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13)
아기 요정은 악당-13화(13/200)
“이름.”
“쩨샤입니다!”
체샤는 얼른 덧붙여 말했다.
“쩨샤 바실리안이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하일론은 냉랭하게 말했다.
“강제성이 있다면 말하라.”
“…강아지?”
“소성인 기도회 참석을 말하는 거다. 나는 너를 도와줄 수 있으니.”
“괜차나요!”
못 알아듣는 척하자 그가 잠시 침묵했다.
대신 체샤의 눈동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숨겨진 마법의 흔적이라도 찾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와 눈이 오래도록 맞닿았다.
오랜만에 본 탓일까.
곧은 눈빛을 받고 있노라니 속이 간지러웠다.
체샤는 순진한 아기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하일론이 또 뭘 물어볼지 몰라서 긴장되었다.
물론 겉으로는 평온하게 눈 댕그란 표정만 짓고 있었다.
한참 체샤를 바라보던 하일론이 기습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요녀 리체시아를 알고 있나?”
“모, 모르눈대요.”
비수가 푹 하고 심장을 찌른 기분이었다.
식은땀이 삐질 흘렀다.
조마조마한 마음에 가뜩이나 짧은 혓바닥이 더욱 짧아졌다.
“쩌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가꾸. 암꺼두 몰라요.”
체샤는 양손을 마구 내저으며 자신이 무려 2살 아기임을 필사적으로 강조해 주었다.
말해 놓고 보니 2살이 아니라 인생 2회차 같은 답변이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체샤의 변론은 먹혀들었다.
하일론 또한 어린 아기를 상대로 진지하게 다그쳐 봤자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달은 덕분이었다.
낮은 숨을 내뱉은 하일론이 손으로 제 눈 위를 덮었다.
잠시 그대로 있다가, 피로한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처럼 냉랭하던 무표정에 거미줄 같은 옅은 균열이 그어졌다.
어째서일까.
하일론은 괴로워 보였다.
본의 아니게 오래도록 알아 온 남자였다.
체샤가 고아원을 뛰쳐나오고, 하일론이 신전에 들어와 견습 기사가 되었을 때.
서로 인생이 격변하는 시기에 시작된 관계는 지금껏 이어져 왔다.
빈말로도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관계지만, 그래도…….
하일론과 체샤 사이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약간의 뭔가가 있기는 했다.
체샤는 그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
만일 하일론이 죽는다면, 최소한 제 손에 죽어야 한다고 여겼다.
아마 그건 하일론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멋대로 생각해 두긴 했는데.
‘내가 없어서 외롭나?’
체샤는 흘금흘금 그를 관찰했다.
가죽 장갑을 낀 손이 느릿하게 손목의 팔찌를 어루만졌다.
금방이라도 사방에서 새하얀 사슬이 뻗어 나올 것만 같았다.
쇠사슬이 잘각거리는 환청이 귓가를 희미하게 맴돌았다.
문득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름.”
새하얀 사슬에 묶여서, 박제된 나비처럼 허공에 띄워진 채로 그에게 심문당했었다.
“이름을 말해라, 요녀.”
딱딱하게 잘라 명령하는 하일론이 얄미워서 일부러 방긋 웃었다.
“알고 있잖아, 내 이름.”
“묻는 말에만 답하도록.”
푸른 눈동자는 조금의 동요조차 일으키지 않았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가 같은 말을 건조하게 반복했다.
“이름.”
아마 그래서였을 거다.
체샤가 심술을 부리게 된 것은.
단죄의 사슬에서 탈출한 체샤는 그에게 똑같이 되갚아 주었다.
함정을 파서 유인하고, 하일론을 가시덤불로 묶어서 허공에 띄워 놓는 데에 성공했다.
꽃과 가시에 엉망으로 휘감긴 신성 기사의 꼴이 보기 좋아서 웃음을 터뜨렸고…….
“죽여라.”
붙잡히자마자 일말의 망설임 없이 저를 죽이라 하는 꼴이 얄미워서 괴롭혀 주기로 결심했다.
“어떻게 그래. 넌 나를 살려 줬는데.”
“…….”
뒤엉킨 관계의 시작을 언급하자 하일론의 눈매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마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가 과거를 후회하든 말든 관심 없었다.
중요한 건 현재일 뿐이니.
체샤는 제 주변을 날아다니는 나비를 우아한 손짓으로 걷어내며 말했다.
“나도 한 번은 살려 줄게. 하지만 너도 알아야 해.”
빛을 한껏 머금은 붉은 눈동자로 제게 사로잡힌 사냥감을 응시했다.
“그때보다 우리 목숨값이 비싸졌어.”
하일론의 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손톱으로 살갗을 가볍게 긁어내리자, 단정한 눈매가 더욱 일그러졌다.
“과거 네가 나를 살려 주었을 때보다, 지금 내가 너를 살려 주는 게 훨씬 손해란 말이지.”
