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120)
아기 요정은 악당-120화(120/200)
봄비처럼 보슬보슬 떨어지는 꽃송이의 향연은 아름다웠다.
신성 제국 전체를 뒤덮으며 떨어지는 꽃은 언뜻 눈송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꽃비를 맞은 마물들은 끄륵, 소리를 흘렸다.
미동 없이 굳어 있던 마물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마물의 움직임에 사람들이 흠칫 놀라면서 물러났다.
공포에 빠진 이들은 무턱대고 검을 휘두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이상함을 느끼곤 멈춰 섰다.
마물은 인간을 공격하려는 게 아니었다.
어떻게든 꽃비에 닿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었다.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다가, 꽃송이에 가득 덮이는 순간 끄르륵 소리 내었다.
기묘하게도 언뜻 웃음소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검은 마물들이 작고 하얀 꽃에 덮였다.
꽃송이에 흠뻑 젖은 마물은 펑 하고 터지듯이 소멸했다.
마물이 소멸한 자리에는 징그러운 살점과 피가 아닌, 눈처럼 깨끗한 꽃잎이 휘날렸다.
“…….”
온 세상을 꽃으로 뒤덮은 체샤는 숨을 색색 몰아쉬었다.
끔찍한 피로감이 몸을 짓눌렀다.
숨쉬기조차 힘들게 느껴질 정도였다.
환역을 연속으로 세 번쯤 열었다가 닫은 기분이었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그러자 곧바로 작은 온기가 느껴졌다.
함께 꽃 더미 위에 올라앉은 하타가 앞발로 체샤를 붙잡은 것이다.
“리체시아 님……!”
하타는 조그맣게 속삭이듯 이름을 불렀다.
괜찮다고 대꾸해 줄 힘도 없었다.
체샤는 그냥 하타에게 몸을 기댔다.
당장이라도 눈 감고 픽 쓰러지고 싶었지만.
아직은 안 된다.
마물들이 전부 안식을 찾을 때까진 버텨야 했다.
남은 힘을 바닥까지 긁어모았다.
하얀 꽃비가 더욱 기세를 더하여 쏟아졌다.
마지막 마물까지 꽃잎으로 화하는 걸 보고 나서야, 체샤는 쏟아 내던 힘을 멈췄다.
발아래를 떠받치던 꽃 더미가 스르륵 사라졌다.
스러지는 꽃을 따라 몸이 느릿하게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나 체샤의 발이 땅에 닫는 일은 없었다.
단단한 품이 체샤를 받아 안았다.
체샤는 가물가물한 정신을 힘겹게 일깨웠다.
복잡한 눈빛을 한 남자가 보였다.
그가 습관처럼 입술에 걸어 놓은 가짜 미소도.
미소를 짓고 있지만, 심란한 기색을 완전히 감추진 못했다.
체샤는 진심을 다해 사과했다.
“미아네요…. 약속했는데…….”
요정의 힘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키에른이 몇 번이나 당부했고, 체샤도 단단히 약속했는데 그걸 깨트려 버렸다.
소성인 기도회도 망쳐 버렸으니 도저히 키에른을 볼 낯이 없었다.
왕관만큼은 어떻게든 구해 주겠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꾸 눈이 스르르 닫혔다.
끙끙거리는 체샤를 보던 키에른이 가만히 뺨을 쓸어 주었다.
“괜찮아.”
“…하디만.”
“체샤, 내 딸. 정말 괜찮아.”
그가 몇 번이나 괜찮다고 속삭였다.
체샤는 정말요, 하고 물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달싹이는 입술에서는 바람 빠지는 소리만 새어 나왔다.
하지만 눈치 빠른 키에른은 체샤가 하고 싶은 말을 알아챘다.
“정말 괜찮아. 아빠가 다 해결할게요.”
언제나 그렇듯 그는 확신에 차 있었다.
이대로 기절해 버리고 싶었지만.
체샤는 가물거리는 의식을 힘겹게 붙잡았다.
애써 버티던 때였다.
피부가 따끔할 정도로 강한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의 주인을 확인한 체샤는 다 죽어 가던 것도 잊고 잠시 진저리 쳤다.
‘으엑…….’
성왕 시아노르가 체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여기까지 행차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기나긴 밤 동안 그리 평탄하게 지내진 못한 듯했다.
그는 완전히 망가진 모습이었다.
항시 단정하게 갖춰 입던 성왕의 예복도 엉망으로 구겨졌으며, 낯빛 또한 단 몇 시간 만에 수년은 더 늙어 버린 듯 버석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형형했다.
핏발이 돋아 붉게 충혈된 눈이 체샤를 뚫어지게 보았다.
번들거리는 눈알에 그득하게 담긴 것은 희열과 탐욕이니.
소름 돋다 못해 징그러운 시선이었다.
그러나 시선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
벨제온이 말없이 걸어 나와 체샤의 앞을 가로막고 섰기 때문이었다.
소년의 등은 단호했다.
체샤는 제 앞에 곧게 선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벨제온의 양옆으로 이슈엘과 카르하가 나란히 섰다.
