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136)
아기 요정은 악당-136화(136/200)
고통에 몸부림치던 시아노르가 뒤로 넘어졌다.
절단된 부위에서 끝도 없이 피가 솟았다.
그러나 고귀한 피는 한 방울도 낭비되지 않았다.
전부 빠짐없이 문양으로 흡수되었다.
문양은 성왕의 신성력을 마구 들이켜기 시작했다.
앞선 신성 기사들의 신성력을 합친 것보다도 더욱 강한 신성력이었다.
게걸스럽게 신성력을 빨아들여 하일론에게 퍼붓던 문양이 일순 빛을 번쩍였다.
한계를 넘어선 것일까.
쇠를 긁는 듯한 소리가 고막을 꿰뚫었다.
그와 동시에 바닥의 문양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빛이 사그라들고, 정적이 찾아왔다.
사위를 가득 메웠던 단죄의 사슬 또한 사라졌다.
백색 공간에 찾아든 고요는 섬뜩했다.
“…….”
하일론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가늘게 경련하는 몸을 일으켰다.
몇 번이고 넘어질 뻔했으나, 간신히 일어나는 데에 성공했다.
느릿하게 숨을 들이마시곤, 손등으로 시야를 가리는 핏물을 닦아 냈다.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기절한 시아노르를, 죽은 일곱의 신성 기사를, 살아남은 다렌을 보았다.
단죄의 사슬이 폭주할 때 다렌 또한 휩쓸려 상처를 입은 듯했다.
그의 눈 아래에 생겨난 상처에서 핏물이 흘렀다.
다렌은 멍하니 하일론을 응시했다.
피투성이가 된 몸, 그리고 발치에 흩어진 날개를 보던 다렌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벌어진 입술에서 괴로운 신음이 터졌다.
눈물과 뒤섞인 피가 뺨을 타고 붉게 흘러내렸다.
고요한 백색 공간에 울음소리가 번졌다.
죽은 이를 향한 장송곡과 같은 오열이었다.
그러나 하일론은 울지 못했다.
흐느끼는 다렌과 달리, 그저 우두커니 서서 죽은 자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우는 법을 잊어버린 듯이.
***
“헤바톤의 왕자가 오늘 교육을 받는다고 합니다.”
다렌은 눈매를 가늘게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이미 그 어린 왕자는 한계에 달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상 현상을 일으킬 만큼 신성력에 재능이 있지도 않은 듯한데.”
이러다 누구 하나 죽어나겠다고 심드렁하게 말하다가, 흘긋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엇…. 비가 오겠는데요.”
과연 하늘이 우중충했다.
회색빛이 감도는 하늘과 습기를 머금은 눅눅한 공기까지.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투둑투둑 떨어질 듯했다.
하늘을 보던 다렌은 옅게 숨을 내쉬었다.
비 맞으면서 훈련할 생각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연무장에서 미리 대기 중이던 기사들도 같은 생각이었던 듯했다.
하늘을 보며 꿍얼대던 그들은 하일론과 다렌이 나타나자 곧장 자세를 바로 했다.
경외심 어린 눈빛이 일제히 하일론을 향했다.
다렌은 가슴에 뿌듯하게 차오르는 자랑스러움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미소했다.
그러면서 흘긋 제 옆의 하일론을 쳐다보았다.
하일론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무표정했다.
하지만 푸른 눈은 평소와 달리 조금 짙게 가라앉은 채였다.
‘헤바톤 왕자 때문인가.’
다렌은 씁쓸함을 가만히 삼켰다.
아무래도 교육과 엮인 일이면, 무감한 하일론도 예민해지곤 했다.
‘일곱이 죽었으니까.’
교육에 희생된 신성 기사 일곱 명은 견습 기사 시절부터 함께 수련해 왔던 동료였다.
힐데르드는 신분에 따른 차등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선은 분명하게 존재했다.
귀족이었던 자들과 천민이었던 자들은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신성 제국 또한 은근하게 그들을 따로 관리했다.
하일론과 어울리던 기사들은 전부 소위 말하는 ‘천한 자들’이었다.
먹는 입을 하나라도 줄이려고, 갈 곳 없는 고아라서, 집안의 빚을 갚기 위해서…….
각양각색의 사연을 지닌 이들은 절박했다.
그랬기에 성왕 시아노르가 ‘대의를 위한 희생’을 운운했을 때.
거금의 보상을 약속하고, 가족을 들먹이는 성왕에게 누구도 반항하지 못했다.
모두 얌전히 신성력을 바치는 제물이 되었다.
