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137)
아기 요정은 악당-137화(137/200)
백색 공간에 남겨진 기억을 보는 내내, 체샤는 애타게 바랐다.
이미 흘러간 과거를 바꿀 수 있기를.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무의미한 시도를 반복했다.
끔찍한 순간을 목격했으나, 남겨진 기억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체샤는 성왕 시아노르가 하일론에게 행한 ‘교육’도 보았다.
본래 신성력을 강제로 주입하는 과정을 교육이라 일컬었다.
레밀에게 요정의 힘이 느껴진 이유는, 한계 이상으로 신성력을 밀어 넣기 위해서였다.
육체가 망가지지 않게끔 요정의 힘을 섞은 것이다.
하지만 하일론은 그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성왕의 신성력을 집어삼킨 이후로는 이미 정점에 다다라, 문양을 이용해 신성력을 밀어 넣을 수도 없었다.
신성력은 물론이고, 양팔과 육체의 젊음마저 잃어버린 시아노르는 결코 하일론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일론은 힐데르드의 역사에 이름을 새길, 가장 뛰어난 신성 기사였다.
함부로 죽일 수 없으니, 그는 하일론을 다른 방식으로 교육하기로 결정했다.
바로 무한한 시간이었다.
실험을 거듭하던 와중에 우연하게 발견한, 문양의 힘이 만들어 내는 뒤틀린 공간.
그곳에서는 고작 1초의 시간이 하루로 변했다.
며칠 갇히고 나면, 수백 년이 흐른 것과 다름없으니.
교육을 받고 제정신을 유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하일론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하일론은 그저 담담했다.
교육을 무심히 받아들였으며, 일주일 넘게 감금되고도 멀쩡하게 백색 공간을 벗어났다.
그러나 겉으론 태연하게 보여도, 선명했던 푸른 눈이 조금씩 마모되어 가는 것을…….
오직 체샤만이 알아챌 수 있었다.
하일론이 성왕에게 교육당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생각했다.
‘나한테 왜 이 기억을 보여 줬는지 알 것 같아.’
문양은 하일론이 엮인 기억을 꺼내서 보여 주었다.
마치 체샤가 신성 제국에 적개심을 가지길, 하여 복수해 주기를 바라는 듯이.
요정 여왕의 왕관 또한 체샤에게 원하는 바가 있었다.
신성 제국에 오기 전에 만난 요정도.
그리고 지하에 갇혀 있었던 마물들도.
요정과 연관된 모든 것들이 체샤를 중심으로 서서히 엉겨들고 있었다.
정말 체샤가 요정 여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
문양이 펼쳐 내던 기억이 모두 끝나니, 다시 원래의 공간으로 되돌아왔다.
체샤는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백색 공간은 변한 바 없이 그대로였다.
가장자리가 붉게 물들었던 문양이 다시 완전한 푸른색으로 되돌아간 것을 제외하곤.
체샤는 레밀의 품에 꽉 안겨 있었다.
레밀은 아직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끔찍한 악몽에 갇힌 듯, 연신 몸을 떨며 신음했다.
체샤는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눈물로 온통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손등으로 슥슥 물기를 닦아 내곤, 레밀의 뺨을 손으로 찹 하고 때렸다.
깊은 물속에서 빠져나오는 것처럼, 레밀이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떴다.
“헉, 허억…….”
작은 가슴이 빠르게 달싹였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레밀이 다급히 품 안의 체샤를 움켜쥐었다.
조금 아프다 싶을 만큼 꽉 쥐다가, 뒤늦게 제정신을 차리곤 황급히 체샤를 놓았다.
“체, 체샤 님……?”
엉망으로 흔들리는 눈동자로 미뤄 짐작건대, 레밀도 하일론이 어떤 짓을 당했는지 고스란히 본 모양이었다.
체샤는 레밀이 진정하길 잠시 기다린 후에 입을 열었다.
“너두 봐찌?”
“…네.”
“이고 계속 하면 위험해.”
“하지만…….”
대답을 망설이는 레밀의 손을 답삭 붙잡았다.
수십 송이의 꽃이 일시에 피어나 레밀과 체샤를 감싸 안았다.
꽃송이에 막힌 시야가 트였을 땐, 소년과 아기는 정원으로 나와 있었다.
놀라서 눈만 크게 뜬 채로 굳어 버린 레밀에게 경고했다.
“하디 마. 죽기 시르면.”
이미 레밀의 육체는 한계였다.
여기서 더 신성력을 밀어넣다간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
커다란 나무 아래에 레밀을 놓아두고, 체샤는 다시 힘을 일으켰다.
