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97
97화
건물과 건물 사이, 두 명이 간신히 지나갈 것 같은 좁은 골목, 헤딘이 쫓던 사내가 멈춰 섰다.
“그거 주인 있는 보따리, 가져가면 손, 손목을 부러트릴 거야. 얼른 내놔.”
사내는 골목 안으로 헤딘에 이어서 이엘까지 들어오자 씨익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그러자 지붕에서 한 사내가 뛰어내리며 앞뒤로 길을 막았다.
“멍청한 놈, 내가 이딴 거나 훔치려고 했겠어?”
보따리를 든 사내의 말에 이어 길을 막아선 사내가 서슬 퍼런 단검을 꺼내 들었다.
“가진 돈이 얼만지 대충 봤으니까, 다 내려놓고 사라지면 살려는 줄…….”
그때 사내의 뒤에 있는 그림자가 일렁거리더니, 어둠이 점점 커졌다. 그것은 사내의 머리를 감싸고는 목을 비틀었다.
우드득-.
목이 꺾인 사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파악도 못 한 사이, 검은 무언가가 다시 사라졌다가 반대편 사내의 앞에 나타났다.
이엘은 물론 헤딘도 그제야 어둠의 실체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검은 가죽옷을 입은 자였다.
“어, 어…….”
그는 공포에 질린 사내와 눈을 마주하고 목을 한 손으로 강하게 움켜쥐었다.
뿌득, 까드득-.
사내는 입만 벙긋거리다가 흰자를 까뒤집으며 쓰러졌다.
이엘은 헤딘이 있음에도 상대의 심상치 않은 기운에 긴장했다.
그때 검은 가죽옷을 입은 자가 뒤돌아서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가브 님의 그림자, 렘이 이엘 님을 뵙습니다.”
이엘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였고, 그가 풍기는 기운은 매우 위험했다.
“당신은…… 누구죠?”
헤딘은 벽에 바짝 붙어 게걸음으로 렘에게 다가가며 중얼거렸다.
“스승, 스승님 이름이다. 스승님.”
그는 돌연 렘에게 손을 쭉 뻗었다. 렘은 보지도 않고 손목을 먼저 낚아채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헤딘이 마기를 이용하여 그의 손을 떨쳐 내고 그 뒤에 있는 보따리를 집었다.
“이건 내 꺼! 주인 있는 거, 내 꺼다. 눈독 들이지 마.”
렘은 그제야 헤딘의 목적을 깨닫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저는 렘입니다. 주군의 그림자입니다.”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같은 말을 하자 이엘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그러니까…… 저는 왜 찾아오셨죠? 그리고 가브? 가브는 오라버니의 진짜 이름인가요?”
“지금은 그 이름을 쓰고 계십니다. 주군께서 이엘 님을 보필하라 보내셨습니다.”
렘은 그사이 아이드성 지하 감옥에까지 가서 이엘의 탈출을 확인하고 경로와 시간을 예측하여 찾아온 것이다.
“헤딘도 그렇고, 정말 오라버니는……. 그런데 정말 오라버니가 보낸 것인지 믿기는 힘드네요. 처음 보는 얼굴이고……. 저는 이 아이랑 있어서 괜찮으니 그쪽 주군한테 가 보세요.”
이엘의 경계에도 렘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용병 가드, 일급 10실버 호위병으로 인연을 맺어 가츠 아이드라는 이름으로 이엘 님의 오라버니 자리에 앉으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군께서 전하신 겁니다.”
렘은 품에서 테라 내갑으로 추측되는 가죽 조각을 건네었다. 그곳에는 가브의 필체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렘이 널 꺼내 줄 것이다. 사막을 건너 크레아 왕국으로 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평안하라.]필체는 둘째 치고 내용은 절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이엘은 얼굴을 찌푸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는 가죽 조각을 품에 넣고 다시 도도하게 고개를 들었다.
“믿어요. 믿지만……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는 아시니까 찾으셨겠죠? 앞장서 주세요.”
이엘의 조건에 렘이 처음으로 순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주먹을 한 번 꾹 쥐고는 작은 소리로 답했다.
“불가합니다.”
“예……? 왜죠?”
