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116)
아기 요정은 악당-116화(116/200)
정적이 내려앉았다.
바실리안가의 남자들은 전부 굳어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다들 제대로 놀란 분위기였다.
밀리오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동부 촌놈들이라 해도 뒷세계를 모르진 않겠지.’
뒷세계의 주인을 들먹였으니, 감히 의심하지 못할 터였다.
당연히 뒷세계의 주인과 실제로 연이 있는 건 아니었다.
전부 그럴듯하게 조작해 둔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밀리오드가 이런 겁 없는 거짓말을 한 건 전부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다.
뒷세계의 주인은 대외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저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지녔다는 사실만이 퍼져 있을 뿐이었다.
그를 두고 온갖 추측이 난무했으나,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으니.
밀리오드가 그놈의 이름을 가져다가 거짓말을 하든, 무얼 하든 어차피 아무도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심지어 신성 제국 힐데르드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제아무리 뒷세계의 주인이라도 힐데르드 내부에서 벌어진 일까지 알지는 못할 터였다.
혹 알게 되더라도, 추기경인 자신을 쉬이 건드리진 못하리라.
‘그리고 바실리안 백작가나 하일론이 뒷세계의 일을 제대로 수소문할 수는 없을 테니.’
여러 가지 계산 끝에 지어낸 거짓말인 것이다.
물론 밀리오드도 뒷세계 마스터를 들먹이는 게 썩 내키진 않았다.
하여 준비는 하되 웬만하면 꺼내지 않으려 했던 패였다.
‘그래도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어쩔 수 없으니.’
회심의 패를 꺼내 든 밀리오드는 바실리안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뜬 채로 굳어 있었다.
옆에서 작은 감탄사가 들려왔다.
“…우와.”
어린 맹수처럼 삐죽하게 생긴 소년이 낸 소리였다.
소년은 작은 송곳니가 드러나도록 입을 떡 벌렸다가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기점으로, 바실리안가의 남자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정신없이 웃어 댔다.
그들의 웃음소리에 밀리오드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상황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한참 후에야 바실리안 백작은 겨우 웃음을 그쳤다.
그가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며 말했다.
“뒷세계의 주인이라니. 이거 참 흥미롭습니다. 그를 마스터라고 부르던가요.”
여전히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였다.
바실리안 백작은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가 눈매를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웃었다.
갸름한 눈웃음이 요사스러웠다.
그 순간 밀리오드는 강렬한 이질감을 느꼈다.
신성 제국 한복판에 이런 자가 들어앉아 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도망치고픈 충동이 치밀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지금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강렬한 욕구가 들 뿐이었다.
뱀 앞의 생쥐처럼 굳은 밀리오드에게 나긋한 말이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마스터에 관해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는 절대 배반하지 않는 충성스러운 수하들을 이끌고 있다고 하던데…….”
밀리오드는 애써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꾸만 굳어 가는 혓바닥을 억지로 움직였다.
“그…. ‘처형자’를 말하는 건가.”
“네에. 마스터의 심기를 거스른 자는 그들에게 처형당한다고 하지요.”
처형자는 마스터가 부리는 수하들 중에서 무력이 가장 압도적인 자를 일컫는 말이었다.
세상 무서울 게 없이 날뛰는 뒷세계의 쓰레기들도 처형자라는 말을 들으면 얌전해졌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처형자는 한 명뿐이었다.
천으로 눈을 가린 특이한 차림새에 채찍을 무기로 쓴다는 남자였다.
그는 마스터의 대행인으로 나서는 경우도 있는지라 그나마 얼굴이 알려져 있었다.
나머지는 전부 미궁이었다.
처형자라는 명칭에 걸맞게, 그들은 마스터가 누군가의 죽음을 원할 때만 움직였다.
처형자와 맞닥뜨린 이는 전부 죽었으니, 자연히 정체가 비밀로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추기경께서도 당연히 처형자에 대해 알고 계실 터…….”
바실리안 백작이 시선을 옮겼다.
움찔.
저도 모르게 따라서 눈길을 옮긴 밀리오드는 크게 몸을 떨었다.
백작의 시선이 향한 곳은 쌍둥이였다.
여태 얌전히 경청하던 쌍둥이는 밀리오드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히죽 웃었다.
짓궂은 악몽과 같은 웃음에 섬뜩한 불안감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밀리오드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곳에도 새빨간 눈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실리안 백작이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함부로 마스터와 관련한 거짓을 입에 담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선뜩한 경고에 숨이 막혔다.
밀리오드가 입술만 벙긋거리니, 이내 백작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싱긋 웃었다.
그러더니 마치 살살 달래듯이 사근거렸다.
“혹시 그 친부라는 자를 제가 만나 볼 수 있습니까? 믿지 못하여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저 궁금해서 그럽니다.”
흑마법사라 했으니 이단 심문실에 붙잡혀 있는 거냐며 이것저것 물어 오던 때였다.