본래 신성 제국에 속하는 순간부터, 그 시체마저 힐데르드를 위해 봉헌되니.
신성 기사들의 성검을 만드는, 신성 제국에서만 생산된다는 백색 광물은 죽은 성인들의 유골로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시체를 쓰는 일과, 산 제물을 바치는 일은 완전히 달랐다.
‘전부 성왕의 욕심 때문에 벌어진 참극이었으니…….’
성왕은 하일론에게 단죄의 사슬을 내어 주었다.
누구도 다루지 못했던 성유물을 손목에 채우며, 이것을 능히 부릴 신성력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했다.
하일론의 신성력은 매년 늘어나고 있었다.
몇 년만 더 기다렸다면.
그따위 끔찍한 짓을 저지르지 않고도, 충분히 단죄의 사슬을 다루게 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성왕은 갓 성년이 된 하일론에게 강제로 신성력을 주입했다.
자신을 위한 새로운 성유물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신성력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에게 한계 이상으로 신성력을 주입했을 때.
신의 기적이라 불리는 이상 현상이 나타난다.
바로 날개가 생겨나는 것이었다.
그것을 재료 삼아 제작한 게 바로 신성 제국의 성유물이었다.
하여 성왕은 신성 기사들을 산 제물로 바쳐서 신성력을 주입했고, 하일론은 여덟 장의 날개를 만들어 냈다.
성왕이 목표했던 것보다 월등히 뛰어난 성과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
그날 성왕은 하일론에 의해 신성력 대부분을 상실했으며, 양팔을 잃고 의수를 착용하게 되었다.
제물로 바쳐진 신성 기사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다렌은 그날을 기억하기 위해 얼굴의 흉터를 지우지 않고 남겨 두었다.
그리고 일곱의 생명을 삼킨 하일론은…….
죽으려 했다.
“일곱을 희생할 만큼 내 목숨이 값지진 않으니까.”
그 당시 하일론은 갓 성년이 되었을 뿐이었다.
제아무리 타인에게 무감한 그라도, 오랫동안 함께했던 동료들의 죽음 앞에서도 태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요녀를 찾아갔었고.’
요녀 리체시아에게 저를 죽여 달라 청하러 갔으나, 어째서인지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
‘그런 걸 생각하면 요녀가 고맙긴 한데.’
혼자서 한창 오래된 과거를 곱씹던 때였다.
“다렌.”
짧은 호명에 다렌은 회상으로부터 빠져나왔다.
“죄송합니다.”
너무 딴 데 정신을 팔았다.
다렌은 짧게 사죄하며 곧게 등을 폈다.
하일론이 제 앞에 도열한 기사들을 무심한 시선으로 훑던 때였다.
“…!”
그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놀란 이는 하일론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헉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허공에 꽃이 피어났다.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송이에서 짙은 향기가 퍼져 나갔다.
눈부신 반짝이를 함께 흩뿌리는 꽃은 요정의 힘으로 피워 낸 것이었다.
하일론은 홀린 듯이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흐드러지는 꽃 사이에서 나타난 이는 작은 아기였다.
앙증맞은 아기는 커다란 분홍색 눈으로 하일론을 바라보았다.
다렌은 놀라서 중얼거렸다.
“…아기님이잖아?”
체샤 바실리안이 요정이라는 사실은 이미 온 대륙이 알고 있었으나.
신성 제국 내에서 이토록 당당하게 힘을 사용해 좋을 것이 없었다.
바실리안 백작이 단단히 당부해 놓았을 테고, 본인도 함부로 힘을 쓰지 않는 듯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대놓고 힘을 써서, 그것도 신성 기사들이 죄다 모여 있는 앞에 나타난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깜짝 놀란 신성 기사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조그만 아기를 쳐다보는 사이.
하일론은 서둘러 꽃을 헤집고 아이를 끌어내 품에 안았다.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하일론에게 안겼다.
그리고 시선이 맞닿은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
“…….”
하일론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우선 눈물을 닦아 주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아이가 조그만 주먹으로 가슴팍을 콩콩 내리치며 마구 울었다.
“바보! 멍쵸이……!”
난데없이 욕부터 먹은 하일론은 가만히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서럽고, 속상하고, 슬퍼서 퐁퐁 눈물 흘리는 아이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커다란 손이 아이의 작은 뺨을 가볍게 감쌌다.
발간 얼굴로 히끅거리는 아이에게 그는 이유 모를 용서를 빌었다.
“내가 잘못했다.”
그러자 아이는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