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143)
아기 요정은 악당-143화(143/200)
소성인 기도회의 우승자를 공표하는 날이었다.
식을 진행하기 위해 모두 드넓은 광장에 모였다.
그러나 모여든 이들은 딱히 우승자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죄다 바실리안 백작가에 쏠려 있었다.
열렬한 시선을 느끼며, 체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광장 곳곳에 신성 제국 깃발이 휘날렸다.
날은 선선하지만, 오래 서 있기엔 내리쬐는 햇빛이 조금 거슬렸다.
대리석 바닥이 빛을 반사하는 탓에 더욱 그러했다.
“멀쩡한 건물 놔두고 왜 바깥에서 하는 거야. 피부 상하게…….”
챙 넓은 모자를 쓴 이슈엘이 불평을 터뜨렸다.
체샤의 얼굴이 타지 않도록, 이슈엘은 몇 번이나 양산을 고쳐 쥐며 꼼꼼하게 확인했다.
덕분에 체샤는 완벽한 그늘 아래에 자리할 수 있었다.
이슈엘이 체샤를 챙기는 사이, 카르하는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테오랑 무어라 대화하는 중이었다.
요새 둘이서 부쩍 붙어 다니는 느낌이었다.
‘저렇게 친했나?’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다.
체샤는 흘긋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그쪽에선 키에른과 벨제온이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벨제온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설핏 희미한 미소를 보내는 그에게 체샤도 방싯 웃어 주었다.
중요한 날인 만큼, 신성 제국에 속한 이들 대부분이 광장에 자리했다.
신성 사제들은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그들이 원하던 대로 헤바톤의 왕자, 레밀이 우승을 거머쥐었다.
스카야의 공주, 아란 스카야가 자신을 지지하던 이들에게 레밀을 밀어 달라고 요청한 덕분에, 무사히 우승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신성 기사 세력이 지지하던 체샤 바실리안을 밀어냈으나, 신성 사제들은 마냥 기뻐하며 축배를 들 수는 없었다.
반쪽짜리 승리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구심점이었던 밀리오드 추기경이 처참하게 축출되었다.
이단으로 내몰리다 못해, 신성 제국에 마물을 끌어왔다는 누명까지 덮어썼다.
심지어 그 모든 사태를 성왕이 묵인하였으니.
신성 사제들로서는 미칠 지경이리라.
‘근데 하일론은 또 어디 갔지.’
하일론도, 성왕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 전, 소성인 기도회의 우승자를 가리기 위해 99명의 성인이 모였다고 하였는데…….
슬쩍 살펴보니 신성 기사들도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채였다.
‘이단 심문관인 걸 만천하에 드러냈으니, 무언가 벌을 받았으려나.’
그가 또 교육을 받고 있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의식이 끝나는 대로 하일론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 나타나지 않은 채.
소성인 기도회의 우승자를 발표하는 의식이 시작되었다.
성왕 시아노르도, 밀리오드 추기경도 없는지라, 우승자를 치하하는 역할은 다른 추기경이 맡았다.
“신의 이름 아래, 가장 신실한 어린 성인을 선별하였으니.”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추기경은 맡은 역할이 부담스러운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몇 번이고 헛기침을 한 후에야 우승자를 호명했다.
“이번 기도회의 소성인은… 헤바톤 왕국의 레밀 루 헤바톤입니다.”
짝짝짝.
심드렁한 박수가 쏟아졌다.
좌중의 무성의한 박수 세례 속에서 레밀이 천천히 단상으로 걸어갔다.
우승자로 뽑힌 레밀은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밀랍처럼 희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입술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추기경이 유리 상자를 열었다.
화관을 둘러싼 흰색 사슬이 스르륵 사라졌다.
추기경은 조심스럽게 화관을 꺼내 레밀의 머리에 얹어 주었다.
레밀이 어색하게 앞을 보고 바로 서자, 사람들은 다시금 대강대강 손뼉을 쳤다.
“…….”
체샤는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왕관은 제게서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 놓여 있었다.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먼 곳에.
다른 사람이 왕관을 쓰는 걸 구경하고 있노라니 기분이 썩 불편했다.
‘그래도 곧 내 손에 들어올 거니까.’
꿈틀거리는 마음을 누르려 군중 속에서 아란을 찾았다.
눈이 마주치자 아란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체샤는 요정의 힘으로 꽃을 피워 내, 비슷한 모양의 가짜 왕관을 만들었다.
이걸 아란이 진짜 왕관과 바꿔치기할 예정이었다.
물론 체샤가 만든 꽃은 요정 여왕의 왕관처럼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은 아니었다.
하지만 헤바톤 왕국에 도착할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터였다.
왕국에 도착한 이후에 화관이 시들어 버리면.
‘그건 뭐, 신성 제국 벗어나서 그렇겠거니 하고 대충 알아서 생각하겠지.’
요정의 것이니, 화관이 시들어도 인간들은 원인을 알지 못할 것이다.
‘바실리안이 나서기엔 지켜보는 시선들이 너무 많아.’
