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107)
아기 요정은 악당-107화(107/200)
‘큰일 났다.’
체샤는 입을 짝 벌렸다.
바실리안 가문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벨제온이었다.
물론 키에른도 무섭지만, 약간 결이 달랐다.
키에른이 미친 짓을 하면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벨제온이 미친 짓을 하면, 예상치 못한 재앙이 들이닥친 기분이었다.
그가 키에른마저 놀라게 만드는 또라이 짓을 벌인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지…….”
추기경은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레밀부터 살폈다.
레밀의 생사를 확인한 추기경이 되레 적반하장으로 고함을 질렀다.
“헤바톤 왕족이네!”
동부 촌구석에 틀어박힌 백작가 주제에 어딜 왕족을 건드리냐는 소리였다.
물론 벨제온에게는 의미가 없는 협박이었다.
벨제온이 나직이 되물었다.
“왕족이면 눈앞에서 동생을 죽여도 가만히 내버려 둬야 합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추기경은 황급하게 변명하려 했으나, 그럴듯한 반론이 생각나지 않는지 말을 버벅거렸다.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되시나 본데.”
서늘하게 말을 이어 가던 벨제온이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려다 멈칫했다.
신성 제국 내에서 검을 소지할 수는 있으나, 특정 장소에는 반입이 불가했다.
하여 아까 소성인 기도회 참가자들이 모이는 회장에 입장하느라 마검을 풀어 두고 온 것이다.
텅 빈 허리를 스쳐 지나간 손은 티 테이블에서 스으윽 작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티 푸드로 나오는 빵을 썰어 먹으라고 놓아둔 나이프는 그리 크지 않았다.
날도 그다지 날카롭지 않고 뭉툭한 편이었다.
그러나 벨제온의 손에 들리는 순간부터 위세가 달라졌다.
벨제온은 굉장히 논리적인 설명을 하듯이 말했다.
“제가 여기서 헤바톤의 왕자를 죽여도 정당방위입니다.”
차분한 목소리에서 흘러넘치는 미친 자의 향기를 맡은 추기경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저놈 잡아!”
신성 사제들이 뒤늦게 허둥지둥 움직였다.
그래 봤자 훈련받은 기사도 아니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들을 손쉽게 피해 낸 벨제온은 재빠르게 나이프를 휘두르려 했으나.
“베쩨온 오라버니……!”
붙잡는 작은 손길에 동작을 멈췄다.
붉은 눈이 체샤를 향했다.
체샤는 다급히 그에게 필사적인 눈빛을 보냈다.
‘미친놈아 정신 차려!’
여기서 레밀을 죽여 버리면 그냥 끝이었다.
체샤가 요정의 힘을 쓰긴 했지만, 레밀의 몸속으로 밀어 넣은 거라서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레밀 본인만 이상한 힘이 자신의 신성력을 눌러 주었음을 느꼈을 터였다.
‘하지만 이거야 모른 척 잡아떼면 되는 거고.’
폭주를 먼저 알아챈 것도 적당한 핑계로 충분히 둘러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추기경의 실수를 잘만 이용하면, 오히려 바실리안 백작가에 유리한 상황으로 만들 기회인데…….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사람이 왜 이리 흥분해서 과하게 날뛰는지 모를 일이었다.
“…….”
벨제온이 멈칫하는 사이, 신성 사제들이 다닥다닥 손을 뻗어 그를 붙잡았다.
성인 남자들에게 결박되었으나, 벨제온은 무서워하기는커녕 헛웃음만 삼켰다.
‘후아아…….’
체샤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벨제온이 정신 차려서 다행이라 여기는 차였다.
그가 손목의 힘만을 이용하여, 들고 있던 나이프를 던졌다.
휙 하고 날아간 나이프는 마치 비수처럼 공기를 가르고 소파에 푹 박혔다.
기절한 소년의 목덜미 바로 옆이었다.
추기경과 신성 사제들은 숨을 들이켜며 곧장 굳어 버렸다.
벨제온이 추기경을 노려보았다.
단정하던 머리카락은 어느새 흐트러져 이마 위로 흘러내린 채였다.
짙은 남색 머리카락 사이로 새빨간 눈동자가 번뜩였다.
“오늘 일은 정식으로 항의하겠습니다.”
벨제온이 추기경을 노려보며 선언했다.
“바실리안 백작가의 이름으로.”
***
복도를 성큼성큼 걷는 걸음걸이는 빠르고 사나웠다.
