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113)
아기 요정은 악당-113화(113/200)
그날 리체시아는 한적한 숲 속의 꽃밭에서 놀던 중이었다.
쏟아지는 화창한 햇볕 아래, 꽃 위를 뒹굴며 나른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평화로운 꽃밭에 갑작스레 침입자가 찾아오기 전까진 말이다.
핏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나타난 하일론의 상태는 처참했다.
조롱조롱 피어난 작은 들꽃들이 피에 새빨갛게 물들 정도였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피라고 생각했다.
어디 가서 당하고 올 놈은 아니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전부 하일론의 피였다.
“너…. 뭐, 뭐야. 왜 이렇게 다쳤어?”
놀라서 묻다가, 무언가 눈에 툭 들어왔다.
손목에 못 보던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신성한 기운이 물씬 흘러넘치는 새하얀 팔찌.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힐데르드 신성 제국의 성유물이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하일론은 제 손목이 잘 보이도록 내밀었다.
붉은 피를 뒤집어쓴 그의 손목에서 팔찌가 유난히 희게 빛났다.
“…죽고 싶은데.”
하일론이 흐릿하게 속삭였다.
“이제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어서.”
신에게 바쳐진 육체.
성유물로 맺은 소유의 계약.
하일론의 육신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신성 제국의 소유이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하일론은 리체시아를 찾아왔다.
“나를 죽여 줄 수 있는 이는 너뿐이니…….”
휘청, 말하다 말고 그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깜짝 놀라서 쓰러지는 하일론을 받아 안았다.
하일론은 리체시아에게 온통 몸을 기대었다.
그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한계인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일론은 매사 무심한 성격이었다.
감정이 없는 것처럼 굴어 대는 그가 단순히 신성 제국에 육체가 귀속되었다는 이유 하나로 죽음을 원할 리가 없었다.
그런 하일론이 죽고 싶다는 말을 할 정도의 일이라니.
도저히 상상조차 되질 않았다.
무슨 일인지 추측해 보다가, 문득 화가 치솟았다.
하일론을 괴롭힐 수 있는 이는 저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언제까지나 자신의 뒤를 쫓아와 줄 거라고 여겼는데.
어디서 이상한 짓을 당하고 와선, 제게 죽여 달라고 하는 게 한심해서 열이 뻗쳤다.
저를 추격하는 일마저 포기하고 죽으려는 꼴이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하일론의 인생에서 저보다 중요한 게 생겼다는 사실이 싫은 것 같았다.
그를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제복이 구겨지도록 움켜쥐자, 하일론이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러더니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가늘게 경련하는 손은 머뭇거리며 리체시아를 마주 안았다.
서로를 완전하게 끌어안은 순간.
하일론이 갑자기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어찌나 꽉 끌어안는지 숨이 막힐 정도였다.
그가 목덜미에 얼굴을 문질러 왔다.
매달리는 몸짓은 절박하고 애처로웠으며…….
한없이 나약했다.
그는 얌전히 제 모든 것을 맡겼다.
지금이라면 하일론이 원하는 대로 죽여 줄 수 있었다.
제게 목숨을 내놓은 남자의 품에 안긴 채, 리체시아는 생각했다.
하지만 죽이고 싶지 않다고.
“싫어.”
하일론의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거뭇하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물결치는 수면을 헤집고 싶었다.
파도가 치고, 해일이 일어나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너도 죽여 달라는 나를 살렸잖아.”
하일론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던 어린 리체시아의 삶을 제멋대로 이어 놓았다.
그러니까 리체시아도 멋대로 행동할 생각이었다.
그를 밀쳐 냈다.
상처투성이인 하일론은 밀어내는 힘을 이겨 내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꽃밭 위에 쓰러졌다.
꽃잎이 풀썩 날렸다.
잔잔하게 펼쳐진 들꽃 사이로 어울리지 않는 가시덤불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가시덤불은 하일론의 몸을 단단히 구속했다.
가시덤불과 꽃에 칭칭 묶인 하일론을 만족스럽게 내려다보며 미소했다.
그리고 그의 몸 위에 올라앉았다.
“…!”
하일론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뒤늦게 몸부림쳤으나, 약해진 하일론을 제압하기는 너무나 손쉬웠다.
리체시아는 방긋 웃으며 그의 옷을 잡아 뜯었다.
항상 답답하게 목깃까지 세워서, 온몸을 꽁꽁 가리던 제복을 뜯으니 속이 다 시원했다.
활짝 벌어진 옷자락 너머로 반듯한 쇄골과 가슴이 드러났다.
“리체시아!”
하일론이 갈라진 목소리로 이름을 소리쳤다.
분노와 당혹감이 뒤섞인 외침이 제법 듣기 좋았다.
자꾸 반항하기에, 가시덤불을 꽉 죄어 주자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얌전해졌다.
리체시아는 키득키득 웃으며 깨끗한 살갗 위에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어디에 새길까.
남들 눈에 함부로 띄지 않으면서, 하일론이 매일 볼 수 있는 곳에 남기면 좋을 터였다.