아란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아란에게 레밀과의 친분을 어느 정도 쌓아 놓으라고 요구하기도 했고 말이다.
‘심지어 키에른은 요정 여왕의 왕관을 흑마법의 제물로 바칠 작정이라고.’
체샤가 우승하여 왕관을 가져갔다가 제물로 써서 부숴 버리면, 신성 제국의 의심을 직격으로 받을 터였다.
그보다는 몰래 바꿔치기해서 들고 오는 쪽이 훨씬 안전하게 바실리안을 지킬 수 있으리라.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산을 굴리며, 작은 손바닥으로 짝짝 박수를 보내던 때였다.
박수갈채가 잦아들고, 광장이 조용해졌을 즈음.
레밀이 입술을 열었다.
소성인 기도회 우승자로서 밝힐 소감을 기다렸으나.
소년에게서 흘러나온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저는 왕관을 가질 자격이 없습니다.”
레밀의 발언에 방금까지 지루해하던 이들이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항상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레밀은 곧게 몸을 폈다.
문득 제법 키가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관을 벗어 든 레밀은 떨지도, 더듬지도 않고 또박또박하게 제 의견을 말했다.
“모두가 아시겠지만, 마물을 막아 낸 것은 바실리안가의 체샤 님입니다. 소성인 기도회에 참석한 그 누구보다도 신실하고 희생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
‘그건 맞는 말이긴 한데.’
체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참았다.
“신께서도 제가 홀로 이 모든 영광을 독식하는 일을 원치 않으실 터…….”
레밀이 똑바로 체샤를 바라보았다.
결연한 눈과 마주친 순간, 체샤는 덜컥 불안해졌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체샤는 재빠르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레밀은 기어코 말해 버렸다.
“체샤 님과 신성의 영광을 나누고 싶습니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체샤를 안고 있던 이슈엘이 작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저 애새끼가…….”
그러다가 뒤늦게 체샤가 듣고 있음을 깨닫곤 입술을 말아 물었다.
신성 사제들도 레밀의 돌발 행동에 크게 당황한 듯했으나, 레밀의 말에 반대하고 나서지 못했다.
구실이 없기 때문이었다.
왕관을 어찌 처분하든지, 그건 우승자의 소관이기도 했고 말이다.
‘마음대로 하라고 했더니 이런 짓을.’
제 딴에는 체샤를 챙겨 주려는 것 같은데 전혀 고맙지 않았다.
체샤는 이슈엘의 팔뚝을 톡톡 두드렸다.
일단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앞으로 나서긴 해야 할 듯했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이슈엘은 느리게 걸어가 단상 위에 체샤를 내려 주었다.
“체샤 님.”
레밀이 왕관을 손에 들고서 속삭이듯 체샤를 불렀다.
그러나 체샤는 레밀 대신 왕관만 살펴보았다.
왕관은 얌전했다.
노래를 부르지도, 이상 현상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마치 자신이 해롭지 않음을 광고하듯 은은한 빛만 반짝반짝 뿌려 댈 뿐이었다.
체샤가 왕관을 써도 아무 짓도 저지르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몹시 점잖은 태도에 체샤는 약간 안심되었다.
‘…괜찮을지도?’
슬며시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으로만 살짝, 아주 살짝, 톡 하고 왕관을 건드렸는데도 아무 변화 없이 얌전했다.
휴,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쉰 체샤는 레밀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까닥였다.
‘씌워 봐라!’
레밀이 조심스럽게 체샤의 머리에 왕관을 얹었다.
자그만 머리에 화관이 완벽히 올라앉은 순간이었다.
“…!”
체샤는 무언가가 자신을 관통하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정수리부터 꿰뚫리는 감각에 헛숨을 들이켰다.
발밑에서 꽃이 피어났다.
마치 화약이 폭발하듯, 주체할 수 없이 마구잡이로 피어오르는 꽃은 가시덤불과 함께 뒤엉켜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흰 대리석 바닥이 순식간에 꽃으로 뒤덮이니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졌다.
꽃 덤불에 걸려 넘어진 사람들이 허우적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애썼으나, 발이 단단히 걸린 탓에 쉽지 않았다.
아수라장을 만든 장본인인 체샤는 놀라서 왕관을 벗어 던지려 했다.
하지만 머리에 달라붙기라도 한 것처럼 꼼짝하질 않았다.
“끄앙!”
손등이 타들어 가듯 뜨거웠다.
정신없는 와중에 손등을 확인하니, 지난날 요정이 새겨 놓은 문양이 빛을 내뿜고 있었다.
까르륵 웃는 소리와 함께 왕관의 즐거운 노래가 귓가를 울렸다.
그 순간 체샤는 깨달았다.
‘이 미친 왕관 같으니!’
왕관은 지금 체샤를 요정 왕국으로 보내려 하고 있었다.
눈앞이 꽃으로 뒤덮이려는 찰나.
으드득, 꽃 덤불에 새까만 마검이 파고들었다.
키에른이 절박하게 소리쳤다.
“체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