지금 당장 만나야 할 이가 있었다.
“…체샤 님!”
레밀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제대로 말도 못 걸어서, 항상 어눌하게 웅얼거리던 소년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분명한 목소리였다.
꽃으로 둘러싸인 체샤는 허공에 둥둥 뜬 채 레밀을 내려다보았다.
“저는, 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묻는 얼굴은 필사적이었으며, 절대적인 신뢰로 가득했다.
지금 이 순간 체샤가 죽으라고 하면 죽을 듯이.
하지만 체샤는 레밀에게 명령하지 않았다.
“네 맘대루 해.”
“어…. 저는, 그렇지만…….”
꽃 사이로 사라지며, 레밀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할 수 이짜나.”
그 말을 끝으로, 체샤는 완전히 사라졌다.
레밀이 손을 뻗었지만, 손끝에 닿은 것은 꽃잎뿐이었다.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빛으로 부스러져 흩어졌다.
“…….”
레밀은 텅 빈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넋이 나간 눈으로 제 손을 보다가, 문득 통증을 느끼곤 어깨를 움츠렸다.
너덜너덜해진 입술에서 핏방울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마구잡이로 씹어 버린 탓이었다.
레밀 또한 기억을 보았다.
다만 체샤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면…….
“…아.”
짤막한 소리가 입에서 터졌다.
기억을 되짚다가 저도 모르게 나쁜 생각을 해 버렸다.
레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얼른 마음속으로 회개 기도를 올렸으나, 별로 소용이 없었다.
한번 떠오른 생각은 쉬이 떨쳐지지 않았다.
도리어 문신으로 새겨 넣은 듯이 머릿속에 단단히 박혀 버렸다.
“어, 어떡하지…….”
어린 소년은 잔뜩 울상이 되어 중얼거렸다.
레밀은 자신이 이룰 수 없는 욕심을 품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
하일론을 보자마자 울음이 터졌다.
정말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누가 꾹 하고 울음 버튼을 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와아앙 하고 대뜸 울면서 바보에 멍청이라고 욕을 하는데도, 하일론은 체샤를 달래 주었다.
오히려 제가 미안하다고 사과하기까지 했다.
“우루루, 아기님, 울지 마세요!”
“이것 보세요, 아기님. 진짜 예쁜 꽃입니다.”
“이건 네잎클로버!”
하일론이 체샤를 안고 다독이는 동안, 신성 기사들도 죄다 모여들어서 체샤를 어르고 달래려 애썼다.
덩치 산만 한 기사들이 둥글게 둘러싸고 어떻게든 아기를 달래려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다들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요정이 꽃이랑 풀을 좋아한다며 우르르 하나씩 꺾어 와서 체샤 앞에서 흔들어 댔다.
그 정신 사나운 틈바구니에 하일론의 부관인 다렌도 함께 끼어서 동동거렸다.
당연히 기사들이 아기를 달래겠다고 떨었던 난리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만.”
결국 하일론이 나서서 모두 중단시켰다.
여전히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체샤를 안고, 그는 조용한 곳을 찾아갔다.
체샤는 힘이 빠져서 히끅히끅 하면서도 하일론의 가슴팍을 열심히 눈물로 적셨다.
인적이 드문 분수대 옆 의자에 자리한 하일론은 체샤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가 너무 울어서 짓무르기 시작한 눈가를 손가락으로 살살 어루만졌다.
“울지 마라. 더 울다간 몸이 상하겠군.”
무뚝뚝한 목소리에는 차마 다 표현하지 못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체샤는 훌쩍이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하일론은 얌전히 체샤에게 붙잡혀 주었다.
한참 차이 나는 손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런 조그만 손이 아닌, 커다란 손으로 하일론을 안아 주고 싶었다.
그의 등에 남겨진 여덟 개의 흉터를 알고 있는 요녀 리체시아로서, 하일론의 과거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기 모습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른이 되고 싶어.’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소망이었다.
그러나 바실리안의 체샤로 살고 싶기도 했다.
이미 자신은 바실리안에게 마음을 주었으니.
아이로 남고 싶은, 그리고 어른이 되고 싶은 상반된 소망이 체샤 안에서 마구 뒤엉켰다.
하나를 얻으려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만 한다.
욕심부려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 어느 쪽도 놓을 수 없었다.
아니, 한쪽을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보장도 없었다.
눈물 어룽어룽한 눈으로 하일론을 바라보던 때였다.
체샤는 깨달았다.
아이로 살게 되든, 어른으로 살게 되든.
어느 쪽을 택해도, 자신은 가지지 못한 하나 때문에 불행해지리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