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109)
아기 요정은 악당-109화(109/200)
요정 여왕의 왕관이 처음 노래를 부른 건 약 이십여 년 전이었다.
수백 년간 얌전히 대신전 지하에 잠들어 있던 왕관이 어느 날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이 알지 못하는 언어로 이루어진 노래는 참으로 신묘하여서, 지하를 가득 메우다 못해 대신전으로까지 흘러나왔다.
당시 대신전에서는 성왕이 일부 고위 사제와 기사들과 함께 소규모 미사를 보던 중이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이가 왕관이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가장 신성해야 할 공간에 울려 퍼진 이단의 노래에 성왕은 격노했다.
그는 노래가 더 멀리 퍼져 나가기 전에 왕관을 봉인했다.
신성력에 짓눌린 왕관은 다시 잠잠해졌다.
성왕은 그날의 소동을 조용히 은폐했고, 그렇게 왕관의 노래는 잊히는 듯했으나.
몇 년 전부터 갑자기 왕관이 또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성왕은 격노하며 왕관을 다시 봉인했으나, 왕관은 보란 듯이 성왕의 봉인을 번번이 뚫고 노래했다.
봉인을 깨트리고 흘러나온 노래는 점점 더 선명해졌으며, 또한 더욱 널리 퍼져 나갔다.
환희에 가득 찬 노래는 마치 아무리 꺾어도 꺾이지 않는 꽃과 같았다.
차오르는 기쁨을 쏟아 내는 왕관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정숙해야 할 신성 사제와 기사들은 저도 모르게 노래를 따라 즐겁게 웃곤 했다.
성왕은 통제가 되질 않는 요정 여왕의 왕관 때문에 반쯤 미쳐 버리려 했다.
그리고 성왕이 신성력을 잃고, 하일론이 성유물인 ‘단죄의 사슬’을 하사받은 이후.
왕관을 봉인하는 일은 하일론이 맡게 되었다.
“네가 왕관을 봉인해 보거라.”
성왕의 명을 받들어, 하일론은 요정 여왕의 왕관을 봉인했다.
여러 번 풀려 버렸던 성왕의 봉인과 다르게, 하일론이 단죄의 사슬을 사용하여 만들어 낸 봉인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간신히 평화를 되찾았으나.
성왕은 요정 여왕의 왕관을 신성 제국 밖으로 내보내기로 결심했다.
“신께서 다스리는 땅에 이단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일은 두 번 다신 없어야 하리라.”
하여 소성인 기도회라는 말 같지도 않은 일을 벌인 것이다.
하지만 신성 제국에서 요정을 이용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는 현재로서는.
아마 다른 이유가 숨겨져 있으리라고 생각 중이었다.
어찌 되었건 이번에도 요정 여왕의 왕관이 노래를 불러 준 덕에, 하일론은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교육’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왕관이 아니었다면 아마 소성인 기도회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갇혀 있었으리라.
신성 제국에 속한 자로서, 사특한 일을 자꾸만 일으키는 요정 여왕의 왕관을 경계해야 함이 옳지만.
하일론은 요정 여왕의 왕관을 보는 일이 즐거웠다.
왕관에 신성력을 덧씌워 봉인하는 게 아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왕관에서 흘러나오는 싱그러운 꽃향기를 맡으며 생각했다.
역시 다른 누구에게도 왕관을 내어 주고 싶지 않다고.
자신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이다.
“성왕께서는 헤바톤의 왕자가 우승하길 원하시는 듯합니다. 추기경들 또한 그쪽으로 뜻을 모으는 분위기입니다.”
부관인 다렌은 잔뜩 불만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물론 레밀 왕자가 신성력을 타고났으니 신실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왕관을 받아 갈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말입니다. 역시 밀리오드 추기경 때문인가 싶습니다.”
레밀 왕자는 밀리오드 추기경 아래에서 수양아들처럼 지내며, 신성력을 다루는 법을 배워 왔다.
밀리오드 추기경은 당연히 레밀 왕자를 밀고 있었다.
“심지어 성왕께서도 레밀 왕자를 지지하시는 듯하니…. 신성 기사들은 항상 개처럼 부려 먹히기만 하는 겁니까?”
하일론은 성왕의 속내를 알 것 같았다.
성왕 시아노르는 하일론이 지닌 신성력을 사랑했다.
하여 제게서 가장 가까운 곳에 하일론을 두고 싶어 했으나, 그것이 시아노르의 곁은 아니었다.
성왕은 하일론을 제 발아래에 두어야 했다.
자신이 위에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확인하고 싶어 했으니.
이번 소성인 기도회에서도 하일론이 선택한 아이가 패배하는 걸 보고 싶은 것이다.
“하일론 님이 아니었다면 왕관이 부르는 노래도 막지 못해서 난리였을 텐데! 그냥 우리 아기님한테 주면 제일 좋을 것을…….”
곱씹을수록 열이 받는지, 다렌이 점점 더 씩씩거리며 울분을 토하던 때였다.
신성 기사가 급히 찾아와 보고를 올렸다.
“밀리오드 추기경이 레밀 왕자와 함께 바실리안 백작가의 아이들을 독대하였습니다.”
하일론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신성 기사는 하일론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을 이어 갔다.
“내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바실리안 백작가의 장남이 분개하여 뛰쳐나왔다고 합니다.”
“아이는?”
