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158)
아기 요정은 악당-158화(158/200)
상태야 당연히 안 좋으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하타의 어감은 약간 더 미묘했다.
그 미묘함이 무엇인지 한참 고민하던 체샤는 문득 깨달았다.
‘기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듯한 어조잖아?’
하지만 하타는 자세히 말해 주지 않았다.
얼마간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체샤의 품에 꼭 안긴 채로 꼬르륵 잠들어 버릴 뿐이었다.
‘뭐…. 별일이야 있겠어.’
어차피 바실리안가의 남자들이 비정상임은 체샤도 익히 아는 바였다.
원래 미쳤는데 거기서 더 미쳐 봤자 뭐 어떻겠냐고.
체샤는 그저 가볍게 넘겨 버렸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팔렌 제국으로 떠나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여행은 따분할 만큼 무난하고 순조로웠다.
실력 좋은 용병들이 지키고 있으니 위험한 일이 생길 수가 없었다.
평화롭게 스카야를 벗어나, 팔렌 제국으로 향했다.
제국에 진입하기 전, 일행은 뒷세계 근방에 다다랐다.
팔렌 제국으로 가려면 뒷세계를 가로지르는 길이 가장 가깝지만, 그러기엔 너무 위험했다.
고가의 물품이 가득한 마차 다섯 대로 뒷세계라니.
아무리 날고 기는 용병들을 잔뜩 고용했어도 어려울 일이었다.
하여 우회하기로 결정하고, 일행은 뒷세계와 가까운 마을 여관에서 짐을 풀었다.
많이 피곤했던지, 아란은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혼자 방을 쓰게 된 체샤는 문밖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로 앞에서 지키고 선 사람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들은 호위라기보단, 사실상 감시자에 가까웠다.
요녀 리체시아와 만날 유일한 수단인 체샤를 잘 감시하라고, 이타르가 엄중히 명령하였으리라.
‘하지만 평범한 인간이 날 어떻게 막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가자!’
체샤는 간단하게 짐을 챙겼다.
뒷세계에서 삼 형제 중 아무나 한 명만 마주치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일이 없을 테니 말이다.
가방을 뒤져 보니, 체샤가 스카야 의복으로 갈아입으며 벗어 놓았던 이상한 옷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가방에는 시든 꽃잎 몇 장만 남아 있었다.
아마도 환역에서 만들어진 옷이라서 꽃잎으로 흩어져 버린 듯했다.
단출하게 짐을 꾸린 체샤는 이마에 꽃을 찰싹 붙여서 기척을 없앴다.
하타에게도 꽃을 붙여 주고, 창문을 열어 바깥으로 뛰어내리기 전.
마지막으로 잊은 게 없나 방을 둘러보았다.
“…아, 맞다.”
토끼 인형이 침대에 불쌍하게 엎어져 있었다.
체샤는 얼른 토끼 인형을 챙겼다.
하타가 쳇, 하며 짧게 싫은 소리를 냈지만 무시했다.
‘인형이 말을 못 하니까 이게 불편하네.’
원래 같았으면 자기 챙겨 가라고 떽떽 소리 질러서 모를 수가 없었을 텐데 말이다.
‘대체 언제쯤 말하려나.’
정말 평범한 인형처럼 달랑거리는 모습을 보니 조금 걱정이 되긴 했다.
아마 체샤가 어느 정도 힘을 되찾아야 다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듯했다.
요정들도 찾아야 하고…….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체샤는 토끼 인형과 하타를 챙겨서 뾰로롱 여관을 빠져나왔다.
삼 형제를 만나지 못하면 아침 일찍 돌아오겠다는 목표를 갖고서.
그러나 야심차게 나선 한밤의 탈출은 출발부터 영 시원치 않았다.
낮에도 내내 먹구름이 껴서 우중충하다 싶더라니, 기어코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체샤는 머리에 토끼 인형을 얹고, 한쪽 팔로 하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커다란 꽃 하나를 꺼내서 우산으로 썼다.
좀 웃긴 모양새였지만, 그래도 모습을 감추고 있으니 괜찮을 듯했다.
“여기서 걸어가면 너무 멀겠지?”
“약간요! 하지만 하타가 지름길 아니까 괜찮아요.”
체샤는 걸음을 서둘렀다.
비가 더 내리기 전에 얼른 도착해야 했다.
하타의 안내를 따라 얼마간 걸어가니, 빗줄기 사이로 어른어른 불빛이 드러났다.
비 내리는 밤에도 뒷세계는 화려한 야경을 자랑했다.
먼발치에서 뒷세계를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수런거렸다.
이제는 저곳이 수백 년 전, 선대 요정 여왕이 만들어 낸 공간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지닌 강대한 힘이 역행하여 탄생한, 생명이 자라지 않는 불모지.