갑자기 창밖에 새하얀 빛이 번뜩였다.
적막하던 어둠을 순식간에 밝히는 빛의 정체는 신성력이었다.
바실리안가의 남자들도, 밀리오드도 난데없이 대낮처럼 바깥을 밝히는 신성력에 잠시 석상처럼 굳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이는 바실리안 백작이었다.
그는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구석에 놓인 자신의 검을 집어 들었다.
“둘이 체샤 확인해. 벨제온은 따라오고.”
삼 형제는 곧바로 움직였다.
쌍둥이가 문을 박차고 튀어 나가고, 장남 또한 검을 챙겼다.
밀리오드가 뒤늦게 소리쳤다.
“자, 잠깐! 신성 제국 내에서 검을……!”
신성 제국 내에서 함부로 검을 뽑아선 안 된다는 건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었다.
그러나 바실리안 백작은 되레 밀리오드에게 명령했다.
“밖으로 나가지 마시고, 호위와 함께 이곳에서 기다리십시오.”
“뭐? 그게 무슨! 백작은 어딜 가는 건가!”
벌컥 화를 내며 막아서는 밀리오드를 지나치며, 바실리안 백작은 짤막하게 말했다.
“마물입니다.”
성가셔하는 붉은 눈 아래, 매끈한 모양새의 입술이 비틀렸다.
“죽고 싶으면 따라오시든지요.”
***
신성 제국 내에 요정이 갇혀 있다는 증거만 확보한다면.
하일론이 이단 심문관으로서 본격적인 수사에 나설 수 있었다.
평소에는 심증만으로도 수사를 시작했으나, 이번만큼은 명확한 증거가 필요했다.
단죄의 대상이 추기경과 성왕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완벽하게 증거를 갖추고 빠져나갈 틈 없이 포위망을 친 다음, 단번에 덮쳐야만 했다.
그가 성왕까지 단죄할 마음을 먹었다는 사실에 체샤는 적잖이 놀랐다.
‘내가 첫 번째라니.’
하일론의 말을 떠올릴 때마다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위해서 체샤는 상당히 애를 써야 했다.
“…아무튼 요정 찾아 주면 되는 거지?”
괜히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서 하는 말에 하일론이 짤막하게 답했다.
“가능하다면.”
예전이었다면 단칼에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을 터였다.
체샤 또한 오랫동안 다른 요정을 찾아 헤맸으나,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으니.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요정 여왕의 왕관을 만지고 이상한 드레스로 갈아입혀진 후부터, 체샤는 자신이 무언가 변화했음을 느꼈다.
뭐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꼭 집어서 말할 수 없었다.
다만 그냥…….
‘요정 찾아낼 수 있을지도?’
같은 이상한 자신감이 자꾸 속에서 샘솟는 것이었다.
“한번 해 볼게.”
하일론과 함께 이동하기 위해, 체샤는 하일론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제게 내밀어진 손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맞잡았다.
커다란 손에 체샤의 손이 폭 감기듯 싸였다.
요정을 찾아내겠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강렬한 느낌이 들었다.
체샤는 직감이 이끄는 대로 조심스럽게 힘을 움직였다.
피어나는 꽃과 함께 이동한 곳은 지하 동굴이었다.
주변을 둘러본 체샤는 의아히 중얼거렸다.
“…포도주 저장고?”
서늘하고 축축한 동굴 곳곳에 횃불이 밝혀져 있고, 좌우로 술을 담은 오크통이 그득그득 쌓여 있었다.
체샤와 하일론 앞에는 거대한 철문이 있었다.
직감이 옳다면, 이 안에 요정들이 갇혀 있을 터였다.
실제로 철문 너머에서 희미하게 요정의 힘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었다.
마치 열어선 안 될 금단의 무언가를 건드리는 듯이…….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머릿속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속삭였다.
문을 열어 보라는 목소리, 그리고 절대 열지 말라는 목소리였다.
둘 다 더없이 간절해서, 쉽사리 선택할 수 없었다.
망설이던 체샤는 하일론을 돌아보았다.
“…….”
중요한 증거를 얻어 낼지도 모를 순간이나, 하일론은 체샤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서 가만히 기다려 줄 뿐이었다.
고요한 푸른 눈 덕분에 골라야 할 선택지가 명확해졌다.
이동이 끝났으니 이제 손을 놓아도 되지만.
체샤는 하일론의 손을 꼭 쥔 채, 다른 손으로 문을 열었다.
기묘하게도 철문은 깃털처럼 사뿐하게 밀려났다.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 잠금장치 하나 없이 체샤의 손길에 가볍게 열렸다.
“…!”
그리고 문이 열리는 순간.
검은 어둠이 쏟아졌다.
문 너머에서 체샤를 기다리던 건 요정이 아니었다.
사방을 온통 뒤덮는 그것은…….
검은 숲에 있어야 할 마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