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129)
아기 요정은 악당-129화(129/200)
테오는 제 손에 들린 서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잔뜩 분노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글씨가 종이 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글자에서 아버지의 고함이 들리는 듯해서, 테오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버지인 네메아 후작이 친히 서신을 보낸 이유는 하나였다.
신성 제국 힐데르드에서 일어난 대사건.
한밤에 벌어진 마물의 침공.
끔찍했던 그날에 대해 당장 상세하게 보고하라는 재촉 서신이었다.
네메아 후작이 테오를 바실리안 백작가의 호위 기사로 보낸 이유는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였다.
테오는 사건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네메아 후작에게 보고할 거리는 넘쳐 났다.
어둠을 밝히던 새하얀 꽃비.
작은 아이가 일으킨 기적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장엄한 광경.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무찌를 수 없을 것처럼 위협적이던 마물들은 조그만 꽃송이 아래에서 꽃잎으로 변하였다.
그것은 퇴치나 사냥, 소멸과 같은 행위가 아니었다.
정화…….
신성한 정화의 순간이었다.
이단의 힘에 ‘신성’, ‘정화’ 같은 단어를 붙이는 건 옳지 못한 짓이었다.
그러나 테오는 그보다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없었다.
도대체 그게 정화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설혹 이단에게 홀렸다는 비난을 듣게 되더라도, 테오는 그날, 그 순간을 정화였노라고 꿋꿋이 주장하리라.
“…….”
하지만 이런 사실들을,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네메아 후작에게 보고하고 싶진 않았다.
네메아 후작은 바실리안 백작가에 대해 정보를 캐내라고 테오를 호위 기사로 붙여 놓았다.
아무런 보고도 올리지 않는다면 아버지도, 누님도 크게 실망할 터였다.
아버지는 이따위 일도 못 해내냐며 맹렬히 비난할 테고.
시오넬 누님은 바실리안 백작이 수상하다고 경고했는데, 어째서 그들의 편을 들고 있냐고 크게 나무랄 것이다.
아버지가 화를 내며 손찌검하는 일은 익숙했다.
하지만 누님이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면, 그건 많이 가슴 아플 듯했다.
테오는 너른 흉부가 크게 부풀어 오를 만큼 공기를 가득 들이마셨다.
‘그래도 답신하지 말자.’
신성 제국에서 머무르는 동안, 네메아 후작가에서 날아오는 서신은 죄다 무시해 버릴 작정이었다.
바실리안 백작가를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와 누님의 분노는 익숙하니 견뎌 낼 수 있어도…….
바실리안가의 사람들이, 특히 체샤 님이 저를 실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면 너무 괴로울 것 같았다.
저를 대단하다고 추켜세우고 칭찬해 주던, 사랑스러운 아기를 떠올리며 테오는 굳게 결심했다.
손에 든 서신을 막 구겨 버리던 찰나였다.
“왜 구겨요?”
“헉!”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테오는 펄쩍 뛰었다.
커다란 덩치가 무색하게 깜짝 놀라서 뒤돌아보니, 그곳에는 삐죽한 눈매의 소년이 서 있었다.
머리 뒤로 손깍지를 끼고 슬렁슬렁 다가오는 모양새가 어린 맹수와 비슷했다.
“네메아 후작님한테 온 서신이에요? 우리 가문 뭐 하는지 다 일러바치려고?”
바실리안가의 둘째였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카르하가 물끄러미 테오를 올려다보았다.
빤히 보는 시선에 테오는 중얼중얼 변명했다.
“아,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겁니다.”
카르하는 손깍지를 풀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전혀 믿음이 없다는 태도가 분명해서, 테오는 시무룩해졌다.
실제로 무슨 말을 하든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테오 네메아’니까.
이상하게 속이 울렁거렸다.
이유 모를 구역감이 치밀어서 조용히 숨을 골랐다.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린 테오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슈엘 님은…….”
별일이 없다면, 쌍둥이는 대체로 붙어 다니는 편이었다.
특히 신성 제국 내에서는 항상 같이 다니는 듯했는데…….