잠시 위치를 고민하다가 쇄골 위를 지긋하게 눌렀다.
“여기에 표식을 남길 거야.”
하일론이 눈을 부릅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느릿하게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나른한 움직임을 따라 붉은 선이 그어졌다.
손가락 아래에서 꽃문양이 피어났다.
요녀가 자신의 사냥감에게 남기는 표식이었다.
깔아뭉개고 앉은 몸이 파르르 떨렸다.
“큭……!”
꽉 다문 잇새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보통 가벼운 접촉으로 본인조차 모르게 표식을 남기지만.
지금은 달랐다.
리체시아는 자신의 힘을 정성껏 흘려 넣으며, 그가 충분한 고통을 느끼게 만들었다.
다른 누군가가 하일론에게 주었을 상처와 통증보다도 더욱 아프도록, 하여 그의 기억에서 결코 잊히지 않도록…….
하일론은 목에 핏줄이 설 정도로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나 표식을 새기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끝끝내 정결한 신성 기사의 육체에 요녀의 문양을 남겼다.
요사스럽게 피어난 붉은 꽃문양을 손끝으로 가볍게 쓸었다.
“넌 내 사냥감이야, 하일론.”
새빨개진 얼굴로 숨을 헐떡이는 하일론의 모습이 기꺼웠다.
그의 눈에는 저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죽을 생각 따윈 하지 못하고, 오직 리체시아에 대한 감정만으로 새파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저만을 향한 분노가 참으로 만족스러웠다.
요녀는 신성 기사를 내려다보며 오만하게 명령했다.
“그러니 함부로 죽지 마.”
***
하일론에게 사냥감의 표식을 새기며, 죽지 말라고 명령한 이후.
관계는 조금 달라졌다.
예전에도 집요했지만, 표식이 새겨진 후에는 정말 미친 사람처럼 요녀를 쫓아다녔다.
성유물을 받은 그가 이단 심문관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이제 제 표식을 지우겠거니 했는데.
하일론은 여태껏 표식을 지우지 않고 남겨 두었다.
그와 리체시아의 연결 고리를 고스란히 간직해 온 것이다.
‘왠지 부끄럽잖아.’
오래된 옛날 일까지 떠올려 버린 탓일까.
체샤는 도저히 저를 끌어안은 하일론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
괜히 마음이 쓰였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있다간,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서 펑 하고 터질 것 같았다.
망설이다가 그의 팔뚝에 손을 얹으며 살며시 뒤돌아보았다.
하일론은 그제야 목덜미에 묻고 있던 얼굴을 스윽 들어 올렸다.
“…….”
곧게 직시하는 시선은 열기로 물들어 있었다.
푸른 눈은 가만히 체샤를 마주하다가, 느릿하게 아래로 향했다.
그는 체샤의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체샤는 그만 뺨이 붉어졌다.
환역에서 키스했던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입 안이 바짝 마르는 듯해서, 무심결에 혀로 윗입술을 조금 핥았다.
그러자 하일론이 눈매를 살짝 찌푸렸다.
어째서인지 그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쉬는 숨결이 간지러웠다.
하일론이 체샤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려던 찰나였다.
“우선 주변을 수색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러면 저희도 함께 수색하는 것으로.”
신성 기사들이 바깥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닫히는 둔중한 소음이 아슬아슬하던 둘 사이의 공기를 갈라놓았다.
체샤는 곧바로 하일론을 밀어내곤, 도끼를 불러다가 발목의 사슬을 끊어 냈다.
챙, 사슬이 산산이 부서졌으나 하일론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체샤가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곳은 신성 제국 한복판.
곳곳에 신성력이 깃들어 있으니, 하일론에게 더없이 유리했다.
하지만 싸울 준비를 하는 체샤와 달리, 하일론은 그냥 가만히 있기만 했다.
그는 생소한 눈으로 체샤를 살피다가 문득 말했다.
“…왕관이 잘 어울리겠군.”
치렁치렁한 드레스는 확실히 요정 여왕의 왕관과 맞춘 듯이 잘 어울렸다.
칭찬에 쑥스러워진 체샤는 옷자락을 매만지며 물었다.
“왜 숨겨 줬어? 곧장 이단 심문실로 끌고 갈 줄 알았더니.”
“신성 제국을 믿을 수 없으니까.”
하일론이 가만히 체샤를 훑어보다가 싸늘하게 말했다.
“설마 붙잡혀 온 건…….”
“아니야.”
요녀 자존심이 있지, 어딜 봐서 내가 신성 기사한테 잡혀 온 것 같냐고 성질을 내려다가 말았다.
“내가 왜 여기 왔냐면.”
체샤는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가 멈칫했다.
“그러니까, 왜 왔냐면…….”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저를 직시하는 푸른 눈은 대답을 듣기 전까진 결코 물러나지 않을 터였다.
끈질긴 시선에 갇힌 체샤는 식은땀을 삐질거렸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툭 이상한 말을 뱉어 버렸다.
“너 보러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