하타 또한 용맹하게 네발로 우뚝 서서 체샤 앞에 자리했다.
고작 다섯 사람, 그리고 강아지 하나.
그게 전부였다.
성왕 시아노르는 등 뒤로 수백의 신성 기사와 신성 사제를 거느렸다.
그에 비하면 바실리안가의 식구는 고작해야 다섯 손가락을 간신히 넘는, 형편없는 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왕과 바실리안가의 대치는 팽팽했다.
위세에 짓눌리기는커녕, 어째 대등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성왕이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성왕은 몇 발자국 떨어진,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멈춰 섰다.
서로의 목소리가 들리기에는 결코 무리 없는 거리였다.
“바실리안 백작.”
낮고 엄숙한 음성이 선고를 내리듯 질문했다.
“그대 가문의 입양아가 요정이었나.”
키에른은 부정하지 않았다.
싱긋 웃으며 깔끔하게 긍정할 뿐이었다.
“그렇습니다. 저도 지금 알게 된 사실입니다.”
딱 떨어진 대답에 되레 지켜보던 이들이 당황했다.
키에른의 눈매가 갸름하게 휘었다.
“제 아이가 마물을 물리쳤습니다. 바실리안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성과이지 않습니까?”
품 안의 아이가 자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들뜬 목소리가 흘러 나갔다.
“성왕께서도 치하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감히 이단의 존재를……!”
성왕이 노성을 터뜨렸다.
그러나 키에른은 두려워하지 않고 변론을 이어 갔다.
“과거 신성 제국은 신을 믿고자 찾아온 요정 여왕을 받아 주었습니다.”
그 증표로서 요정 여왕의 왕관이 신성 제국에 전해졌으니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온데 어찌하여 성왕께선 제 아이를 고작 요정이란 이유로 박해하십니까?”
“…….”
“신의 이름을 찬양하기 위해 소성인 기도회에 참석했고, 심지어 힐데르드를 침공한 마물을 정화하기까지 했습니다. 이것만으론 아이의 신실함을 증명하기에 부족하다 여기시는 겁니까.”
키에른의 붉은 눈이 빛을 받아 난반사하는 보석처럼 반짝였다.
간신히 눌러 참았으나, 대놓고 비웃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은근한 미소가 입술에 그려졌다.
미친 남자는 기어코 성왕에게마저 비아냥거렸다.
“…고매하신 사제와 기사님들께서도 하시지 못한 일을 해냈는데.”
성왕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분노에 치를 떨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키에른의 발언은 흠잡을 곳 없이 매끄러웠다.
도저히 잡아낼 꼬투리가 없으니, 자연스레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려 신성 제국의 성왕을 입 닥치게 만든 대사건을 일으킨 키에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단의 죄를 물으시려거든, 아이 대신 저를 벌하십시오.”
그는 자신이 목표한 바를 향해 교묘하게 혀를 놀렸다.
“기꺼이 벌을 받겠습니다. 검은 숲에 갇혀 지내는 것도 지겨운 참이었으니.”
“…….”
시아노르의 침묵이 얼마간 더 이어졌다.
더 이상 침묵해선 안 될 만큼 길어졌을 때.
시아노르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명령했다.
“바실리안 백작을 이단 심문실에 가두어라.”
키에른이 웃음을 터뜨렸다.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듯 커다랗게 소리 내어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키에른은 낄낄 웃으며 되물었다.
“죽이질 않으시고?”
성왕 앞에서 저런 언행이라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당장 목이 잘려도 할 말 없을 만큼 미친 짓거리였다.
다른 이였으면 진즉 이 자리에서 즉결 처형을 당했을 짓을 저지르는데도, 성왕은 바실리안 백작을 처형하라 명하지 않았다.
척결해야 할 이단인 요정은 정작 건드리지도 못하고, 백작을 이단 심문실에 가두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해 댔다.
이유는 간단했다.
키에른이 죽으면 마물을 상대할 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신성 기사들이 구속구를 들고 다가왔다.
“아빠 잠깐 어디 다녀올게.”
실실 웃던 키에른이 웃음기를 거두고 다정히 말했다.
“울지 말고 있어요, 체샤.”
체포되는 쪽은 키에른임에도, 성왕은 제가 목이 졸린 것처럼 낯이 파리하게 질렸다.
긴장한 얼굴의 신성 기사들이 바로 앞까지 다가온 순간.체샤는 손을 번쩍 들었다.
언젠가 고아원에서 키에른을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쩌두 데려가새요.”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커다랗게 말했다.
성왕에게 충분히 들릴 만큼 크게.
다른 손으로는 키에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기운이 없어 비실비실한 손길이었다.
그러나 키에른은 급소라도 찔린 것처럼 버쩍 굳었다.
성왕은 절대 키에른을 죽이지 못한다.
지금 그를 이단 심문실에 가두는 것도 사실상 본보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체샤는 눈매를 단단히 치켜올리며 말했다.
“아빠랑 가치 깜옥 갈 거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