웬일로 카르하 혼자인 것이다.
카르하가 심드렁히 말했다.
“열나서 누워 있어요.”
“예에?”
테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물한테 부상을 입은 것도 아니고, 그냥 아파서 누워 있다니.
바실리안가의 남자들이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는 난생처음 들어 보았다.
믿기질 않아 하는 테오에게 카르하가 설명해 주었다.
“아픈 건 절대 아니고요. 자기 성질 못 이겨서 드러누운 거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
“예에에……?”
“내 동생 요정인 거, 온 대륙에 알려졌잖아요.”
“…아.”
테오는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곁에서 지켜본바, 바실리안들은 막내와 관련된 일에는 굉장히 예민하게 굴었다.
싸고돌지를 못해서 난리였는데, 요정이라는 사실이 화려하게 알려진 것이다.
결코 좋지 못한 일이었다.
이단으로 여겨지는 환상종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떠올리면 더더욱…….
체샤는 마물을 정화했기에 겨우 신성 제국에 붙어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어린아이라 하여도 이단 심문실로 끌려갔을 터였다.
요정이라면 정신 못 차리는 노예 사냥꾼들이 체샤를 노릴 수도 있는 법이었다.
체샤가 그날 내보였던 아름다운 힘은 축복처럼 보이지만, 실상을 파고들면 바실리안가의 불행이나 다름없었다.
그 때문에 동생 위험해지는 꼴을 뻔히 보면서도 말리지 못한 이슈엘이 성질 받쳐서 드러누운 것이고 말이다.
테오는 한참을 망설였다.
말을 고르고 골라낸 끝에 꺼낸 질문은 짧고 간단했다.
“카르하 님은… 아무렇지 않습니까?”
입양한 동생이 사실은 요정이었다니.
그것도 소성인 기도회에 참가하는 도중에 밝혀져, 바실리안 백작이 감옥에 갇히는 수모까지 겪었는데.
카르하는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테오의 질문에 카르하가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이며 잠시 고민했다.
“뭐어…. 이슈엘은 조금 힘들어하는데. 난 괜찮아요.”
“…….”
“요정이든 마물이든, 아기는 내 동생이고…. 누가 아기를 노리더라도.”
카르하는 허리춤의 검을 툭 두드렸다.
“내가 지켜 주면 되니까.”
조금의 허세도 섞이지 않은 진실이었다.
그날 요정의 힘을 쓴 체샤에게 신성 기사단이 몰려들었을 때.
바실리안들은 체샤를 지키기 위해, 망설임 없이 나섰다.
고작 넷이서 수백의 기사들 앞을 가로막았다.
테오는 그때 그들의 뒤에 자리하고 있었다.
뒷모습을 바라보는 기분은 참으로 이상했더랬다.
희미하게 이어지던 구역감이 갑자기 강해졌다.
숨쉬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서 테오는 입을 열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아직… 얼마 되지 않았는데.”
체샤가 바실리안의 이름을 달게 된 지는 불과 몇 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짧은 시간 만에 이토록 죽고 못 사는 사이로 단단하게 맺어진 이유가 궁금했다.
“테오 경도 알 텐데요.”
어려운 질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카르하는 별 실없는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이 반응했다.
“사랑할 수밖에 없잖아요?”
어떻게 걔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느냐고, 세계의 법칙을 말하듯 대꾸했다.
남들이 듣기엔 팔불출 같은 동생 자랑이지만.
테오는 듣자마자 어떤 의미인지 깨달아 버렸다.
벤지와 했던 결투가 생각났다.
아직도 기억이 선명했다.
참관인도 몇 명 없이, 누가 볼세라 조용히 치렀던 결투.
흙먼지가 섞여 마르게 불어오던 건조한 바람.
그와 다르게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
꽉 움켜쥔 검 손잡이.
벤지에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체샤 님이 날 믿고 응원해 줬으니까.’
그래서 테오는 용기를 냈다.
절대로 깨트리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알을 깨고 밖으로 나왔다.
오래도록 갇혀 있던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갔다.
테오 네메아의 인생이 바뀌는 전환점을 만들어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