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111)
아기 요정은 악당-111화(111/200)
회장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키에른의 발언을 단박에 이해하지 못한 이들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사태가 심상찮음을 눈치채곤 숨죽였다.
성왕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만!”
여태껏 자애롭기만 하던 이가 노성을 내질렀다.
믿기지 않아 하는 사람들을 전부 무시하고, 성왕은 키에른을 노려보았다.
“충분히 확인하였네.”
눈을 부릅뜬 그가 잠시 숨을 고르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러나 주름진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만은 어찌할 수 없었다.
성왕은 느리게 말을 뱉었다.
“…과연 세상에서 유일하면서도 가장 진귀한 것이로군. 신께서 바실리안의 충심에 기꺼워하실 걸세.”
“영광입니다.”
키에른이 냉큼 답했다.
성왕은 뻔뻔스레 웃는 키에른의 목을 조르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인내했고, 그것이 성왕 시아노르가 가진 마지막 인내심이었다.
“금일의 기도회는 이만 파하도록 하지.”
성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뒤편의 통로로 들어가 버렸다.
신성 사제와 기사들이 급히 성왕을 뒤따랐다.
소성인 기도회는 엉망진창인 분위기 속에서 첫째 날의 막을 내렸다.
***
검은 숲의 약속이 뭘까?
체샤는 너무너무너무 궁금했다.
그 발언에 성왕이 파들거리며 길길이 날뛰어서 더더욱.
내심 키에른이 속 시원하게 설명해 주길 바랐으나, 그는 모호하게 뭉그러뜨릴 뿐이었다.
“아빠 믿지?”
레밀의 신성력을 틀어막아 밀리오드 추기경에게 망신을 주었을 때처럼 짓궂게 웃기만 했다.
“반드시 우리 체샤가 왕관을 쓰도록 만들 거니까.”
키에른이 성왕에게 한 발언이 확실히 엄청난 것이긴 한 모양이었다.
상황을 전달받은 벨제온은 헛웃음을 머금더니, 딱 한 마디로 소감을 표했다.
“미치셨습니까?”
그러나 키에른은 당당하기만 했다.
“수면 위로 올라오기로 했잖아. 물론 원래는 좀 더 평화로운 방법을 쓰려고 했지만.”
저쪽에서 자꾸 인내심을 시험해 대서 참을 수가 없다며 억울함을 주장해 댔다.
성질난 벨제온은 이제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소성인 기도회를 기점으로, 바실리안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똑똑히 각인시킬 터이니.”
그러거나 말거나, 즐거워하던 키에른은 문득 말을 멈추고 벨제온을 보았다.
“벨제온, 너는…….”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나보단 조금 더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거든.”
벨제온은 답하지 않았다.
단지 얼마간 가만히 키에른을 마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쌍둥이를 불러오겠습니다. 앞으로의 일을 의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실리안가의 남자들은 긴급하게 모여 회의를 시작했다.
궁금한 체샤도 끼고 싶었으나, 불행하게도 침실로 보내져 버렸다.
아기는 일찍 자야 하기 때문이었다.
“오래 걸릴 거 같으니까 기다리지 말고 자고 있어, 동생.”
“아기 빨리 자라. 우리 내일 아침까진 못 오니까.”
쌍둥이는 체샤를 침대에 고이 눕히고, 이불까지 꼼꼼하게 덮어 준 후에 떠났다.
하지만 쌍둥이가 떠나자마자.
체샤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혼자만의 시간이 생겼으니,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신성 제국 조사를 나서야 할 때였다.
‘수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란 말이지.’
너무 많아서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아직 시간이 여유로우니, 너무 욕심내지 말고 최대한 들키지 않도록 조용하게 조사를 진행해 볼 생각이었다.
하여 본격 조사에 나서기 위해, 충성스러운 강아지를 데리고 가려고 했으나.
“하따 갠차나?”
“…….”
강아지는 기절하듯 잠든 상태였다.
체샤는 불쌍한 하타를 쓰다듬어 주었다.
요새 소성인 기도회 때문에 바빠서, 쌍둥이가 주로 하타를 맡았다.
오늘도 쌍둥이에게 놀이를 가장한 괴롭힘을 당한 모양이었다.
소파에 푹 퍼져 버린 하타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체샤는 혼자 신성 제국 탐사에 나섰다.
신성 제국인 만큼 각별하게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평소보다도 훨씬 주의하면서 힘을 일으켰다.
체샤는 스르륵 꽃에 휘감겨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대신전이었다.
소성인 기도회로 북적이던 낮과 달리, 밤의 대신전은 고요했다.
약한 달빛만이 텅 빈 신전을 어슴푸레 비출 뿐이었다.
“히유!”
체샤는 팔을 파닥거려 꽃향기를 흩어 냈다.
