을 들어 창을 겨드랑이에 꼈다.
“어, 어어!”
그 상태로 달리자 균형을 잃은 호위병이 말에서 떨어져 바닥을 수십 바퀴 나뒹굴었다.
이어서 도적 대장과 그의 호위병 둘이 바짝 다가왔다. 그때 세실리아가 앞의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너, 너……!”
“마따! 달려!”
세실리아는 발튼의 단호한 대답에 이를 악물고 발을 놀렸다.
도적 대장은 단창을 들어 발튼의 머리를 조준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목표는 발튼이었다. 그를 죽이고 세실리아는 괘씸죄를 추가하여 더욱 잔인하게 유린할 계획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까이……. 뒈져!”
그가 단창을 뻗기 직전, 머리 위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것은 양옆의 호위병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콰지지직!
지름이 3미터는 될 법한 나무가 그들을 덮쳤다. 그들은 말과 함께 완전히 짓이겨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졌다.
-그으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포식자의 포효, 오우거의 등장이었다.
오우거는 세실리아와 발튼을 뭉개지 못한 것과, 그 뒤로 감히 포식자인 자신에게 몰려오는 도적들을 보며 분노했다.
놈은 멀어져 가는 둘보다는 다가오는 무리에게 서로의 위치를 각인시켜 주기로 결정을 내리고 통나무를 휘둘렀다.
퍼벅, 퍼버버벅!
한 번의 휘두름에 십여 명이 쓸려 나간다. 몇 명은 그 자리에 깔려 죽고, 몇 명은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떨어지며 머리가 터져 죽었다.
도적들은 갑자기 나타난 오우거를 보고 당황을 금치 못했다. 가장 앞장서서 가던 대장마저 죽어 혼비백산이 되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 와중에도 목숨을 걸고 충성하며 발튼과 세실리아를 쫓는 이들은 없었다.
도적들이 만약 마물 사냥꾼이나 훈련된 병사였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겠지만, 머리를 잃은 도적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헉, 헉, 헉, 후…….”
오우거의 포효와 도적의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쯤, 세실리아는 옆구리를 매만지며 나무에 기대앉았다.
발튼도 거의 동시에 쓰러지듯이 수풀에 대자로 누웠다.
“오크, 아 해 봐.”
“아? 아?”
세실리아는 고개를 숙여 발튼을 내려다보았다. 필연적으로 얼굴이 가까워지자 발튼은 당황하여 시선을 피했다.
그때 세실리아는 인상을 확 찌푸리며 손바닥으로 그의 뺨을 갈겼다.
퍽!
“아! 아윽…….”
“무슨 일이 있어도 목숨은 스스로 끊는 것이 아니다, 이 멍청한 새끼야. 한 번 더 그러면 내가 직접 네 혓바닥을 뽑아 버릴 거다.”
“우으…….”
세실리아는 시무룩해 있는 발튼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숨을 한 번 크게 몰아쉬고는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는 거디?”
“어디긴 어디야, 우릴 기다리는 사람한테 가야지.”
그녀의 말에 발튼도 커다란 몸을 벌떡 일으켰다.
* * *
얼음 숲 탐색.
탐색은 장벽 근처 대략 10킬로미터 내외에 마물이 얼마나 있는지를 확인하고, 만약 마물이 있다면 사냥도 하고, 집단을 이루고 있으면 더 많아지기 전에 지원을 요청해서 토벌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장벽으로 마물 집단이 한 번에 습격해 오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함으로 휴가를 나가기 전, 그러니까 세 달에 한 번씩 전초기지에서 대기 중인 1개 중대가 탐색을 나간다.
이번에는 가브가 속한 3중대가 탐색에 나갈 차례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중대장도 탐색만큼은 긴장되는지 연신 말을 반복했다.
“……장벽 너머는 아주 미지의 세계야.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안 돼. 오크가 기사보다 빠를 수도 있고, 고블린이 판금갑옷에 양손검을 들고 덤빌 수도 있어. 언제나, 안전하게, 세 마리 이상은 무조건 건드리지 말고 지원 요청. 다 알아들었지?”
“외울 지경입니다.”
“외워 봐.”
“예?”