두근, 두근, 두근.
아까부터 계속 심장이 너무 거칠게 뛰어 댔다.
박동하는 힘에 숨이 막힐 정도였다.
벨제온은 어금니를 힘주어 맞물었다.
품에 안은 동생을 너무 꽉 끌어안지 않기 위해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다.
바실리안 가문의 존속.
그것은 벨제온에게 남겨진 사명이자, 인생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축이었다.
“부탁할게, 벨제온.”
어머니가 희미하게 웃으며 제게 그리 당부했을 때부터, 벨제온은 오직 바실리안을 지켜 내기 위해 살아왔다.
하지만…….
벨제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어째서 인내하지 못한 걸까.
추기경들의 지지가 필요하니, 분명히 참아야 한다고 생각은 했는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나이프를 휘두르기 직전이었다.
체샤가 저를 말리지 않았다면, 아마 정말로 헤바톤의 왕자를 죽였을 것이다.
바실리안 백작가를 망치는 일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오라버니…….”
조그만 목소리가 한계까지 팽팽하게 당겨지던 정신을 일깨웠다.
벨제온은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체샤를 바로 근처에 있는 낮은 장식장 위에 올려놓았다.
장식장 위에 올라간 체샤는 인형처럼 귀여웠다.
눈높이를 맞추고 마주 선 상황이 어색한지, 체샤가 몸을 꼬물거렸다.
벨제온이 가만히 체샤를 응시했다.
아직 여물지 못한 작은 몸.
바실리안으로 받아들였으나, 피가 이어지지 않아 바실리안처럼 튼튼한 육체와 힘을 타고나진 못한 아이.
악의를 맞닥뜨리면 유리 세공품처럼 부서질, 한없이 약한 동생.
“체샤는 요정이야. 여왕이 될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을 가진 요정.”
키에른이 일러 준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아직 어리고 미숙해. 마음도 여리고, 영악하지도 않고…. 가진 힘을 기꺼이 풀어 남을 도우려 들더군. 자신이 위험할 수 있는 상황에서 말이야.”
“그러니 우리가 체샤를 살피고 돌봐줘야겠지.”
키에른은 거기까지 말하곤 조용히 미소했다.
당시 벨제온은 그의 말뜻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폭주하는 신성력을 가장 먼저 알아채곤, 죽을 자리에 망설임 없이 뛰어드는 작은 뒷모습을 본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 뚝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이프를 집어 휘두른 것도 반쯤 돌아 버린 상태로 저지른 짓이었다.
끔찍할 정도로 화가 났다.
스스로를 챙길 줄 모르는 아이 때문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오늘은 운 좋게 막아 냈다지만, 어디까지나 ‘오늘’에 한해서였다.
다음에도 행운이 떨어지리란 보장은 없었다.
벨제온은 딱딱한 목소리로 풀네임을 불렀다.
“체샤 바실리안.”
그러자 체샤가 군기 바짝 든 군인처럼 자세를 바로잡았다.
벨제온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체샤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시선이 길어질수록 체샤는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오래도록 이어지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아이가 어물어물 말했다.
“잘못해써요…….”
“뭐를.”
“…….”
그걸 몰라서 문제였다.
체샤가 눈치만 보고 있자, 벨제온은 화를 참기 위해서 잠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씨근덕거리는 숨을 억눌렀다.
눈을 질끈 감으며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곤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에게서 떨어진 질문에 체샤는 입술을 벌렸다.
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벨제온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온갖 말들이 속에서 벌떼처럼 끓어올랐다.
내 눈앞에서 죽지 마.
내가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고 무력하게 좌절하도록 만들지 마.
너를 바실리안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순간부터, 너 또한 내가 지켜야 할 아이야.
네가 있어야 바실리안이, 내가 지키고 싶은 가문이 완전해지는 건데.
어째서 너는 나를 아무렇지 않게 버리려고 해?
너도 어머니처럼 날 두고 죽어 버릴 거야?
마구잡이로 튀어나오려는 속마음은 벨제온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만큼 엉망진창이었다.
어린아이처럼 굴지 말자고 마음을 가라앉히며, 거르고 걸러 낸 말을 꺼내었다.
“나를 오라버니로 여긴다면,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서지 마라.”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설교하고 싶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차마 걸러 내지 못한 말이 흘러 나갔다.
힘없는 애원이 음울한 목소리를 타고 뒤를 이었다.
“제발 위험한 짓은 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