렘은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처리할 때는 괜찮은데, 평소에 사람들 앞에 서면 손발이 떨리고 시야가 좁아집니다.”
이엘은 그의 대답에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그의 얼굴을 보면 거짓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가 은신술이 귀신처럼 뛰어난 것도 혹시 연결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엘은 고개를 대충 끄덕이며 뒤돌아섰다.
“그럼 그냥 최대한 떨어져서 와요, 오라버니를 만날 때까지.”
“예, 이엘 님.”
렘은 대답과 동시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이카로네 장벽 아하리트 구역 8초소.
흉터 사내는 가브가 장벽 아래로 뛰어내리자 기겁하며 바짝 엎드려 고개를 내밀었다.
“헙, 헉, 허…….”
그는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가브는 벽에 딱 붙어서 무서운 속도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가브는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존재 같았다.
치이이익, 치이이익-.
가브는 손톱을 바짝 세우고 가속도가 너무 붙는다 싶으면 멈췄다가 다시 미끄러지기를 반복했다.
아무리 마나를 운용할 수 있게 되었어도 진 카난의 손톱이 아니었으면 힘든 방법이었다.
턱.
바닥에 가볍게 착지하고는 빠르게 사라지는 오크의 뒤를 몰래 쫓았다.
놈은 한참을 달리다가 탐색 끝 지점을 뜻하는 깃발 너머 바로 나오는 작은 굴에 들어갔다. 오크들은 탐색 범위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가브는 나무 위로 올라가 놈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안 나오나…….’
꽤 기다렸지만 오크는 나오지 않았다. 가브는 놈이 본대와 합류하지 않기로 약속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브는 천천히 소리를 죽이며 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퓽-.
기다렸다는 듯이 화살이 날아온다. 가브는 그것을 손으로 쳐 내고 안으로 튀어 들어갔다.
-케룩하!
-아우투가!
안에는 오크 두 마리가 있었다. 가브는 다시 활시위를 당기려는 오크에게 검을 뻗었다. 놈은 행동을 멈추고 활대로 검을 쳐 냈다.
팅!
그 찰나에 느껴지는 힘이 꽤 묵직하다. 가브는 반탄력을 이용하여 반대로 돌며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스거걱!
옆에서 도끼를 잡으려던 오크 한 마리의 목이 깔끔하게 잘려 나가고, 활을 든 오크는 팔이 잘렸다.
-파쿠라!
죽음이 코앞인데도 비명은커녕 전의를 북돋운다. 가브는 그들의 무식한 기세에 고개를 저으며 손톱을 세워 놈의 심장을 파냈다.
퍼석.
“마물이면 마물다워야지.”
가브는 진녹색 피를 털어 내고는 굴 밖으로 나왔다.
가브의 시력은 방해물이 없다면 5킬로미터까지는 자세하게 볼 수 있다. 그는 나무로 올라가 주변을 둘러봐도 수상한 것이 보이지 않자 다시 초소로 복귀했다.
멀리서부터 가브의 귀환을 지켜보던 흉터 사내는 그가 돌아오자 멍한 눈으로 작게 박수를 보냈다.
“대, 대단하십니다.”
가브는 그를 힐끔 보았다가 초소 안으로 들어갔다.
가브가 초소에서 근무하는 동안에는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
1중대와 교대 후 전초기지로 돌아가자, 린 바레스가 가브를 긴히 불렀다.
“형님, 형님. 제가…… 그때 말씀하신 이후로 정말, 눈 뜨고 있는 동안에는 항상, 아니 눈 감는 시간도 아까워하며 이걸 했거든요.”
린은 검 손잡이를 잡고 손목을 까딱까딱 올리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곤 자신의 손바닥을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진짜 몇 년이 걸릴 각오였는데, 드디어 생겼습니다. 드디어.”
가브는 눈을 한 번 깜빡이고는 그의 팔에 손을 댔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도 이렇게 짧은 기간에 마나가 깃들게 할 수는 없다. 가브 역시 말로만 듣고는 쉽게 믿을 수 없어 직접 확인했다.
있다. 새끼손가락 손톱의 반의반만큼, 정말 적은 양이지만 마나가 생겨났다.
본래 마나가 깃든 적이 있으니 다시 자리를 잡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것이라 추측된다.