“체샤 님이 다친 곳은 없는 듯합니다.”
하일론은 시선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밀리오드 추기경도 어지간히 애가 탄 모양이었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저열한 짓거리를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손목의 팔찌를 어루만지던 하일론은 우선순위를 정리했다.
“바실리안 백작에게 연락을 넣도록.”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자였다.
뱀처럼 교활하다 싶으면서도, 아이와 엮인 일이면 서슴없이 미친 짓거리를 저질렀다.
바실리안 백작이 신성 기사와 신성 사제들 앞에서 흑마법을 휘갈긴 사건은 하일론에게도 아주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잡아 놔야 했다.
뒷세계의 마스터 같은 작자가 신성 제국 내에서 활개 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는 이유도 있었다.
역시나 바실리안 백작은 찾아오자마자 대뜸 헛소리부터 해 댔다.
“추기경 하나만 죽입시다.”
생글생글 웃으며 하는 말에 하일론은 냉정히 현실을 일깨워 주려 했다.
추기경은 이단 심문관의 수장인 저도 섣부르게 대할 수 없는 존재이며, 소성인 기도회를 앞둔 지금은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려 했으나.
“그놈 때문에 체샤가 죽을 뻔했습니다.”
키에른의 말을 듣는 순간 아무래도 좋아져 버렸다.
“…지금 당장 죽이는 건 어렵고.”
머릿속으로 몇 가지 방법을 떠올리며 느리게 답했다.
“시간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자 키에른이 싱긋 웃었다.
“역시 말이 좀 통하는군요. 그런데 하일론 경.”
키에른은 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불쌍한 척하고 있으나, 입에 담는 내용은 살의와 악의가 그득했다.
“그놈을 죽이는 건 죽이는 거고…. 그 전에 내가 개망신을 주고 싶은데 말입니다.”
언제나 그랬듯, 키에른은 거부하기 어려운 제안을 건넸다.
“그것도 협조해 줄 겁니까?”
***
카르하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추기경 죽였어요?”
체샤를 품에 안은 키에른이 눈썹을 찌푸렸다.
“추기경을 왜 죽여.”
그는 몹시 억울하단 듯 대꾸하더니 곧장 체샤에게 변명했다.
“아빠 함부로 누구 죽이고 그러는 사람 아니에요. 누가 보면 아빠가 나쁜 사람인 줄 알겠네…….”
그냥 나쁜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 중에서 대장을 맡고 있는 키에른이었다.
체샤와 쌍둥이는 동시에 똑같은 생각을 했다.
‘아직 못 죽인 거네.’
어이없단 표정을 지은 쌍둥이의 머리를 쓸어 주며 키에른이 웃었다.
“체샤랑 다녀올 테니 얌전히 있도록.”
“다녀오깨요!”
체샤는 쌍둥이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해 주었다.
키에른은 체샤를 안고 직접 대신전으로 향했다.
그의 품에 안겨 가는 내내, 키에른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행동했다.
오히려 기분이 조금 좋아 보이기도 했다.
체샤는 속으로 안도했다.
단단히 화가 난 줄 알고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동안 마음이 풀린 거 같았다.
소성인 기도회의 첫 번째 날.
대신전에 모인 아이들은 미리 전달받았던 과제의 답을 말하고, 성왕에게 축성을 받을 예정이었다.
성왕의 축성을 받다니, 그것만으로도 기도회에 참석한 보람이 넘쳐 나는 일이었다.
아이들이며 보호자며 잔뜩 들뜬 얼굴이었다.
체샤는 키에른의 품에 안긴 채 대신전의 가장 안쪽에 앉은 성왕을 바라보았다.
신을 찬양하는 벽화를 등 뒤에 두고,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성왕은 마치 한 폭의 성화처럼 신성했다.
그리고 성왕의 양옆으로 늘어선 신성 사제와 신성 기사들의 깨끗하고 정결한 모습까지.
종교를 믿지 않는 자들도 절로 경건한 마음이 생겨날 만한 광경이었다.
의례적인 절차가 지나가고, 아이들이 성왕에게 직접 과제의 답을 말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아흔아홉 명의 아이 중에서 가장 처음으로 나선 이는 헤바톤 왕국의 레밀이었다.
레밀이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어 나오자, 성왕 옆에 자리한 밀리오드 추기경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주눅 든 채 앞으로 나선 레밀이 애써 목소리를 키워 입을 열었다.
“저는… 신께서 받아 주신다면…. 제가 지닌 신성력을 전부 바치고자 합니다.”
조심스럽게 손을 앞으로 뻗는 레밀을 보며, 체샤는 인상을 찡그렸다.
신성력으로 묘기를 부려서 다음 차례인 다른 아이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게 하겠다는 전략인 듯했지만.
‘신성력 제어 못 해서 난리 난 게 엊그제 일인데!’
폭주해도 막아 줄 놈들 많으니, 이번에는 진짜로 모른 척해야겠다고 결심하던 때였다.
“쩨샤.”
키에른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빠가 재밌는 거 보여 줄게요?”
그리고 체샤는 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새빨간 악의로 즐겁게 빛나는 것을.
뒤이어 고요한 회장에 소년의 중얼거림이 퍼져 나갔다.
“…아, 어, 어째서.”
허공에서 헛손질하던 레밀이 당황하여 얼굴이 희게 질렸다.
“왜, 왜 이러지…….”
레밀에게서 신성력이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