하여간 힘을 쓸 때마다 너무 요란한 효과가 반짝여서, 이렇게 몰래 돌아다녀야 할 때는 골치였다.
흔적을 지워 낸 체샤는 양손을 허리에 얹고 눈썹 사이를 좁혔다.
일단 느낌 오는 대로 이동했는데, 그게 대신전이었다.
하지만 이 넓디넓은 대신전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조사해야 할지 벌써 막막했다.
하타가 도와주었으면 조금 더 수월했겠지만…….
피로에 지친 강아지를 떠올린 체샤는 고개를 짤래짤래 내저었다.
그리곤 혼자서 타박타박 걸음을 옮겼다.
오늘 성왕이 앉았던 의자로 걸어가 보던 때였다.
체샤는 발을 우뚝 멈췄다.
“…!”
노래가 들렸다.
왕관이 체샤를 부르는 노래였다.
하지만 온 신성 제국을 가득 채울 듯하던 지난번과 달리, 이번 노랫소리는 아주 희미하고 옅어서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했다.
마치 좁은 틈을 비집고 억지로 소리를 흘려 내는 듯 말이다.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체샤는 힘을 일으켜서 왕관이 저를 부르는 곳으로 이동했다.
본래 요정의 힘이 만능은 아니었다.
가 본 적이 없거나, 표식 같은 매개체가 없는 장소로는 이동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체샤는 왕관이 있는 곳으로 단숨에 옮겨 갈 수 있었다.
성유물 보관소 내부.
깨끗하게 비워진 공간 중앙에 요정 여왕의 왕관이 위치하고 있었다.
장식대 위에 올려진 왕관 주변에는 신성력을 품은 새하얀 사슬이 얼기설기 얽혀 있었다.
체샤는 사슬 너머로 왕관을 바라보았다.
입술 사이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요정 여왕의 왕관은 아름다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엮은 화관은 풍성하고 큼직해서, 아기인 체샤가 머리에 쓰기에는 너무 컸다.
하지만 리체시아에게는 완전히 딱 알맞게 씌워지리라.
화관에서 흘러나오는 기분 좋은 꽃향기가 체샤의 마음을 간질였다.
왕관을 쓴 제 모습이 머릿속에 자꾸만 상상되었다.
왕관은 그런 체샤를 유혹하듯, 점점 더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했다.
체샤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왕관을 향해 다가갔다.
꽃과 나비로 몸을 두둥실 띄우고, 사슬 사이를 조심스럽게 비집고 들어가, 장식대에 놓인 왕관의 바로 앞에 자리했다.
‘만지면 안 되는데.’
소성인 기도회 중이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요정 여왕의 왕관에 접촉하는 건 결코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왕관을 만지는 순간, 어떤 커다란 변화가 생길 것이라는 선명한 직감이 들었다.
하지만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움직이는 손을 멈추지 못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체샤를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주춤거리며 다가가던 손끝이 화관의 꽃잎에 닿은 순간.
저릿하면서도 따끔한 감각이 심장을 찔렀다.
날카로운 가시에 찔린 것처럼 예리한 통증이었다.
화들짝 놀란 체샤가 황급히 손을 거두는 동시에.
빛이 터져 나왔다.
눈부신 빛과 함께 사방에 꽃향기가 확 번져 나갔다.
체샤마저 아찔할 만큼 짙고 강한 꽃향기였다.
꽃송이들이 피어나 온몸을 뒤덮었다.
그리고 꽃이 사라진 자리에는…….
“…앗?”
어른이 된 체샤가 서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잠시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러다 쑤욱 치솟은 눈높이, 길쭉한 팔다리,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금색 머리카락을 하나씩 확인했다.
요녀 리체시아로 돌아온 것이다.
걸친 옷도 하늘거리는 재질의 길고 얇은 드레스로 바뀌어 있었다.
작은 꽃송이가 붙은 드레스는 빛이 없어도 홀로 은은하게 반짝였고, 달콤하고 화려한 꽃향기를 흘렸다.
갑자기 어른이 된 것만 해도 당황스러운데, 옷까지 뒤바뀌다니.
“이, 이거 뭐야. 왜 이래.”
난데없는 변화에 눈만 크게 뜨고 있던 때였다.
차르륵!
주위의 사슬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체샤는 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곧바로 요정의 힘을 사용하려 했지만, 상대가 더 빨랐다.
체샤는 순식간에 새하얀 사슬에 칭칭 감겨 버렸다.
굳게 닫혀 있던 성유물 보관소의 문이 열렸다.
감히 요정 여왕의 왕관을 훔치려 시도한 도둑을 단죄하러 온 이는 사슬의 주인이었다.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에 사슬로 칭칭 묶인 체샤가 담겼다.
반듯한 눈매가 일그러졌다.
하일론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이름을 불렀다.
“…리체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