“외워 보라고, 이 새끼야.”
“장벽 너머는…….”
“쉿.”
성문 앞에 도착하자 중대장은 손을 번쩍 들어 올려 중대를 멈춰 세웠다.
“이제부터 진짜야. 지원탄 다시 확인하고, 항상 한 명은 하늘 잘 보고, 각자 소대에서 멀리 떨어지지 말고. 알았어?”
“예,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중대장은 대원들은 한 바퀴 둘러보고는 성문 레버를 올렸다. 그리고 철창으로 된 두 번째 성문을 올리자 공기가 무섭도록 적막해졌다.
“다들 소리 조심하고, 이따 보자. 산개.”
“산개.”
중대장의 말에 중대는 소대별로 거리를 벌려 미지의 얼음 숲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중대장은 가장 대원 수가 적은 3소대에 합류하였다.
사박, 사박, 사박.
가브가 속한 2소대장 무로지는 거의 열 걸음마다 망원경을 들어 주변을 확인하고는 다시 걸음을 뗐다. 아울 베어 사건도 있으니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신중해진 것이다.
다른 소대에 비해 심하게 진도가 나가지 않자, 한 대원이 중얼거렸다.
“대장, 속도 좀 내면 안 되나? 딱 봐도 뭐 안 보이는구만. 이러다가 언제 깃발 찍어?”
깃발은 10킬로미터까지 탐색을 나가지 않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수비대장이 만든 규칙이다.
10킬로미터가 되는 위치에 이전에 왔던 탐색대가 붉은 깃발을 꽂아 놓으면, 그것을 수거하면서 같은 자리에 검은 깃발을 꽂는 방식이다.
무로지는 인상을 확 찌푸리며 대원을 노려보았다.
“뒈지면 네가 책임질 거냐? 눈 속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오는 잡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아니면 시팔, 네가 앞장서서 가든가.”
대원은 투덜거리며 앞으로 나와 무로지의 가방에 꽂혀 있는 검은 깃발을 빼앗았다.
“예, 내가 앞장설 테니 천천히 따라오든가.”
“저 싸가지 없는 새끼…….”
한 손에는 깃발을, 어깨에는 도끼를 들고 가는 대원은 무로지와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자로, 소대장이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도끼를 든 대원을 따라 중간쯤 갔을 때였다.
가브는 린과 함께 중간에서 걷고 있었다. 사제 대원이 미소 지으며 다가와 가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지러운 것은 좀 나…….”
그때 가브의 세상이 검은 장막으로 덮이고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촤악- 촤악! 푹!
새하얀 눈밭에 붉은 피가 흩뿌려진다. 주인 모를 머리통과 팔다리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다. 시야의 주인은 아직도 누구의 짓인지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네, 네비아님, 제게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과…….
푹-.
그때 배가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시선을 내려 보니 그의 배를 관통한 손이 보였다.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그 손은 사람의 것과 다름없어 보였고, 다만 손톱이 길게 나와 있었다.
-끅, 끄……. 이, 이제 만날 수 있겠…….
그는 앞으로 쓰러져 눈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와 동시에 어둠이 걷히고 사제 대원의 얼굴이 보였다.
“……아졌소? 아, 아닌가?”
가브는 환상의 부작용으로 잠시 비틀거렸다가 바로 섰다. 그는 사제 대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몇 걸음 가지 않아, 좌측에서 돌연 비명이 들려왔다.
“아악!”
“으아악!”
대원들의 발이 일제히 멈춰 섰다. 가브는 본능적으로 린과 사제 대원의 팔을 잡아끌었다.
비명은 이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적막이 맴돌았다. 무로지는 하늘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지원탄을 못 터트릴 정도인가…….”
“하여튼 겁은. 대장 같은 겁쟁이 몇 명 다치고 처리한-.”
퍼석-.
대원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거무튀튀한 무언가가 튀어나와 그의 머리를 터트린 것이다.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그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는 대충 확인했다.
사람보다 조금 더 큰 키, 눈으로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다.
무로지가 현실을 깨닫고 경직되어 있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는 발끝을 돌려 바로 바닥을 박차고 뛰었다.
그를 시발점으로 모든 대원들이 일제히 장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