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110)
아기 요정은 악당-110화(110/200)
회장 안에 웅성거림이 번져 나갔다.
조용히 레밀의 신성력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의아한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과제를 전달받았던 날.
그날부터 이미 소문이 빠르게 퍼진 상태였다.
소성인 기도회의 강력한 우승 후보는 둘이며, 그중에서 추기경과 신성 사제들의 지지를 받는 게 레밀이라는 사실은 참가자들 대부분이 인지하고 있었다.
밀리오드 추기경과 레밀이 친밀한 사이라는 것도 함께 말이다.
“…….”
신성력이 나오지 않는 레밀을 보며 수군거리던 이들이 이내 흘금흘금 밀리오드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밀리오드 추기경의 얼굴은 이미 퍼렇게 질려 있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사태에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듯했다.
작게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렸다.
키에른이 체샤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문지르며 웃음을 삼켰다.
그가 체샤에게 숨죽여 웃으며 속삭였다.
“재밌다, 그치?”
체샤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며 연신 레밀을 살폈다.
‘어떻게 한 거지?’
키에른이 신성 제국 안에서 흑마법을 쓰진 않았을 터였다.
희고 깨끗한 종이 위에는 아주 작은 오물만 튀어도 선명하게 보이는 법이니.
사방이 신성력으로 충만한 신성 제국에서는 흑마법의 흔적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소성인 기도회가 끝나기 전까진, 키에른도 어쩔 수 없이 얌전하게 굴어야 했다.
‘그러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는 뜻인데.’
체샤는 성왕의 곁에 자리한 신성 기사들을 보았다.
그 사이에 하일론이 서 있었다.
하일론은 제1계위 기사들과 같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다른 이들과 같은 제복을 입었으나, 그는 홀로 툭 튀어나온 듯 시선을 잡아끌었다.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혼란스러워하는 이들 속에서 혼자만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어 더욱 눈에 띄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얼음 같은 푸른 눈이 체샤를 향했다.
눈길이 맞닿는 순간.
“…….”
하일론이 설핏 입꼬리를 올렸다.
짧은 웃음의 뜻은 명백했다.
‘하일론이구나.’
어이가 없었다.
어쩐지 조용히 넘어간다 싶더니, 뒤에서 두 남자가 작당을 했을 줄은 몰랐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아, 그게…….”
레밀은 어떻게든 신성력을 끌어올리려 애썼다.
그러나 결국 아무런 힘도 내보이지 못했다.
제게 몰린 시선 속에서 뚝뚝 끊어지는 말만 흘리던 레밀이 바들바들 떨면서 밀리오드 추기경을 쳐다보았다.
이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할 유일한 사람을 찾는 레밀은 절박했다.
하지만 레밀과 눈이 마주친 순간.
밀리오드 추기경은 곧장 고개를 돌려 버렸다.
냉정한 외면에 레밀의 눈빛이 산산이 조각났다.
그러나 조용히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익숙한 체념이었다.
레밀 때문에 죽을 뻔하기는 했지만…….
막상 저러는 꼴을 보고 있으니 불쌍했다.
‘일전에 요정의 힘이 느껴졌던 것도 그렇고.’
저 레밀이라는 아이가 자꾸 신경 쓰였다.
레밀은 성왕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가 몸이 좋지 않아서 부족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웅크린 뒷모습은 유난히 작고 깡말라 보였다.
성왕이 손을 내저어 어수선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레밀 왕자가 뛰어난 신성력을 지녔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성왕 시아노르는 상냥하게 레밀을 다독였다.
“왕자가 지닌 귀한 힘을 신께서도 기꺼이 받아 주실 터이니.”
“가, 감사합니다.”
레밀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다소 거친 손길로 일으키는 보호자에게 붙잡혀 끌려가듯 물러났다.
한껏 부푼 주목과 기대를 받았던 등장과 달리 참으로 초라한 퇴장이었다.
휘청거리며 보호자를 뒤따르던 레밀은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누군가를 찾는 듯이 열심히 살피다가, 체샤를 발견하곤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보호자에 의해 다시 끌려가 버렸다.
소성인 기도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이들은 각자 다채로운 것을 신에게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기도회에 참석한 가문들이 며칠간 동동거리며 생각해 낸 것들은 진실로 귀한 것들뿐이었다.
성왕은 흐뭇하게 웃으며 아이들을 칭찬하고, 또한 축성해 주었다.
체샤는 가장 마지막 순서여서, 98명의 아이가 뇌물 바치는 광경을 하품하며 지켜보았다.
중간중간 재밌는 부분도 있기는 했다.
소왕국의 왕족인 남자아이의 차례가 되었을 때였다.