가브는 린과 눈을 마주하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고생 많았구나.”
“저, 저 이제 손 쓸 수 있는 건가요?”
이것은 또 별개다. 자신의 몸은 아주 정교한 작업까지도 금방 해낼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몸은 얼마나 잘 움직일 수 있을지 아직 지식이 부족했다.
“움직이지 마라.”
가브는 린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린의 몸에 깃든 마나는 양이 적어서인지, 아니면 타인의 몸 안에 있기 때문인지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혈관이나 힘줄을 꿰매는 것이 아니라 뼈를 맞추기에는 충분했다.
더 이상 손볼 것이 없다고 본 가브는 눈을 뜨고 린을 보았다. 린은 이미 가브를 보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형님, 형님! 형님은 정말 제 생명의 은인입니다! 제 목숨을 드려도 아깝지 않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린은 가브를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가브는 건조한 눈으로 그를 바로 떼어 내고는 천 옷을 찢어 손에 감아 주었다.
“목숨……. 그런 말은 하지 말아라. 뼈를 맞췄어도 단단히 붙으려면 시간이 걸린다.”
“예……. 흡, 예에.”
가브의 건조한 눈빛에도 린의 감동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때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둥, 둥, 둥, 둥!
“습격이다! 마물의 습격이다!”
“전부 기상! 바로 2초소로 간다!”
“2초소로!”
2초소, 가브는 직감했다. 오크들이 지금까지 계획적으로 7, 8, 9초소만을 괴롭히며 경계를 강화시키고 일부러 다른 방향을 쳤다는 것을.
오크들에게 무언가가 있다. 인간의 전쟁에서도 이 정도의 계획은 짜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브는 잡힐 듯 말 듯 무언가 찝찝함을 느끼며 발을 옮겼다.
* * *
이카로네 장벽 2초소, 경계 근무 대원은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믿기지 않아 입만 벙끗거리고 있었다.
하얀 눈으로 덮여 있던 얼음 숲이, 진녹색 파도로 바뀌어 있다.
고블린, 오크, 트롤에 이어서 오우거까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마물들이 장벽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테바르…… 바르카!
수 킬로미터가 떨어져 있음에도 몸을 흔들리게 만드는 묵직한 음성, 그 외침에 마물들이 일제히 장벽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바르카!
-가으우우아!
오크들이 밧줄을 매단, 끝이 휘어진 화살을 쏴 댄다. 그것은 가뿐히 장벽 위로 올라가 돌 틈에 걸렸다. 오크와 고블린은 그 밧줄을 타고 장벽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오크들 일부는 도끼로 성문 쪽 땅을 파고 아래로 들어가서 레버를 직접 올렸다. 더 안쪽까지 파고들어 가 이중 성문을 완전히 열자 상위 개체인 트롤들이 먼저 뛰어들어 갔다.
“도, 도망, 도망쳐야 돼. 도…….”
콰광! 쾅, 쾅! 쿠궁!
땅을 울리는 굉음이 연달아 들려온다. 수십 마리의 오우거가 나무를 뽑아서 직접 장벽 앞에 쌓는 것이다. 그것은 밧줄을 타고 오르지도 못하고, 성문을 통과하지도 못하는 오우거들의 계단이 되었다.
인간들은 이미 방어를 포기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고 있었다. 애초에 의무감이 없는 범죄자들에게 가장 훌륭한 방어벽을 맡긴 문제가 터진 것이다.
“우아아악!”
“살려!”
“미쳤다, 미쳤어. 미…….”
꽁꽁 얼어붙은 땅을 맨발로 달리던 대원은 갑자기 느껴지는 따스함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
일대가 낮처럼 밝아졌다. 하늘에는 태양이 아주 가까운 곳에 떠 있었다. 대원은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하고 발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어머니…….”
직경 3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화염구는 장벽을 넘어 도주하고 있는 대원들을 덮쳤다. 그 열기가 어마어마하여, 불에 직접 닿기도 전에 대원들의 살이 녹아내렸다.
쿠구우우우웅!
화염구가 꽁꽁 얼어붙은 바닥과 충돌하였다. 그 불길은 화염구의 크기보다 열 배는 더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