하일론은 잠시 손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들어 체샤와 눈을 마주했다.
냉담한 목소리가 말문을 열었다.
“원하는 게 무엇….”
하일론의 말이 뚝 멈췄다.
체샤는 살짝 눈을 내리깔며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
그가 눈을 부릅떴다.
이내 단단하게 묶인 손이 콰직, 가시덤불을 움켜쥐었다.
피가 흘러내리는데도 하일론은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짧지만 깊은 접촉 끝에, 맞닿았던 살갗이 떨어졌다.
분노와 수치가 뒤섞인 푸른 눈이 체샤를 노려보았다.
산산이 부서져 흔들리는 눈빛을 보는 건 무척 유쾌한 일이었다.
화가 나서 눈시울마저 붉게 달아오른 그를 즐거이 구경하며, 보란 듯 입술을 핥았다.
“그러니까 목숨값으로 키스 정돈 괜찮지?”
그때 머리끝까지 화가 난 하일론에게 정말로 소멸당할 뻔했다.
믿기지 않는 힘으로 가시덤불을 잡아 뜯은 그는 이후 사흘 밤낮 동안 체샤를 추격했더랬다.
재미있는 기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재미없어…….’
체샤는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만행을 후회하며 한숨 쉬었다.
하일론을 조금만 덜 괴롭혔으면 이만큼 긴장되진 않았을 텐데.
괜히 바실리안 백작가까지 휘말릴까 봐 걱정이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거기도 막장인데.’
휘말리는 게 아니라, 이미 이단 심문관들 눈 돌아갈 만한 짓을 꾸미고 있었다.
키에른은 죽은 사람을 살리고 싶어 하니까.
체샤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때였다.
하일론이 체샤 속 뒤집어지는 소리를 했다.
“너를 낳아 준 친모를 기억하나?”
“네?”
“혹시 친모가 눈부신 금색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나.”
“…네에?”
하일론은 진지한 눈을 하고서 미친 소리를 했다.
“나비나 꽃을 봤다든가, 몸에서 꽃향기가 났다든가, 친모에 대해 무엇이든 좋으니 떠오르는 걸 말해 보아라.”
자, 잠깐. 잠깐만.
이거 지금, 설마, 하일론이.
내가, 그러니까 요녀 리체시아가…….
애 낳아서 고아원에 갖다 버렸다고 생각하는 건가?
‘날 리체시아의 딸이라고 생각하는 거냐고!’
정말 끔찍한 상상이었다.
막말로 요녀 리체시아는 임신할 시간조차 없었다.
하타 챙기면서 틈틈이 사고 치고 도망 다니기도 바쁜데, 언제 마음 편히 누군가와 사랑할 시간을 가지겠는가.
그런데 지금 하일론은 그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 듯했다.
아주 조금 이해는 갔다.
리체시아의 행방이 묘연한데, 난데없이 닮은 아기가 눈앞에 떡하니 나타났으니 말이다.
‘아니야! 이해 안 돼!’
체샤는 제발 하일론이 미친 상상을 그만두길 바랐다.
그의 은색 머리카락을 잡아 뜯고픈 충동에 시달리던 때였다.
“아니면.”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빳빳하게 세운 목깃의 단추를 툭 풀어냈다.
체샤는 입술을 벌렸다.
하일론이 제복 단추를 연이어 툭, 툭, 하나씩 끌렀다.
안에 받쳐 입은 검은 상의의 작은 싸개 단추 또한 망설임 없이 투두둑 풀어 나갔다.
체사는 슬금슬금 몸을 뒤로 뺐다.
소파 등받이에 찰싹 달라붙어서 ‘이 새끼 왜 이래 미친 거 아냐?’ 하는 눈으로 보는데도, 하일론은 개의치 않았다.
기어코 제복 아래에 감추어져 있던 살을 내보였다.
가슴팍이 반쯤 드러나도록 단추를 풀어 헤친 그가 옷깃을 붙잡고 옆으로 당겼다.
곧은 쇄골이 드러났다.
“끄앙!”
체샤는 양손으로 눈을 가렸다.
물론 완전히 가리지는 않았고, 손가락 사이가 벌어져 있긴 했다.
쇄골 위에 그려진 붉은 꽃문양이 한낮의 햇빛 아래 선명했다.
대낮부터 정신 나간 짓을 저지르면서도, 하일론은 침착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이 문양을 본 적이 있나?”
당연히 본 적 있다.
체샤가 그에게 새겨 놓은 표식이니까.
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판단이 서지 않았다.
놀라서 물고기처럼 입술만 빠끔거리던 때였다.
달칵, 노크 없이 문이 열렸다.
“…이거.”
매끈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군요.”
체샤와 하일론은 동시에 문 쪽을 돌아보았다.
우두둑, 키에른이 벽에서 촛대를 뜯어냈다.
그가 촛대를 휙 하고 휘두르며 웃었다.
“죽고 싶습니까, 하일론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