작은 남자아이는 당차게 앞으로 나섰다.
“저는 신에게 제 모든 걸 바칠 수 있습니다.”
아이는 우쭐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이게 정답이지?’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성왕 시아노르가 작게 미소했다.
“대견하구나.”
그게 끝이었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현저히 짧은 반응이었다.
망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보호자가 사색이 되어선, 빠르게 굽신거리며 아이를 데리고 물러났다.
‘순진했군.’
가장 신실한 아이를 뽑겠다는 신성 제국의 말을 너무 믿어 버린 것이다.
신성 제국이 내놓은 과제는 다분히 세속적으로 접근해야 했다.
까놓고 말해서 이번 과제는 그냥 ‘비싼 거 내놔라’라는 소리였다.
다만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만큼 노골적이지 않게, 신실한 척, 성스러운 척 포장지를 덮어씌우는 게 핵심이었다.
그걸 눈치채지 못했으니, 저 남자아이는 이미 탈락의 빨간 줄이 그어졌으리라.
성왕은 아란의 차례에서 특히 기뻐했다.
“저는 제 왕관을 바치고자 합니다. 스카야의 공주로서 받은 영광을 신께 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아란이 또박또박하게 말하며 보호자에게 손짓했다.
보호자는 받침대에 덮어 둔 천을 걷어 냈다.
눈부신 광휘가 번쩍였다.
스카야의 왕이 아끼는 막내 공주를 위하여 직접 장인들을 불러다 제작한 왕관.
거대한 사파이어와 여덟 개의 진주, 그리고 수십 개의 작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왕관은 부유하기로 손꼽히는 스카야 왕국이 아니고서야 감히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신을 향한 아란 공주의 마음이 참으로 어여쁘구나!”
성왕 시아노르는 껄껄 웃음마저 터뜨리며 즐거워했다.
저렇게 돈 밝히는 티를 내도 괜찮은지 모를 일이었다.
성왕은 유독 아란과 긴 대화를 나누었다.
아주 밝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아란이 물러났다.
그리고 몇 명의 아이들이 더 지나간 후.
드디어 체샤의 차례가 되었다.
키에른은 체샤를 안은 채 그대로 걸어 나가, 성왕 앞에 나섰다.
다소 무례한 행위였다.
체샤를 바닥에 내려놓아 예를 갖추도록 해야 옳았다.
하지만 키에른은 당당했고, 체샤도 그러려니 했다.
체샤는 마음이 아주 관대해진 상태였다.
‘흑마법 안 쓰는 게 어디야.’
성왕한테 정신 조종 걸겠다고 달려들지 않는 것만 해도 아주 예의 바르고 공손한 것 같았다.
성왕 시아노르는 계단 세 칸 높이의 단 위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키에른을 내려다보았다.
키에른은 성왕을 향해 미소했다.
체샤도 키에른을 따라 멀뚱하게 성왕을 바라보았다.
어째서인지 시선의 맞닿음이 미묘하게 길어졌다.
성왕 곁에서 추기경이 눈매를 찌푸렸다.
신성 사제가 나서서 무례함을 지적하기 직전.
키에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팔렌 제국, 바실리안 가문의 체샤 바실리안이 신께 바칠 유일하고 진귀한 것은.”
키에른의 목소리가 힘 있게 회장 안을 울렸다.
다소 집중력을 잃고 어수선하게 굴던 아이와 보호자들이 단숨에 집중했다.
마치 마력을 품은 듯한 목소리는 뱀과 같아서, 사람들을 매끄럽게 휘감았다.
이목을 사로잡은 키에른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바실리안 가문의 변하지 않는 충성입니다.”
그는 어딘가 선뜩하게 들리는 말을 덧붙였다.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몹시 평범한, 아니, 평범 이하라 할 수 있을 발언이었다.
사실상 제 모든 걸 바치겠다고 선언했던 남자아이보다도 못한 발언이었다.
다른 참가자들도 키에른의 발언에 당황하는 게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성왕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졌다.
키에른은 한 걸음 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고, 그저 어린 아기를 품에 안고 있을 뿐인데도.
그 한 걸음에 신성 기사들의 눈빛이 곧장 날카로워졌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키에른은 개의치 않았다.
성왕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더욱 짙은 미소를 그리며 질문할 뿐이었다.
“성왕께선 오래된 약속을 기억하십니까?”
성왕이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키에른은 마치 연극배우같이 목소리를 높였다.
“신성 제국이 바실리안에게 검은 숲을 관리하라 명령했던 약속을 말입니다.”
“…!”
키에른이 성왕을 향해 생긋 웃었다.
“이제 대가를 주실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