황폐한 땅에 들어서며, 체샤는 아주 잠깐 엄마를 생각했다.
그러나 고개를 내저어 금방 생각을 털어 냈다.
“히유.”
작게 한숨을 내쉬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뒷세계는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어둠이 내려앉을수록 불야성을 이루는 거리는 비가 오는데도 시끌벅적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몇몇은 입을 쩍 벌리고 빗물을 받아먹기도 했다.
물론 진흙탕에 엎어진 이들도 있었다.
차림새가 기기괴괴한 사람들이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는 이를 자연스럽게 짓밟고 지나갔다.
체샤는 그들 사이를 종종거리며 지나쳤다.
“모자 가게부터 가요!”
하타가 시키는 대로 모자 가게를 향해 가던 때였다.
갑자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렸다.
또 누구 하나 죽는 모양이다, 하면서 무심히 스쳐 지나가려 했으나.
“으아아악! 살려 줘!!”
살고 싶다는 일념으로 가득한 남자가 건물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둔중한 추락음과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분명 어디 한 군데쯤은 부러졌을 텐데, 아파하기는커녕 엉금엉금 기어서 도망쳤다.
그런데 그 방향이 하필이면 체샤가 있는 쪽이었다.
절대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뒷세계에서 쓸데없이 남한테 동정을 베풀다가 목숨 날아가는 꼴을 아주 지겹도록 보았다.
이곳에서 동정은 강자의 특권이었다.
‘난 지금 연약하다고!’
힘을 거의 잃어버린 체샤는 막 태어난 새싹처럼 여린 요정이었다.
기껏해야 모습 감추기, 커다란 꽃으로 우산 만들기 등등이나 할 줄 아는 상태였다.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을 구해 줄 처지가 아니었다.
재빠르게 벗어나려던 찰나.
철퍽, 철퍽, 진창길을 밟는 발걸음 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검은색 가죽 옷을 입은 남자였다.
체형이 늘씬한 그는 얼굴 절반을 가린 복면과 푹 눌러쓴 두건 때문에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 않았다.
양손에 든 장검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비와 섞여 흐려지며 길바닥에 퍼져 나갔다.
그 섬뜩한 외양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말로만 듣던 ‘처형자’였다.
뒷세계의 마스터는 수하를 여럿 부리는데, 그중에서 가장 악명 높은 이가 바로 처형자였다.
그는 오직 마스터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상대가 아무리 애원하고 빌어도, 거금을 주겠다고 회유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마스터가 내린 형벌을 집행할 뿐이었다.
예전에는 체샤도 은근히 처형자를 무서워했다.
워낙 뒷세계에서 사고를 많이 쳤으니, 변덕스러운 마스터가 어느 날 갑자기 처형자를 보내진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물론 싸워서 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되면 뒷세계에서 쫓겨날까 봐 살짝, 아주 살짝 겁냈다.
그리고 키에른이 마스터라는 사실을 아는 지금.
타인을 쉽게 믿지 않는 그가 대체 누굴 처형자로 쓰는지 궁금했다.
무심결에 처형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
도망치는 남자를 따라 걸어가던 처형자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처형자의 시선은 정확하게 체샤를 향했다.
마치 보이지 않을 체샤를 쳐다보는 듯이.
“허억, 흐어억!”
처형자와 체샤가 기묘한 대치를 이어 가는 사이.
남자는 허겁지겁 기어서 달아나 버렸다.
그가 거북이처럼 느리게 도망가는 걸 뻔히 알면서도, 처형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석상처럼 가만히 서서 체샤가 있는 쪽을 바라보기만 했다.
분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 말이다.
체샤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뒷골목의 어둠에 몸이 가려질 때까지 물러났는데, 처형자는 그만큼 체샤를 쫓아왔다.
이미 뒷세계 사람들은 다 도망간지라, 주변에 인기척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톡, 체샤의 발뒤꿈치가 벽에 부딪혔다.
처형자는 어느덧 체샤 바로 근처까지 다가왔다.
쏴아아.
쏟아지는 비가 더욱 거세졌다.
낮은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하, 비 냄새 때문에 모르겠어.”
가만히 멈춰 서 있던 처형자가 천천히 두건을 벗고, 하관을 가린 복면을 끌어 내렸다.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희게 질린 얼굴에 달라붙었다.
붉은색이 섞인 곱슬곱슬한 금발, 끝이 뾰족한 눈매, 그리고 붉은 눈동자.
‘어?’
체샤는 눈을 크게 뜨며 입술을 벌렸다.
‘어어?’
다소 멍청해 보이리라는 걸 알면서도, 벌어진 입술을 다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있는 남자는 카르하…….
그러니까, 분명 바실리안가의 둘째, 카르하 바실리안인데……?
‘왜 이렇게 커?!’
카르하가 어른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