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160)
아기 요정은 악당-160화(160/200)
벨제온의 발언에 카르하가 침묵했다.
어둑하던 붉은 눈이 조금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서서히 꺼져 가는 등불처럼 어두워진 눈을 바라보며, 벨제온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해서는 안 될 짓도 저질렀잖아. 지금 막내가 돌아온다면, 아마 그것 때문이겠지.”
그는 비오는 날의 숲처럼 눅눅하고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요정을 죄다 붙잡아 놨으니까.”
처음에는 기다렸다.
사랑하는 막내가 약속을 지키리라 믿었다.
바실리안은 정확히 한 달을 버텼다.
한 달을 넘어선 순간부터, 그들의 인내심은 박살 났다.
비단 바실리안뿐만이 아니었다.
신성 제국의 이단 심문관 또한 마찬가지였다.
바실리안과 하일론은 미친 짓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기어코 요정 왕국을 찾아내, 요정을 죄다 잡아들인 것이다.
인간은 요정 왕국에 출입할 수 없다.
하여 하일론이 성유물을 이용하여 요정들을 억지로 끌어냈다.
키에른은 체샤의 행방을 알려 주지 않는 요정들에게 정신 조종을 걸어 강제로 입을 열게끔 했다.
그리하여 체샤가 ‘요정수’라는 곳에 홀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곳에 들어간 이상,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그래도 약속했으니까.
돌아오겠다고 굳게 맹세했으니, 그 작은 약속 하나에만 애타게 매달렸다.
하지만 일 년이란 세월을 보내면서 바실리안은 망가졌다.
키에른도, 삼 형제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제 저 또한 키에른과 다를 바가 없어졌음을, 벨제온은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체샤가 스카야 왕실의 보호 아래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곧장 나쁜 생각만 들었으니까.
짙은 의심이 묻어나는 냉소를 지으며, 벨제온이 낮게 뇌까렸다.
“어머니도 우릴 버렸는데, 체샤도 똑같지 않겠어?”
과거의 일이 겹쳐졌다.
어머니는 많이 아팠다.
침상에서 아예 일어나지 못할 정도였다.
그녀가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떠나겠다는 뜻을 밝혔을 때.
키에른과 어머니는 매일같이 다퉜다.
키에른은 그녀가 제 눈앞에서 죽기를 바랐다.
하여 시체라도 부둥켜안을 수 있기를 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기어코 바실리안을 떠났고, 자신의 죽음을 보여 주지 않았다.
키에른은 제 아내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순간에야 그녀가 요정임을 알게 되었다.
바실리안가의 남자들은 모두 괴로워했다.
그녀가 왜 자신의 정체를 끝까지 비밀로 감추었는지.
그리고 어째서 마지막 시간을 바실리안과 함께하지 않았는지.
이유를 추측하고, 또 추측하며 차츰 부서졌다.
어쩌면 우리가 싫어서 떠났을지도 모르겠다고 결론 내렸을 즈음.
“…장례식을 준비해야겠어.”
키에른이 어머니의 죽음을 알려 왔다.
어머니는 바실리안을 떠나고도 몇 개월이나 더 버텼던 것이다.
“또 버려지고 싶지 않아요.”
카르하의 목소리에 벨제온은 짧은 회상에서 깨어났다.
성인의 신체를 가진 동생의 눈빛은 서늘했다.
“그러니 똑같이 후회하고, 괴로워할 거라면, 그냥.”
말을 끝맺진 않았으나, 더 듣지 않아도 그가 어떤 마음인지 훤히 알았다.
카르하는 잠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스카야부터 확인해 보고 올게요. 만약 거기에 아기 있으면…….”
그는 처형자와 같은 눈으로 말했다.
“어떻게든 데려올 테니까.”
***
대화가 끝나자마자 카르하는 사라졌다.
오늘 짐을 풀었던 여관으로 찾아간 듯했다.
벨제온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가, 자한을 돌아보았다.
“백작님께도 소식을 전해 줘. 지금 이브로이엘 공작저에 머무르고 계실 테니. 이슈엘에게는… 내가 직접 전하도록 하지.”
자한이 깍듯하게 인사를 올리곤 방을 빠져나갔다.
체샤는 자한의 뒤에 붙어서 함께 방을 탈출했다.
멍하니 자한을 뒤따라 걸으며, 체샤는 좌절했다.
‘미치겠네.’
요정 왕국을 텅텅 비운 게 바실리안의 짓이었다니.
체샤가 없는 사이에 사고 쳤으리라 익히 예상은 했지만, 요정들을 싹 다 잡아갔다는 사실에 기절할 지경이었다.
아마 하일론도 힘을 보탰으리라.
요정 왕국을 찾아낸 이가 그였으니 말이다.
‘왜 이렇게 못 믿어!’
가족 간의 오해가 아주 극심한데, 절대 간단히 풀어질 수준이 아니었다.
타인을 쉬이 믿지 않는, 의심 많은 키에른의 핏줄들이었다.
벨제온과 카르하의 대화로 짐작해 보건대, 여기서 체샤가 그냥 짠 하고 나타나면 붙잡힌 요정 때문에 마지못해 왔다고 생각할 게 뻔했다.
아니면 아란이 속한 스카야 왕실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거나.
아무리 아니라고 변명해도, 이미 단단히 비뚤어진 저 남자들은 제멋대로 오해를 쌓아 가리라.
어쩌면 영원히 요정들을 풀어 주지 않으려고 할 수도 있었다.
요정이 있는 한, 체샤가 떠나지 못할 테니 말이다.
‘지금 하는 꼴로 봐선 그보다 더한 짓도 할 거 같고.’
어떻게 하면 산처럼 쌓인 오해를 풀면서 요정들도 놓아주고, 가족끼리 감동적인 재회를 나눌지 고민하던 체샤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
현재 상황에서 도움을 청하기에 가장 적절한 상대가 눈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체샤는 이마에 붙인 꽃을 떼어 냈다.
기척을 감추는 힘을 거두자마자, 자한은 기민하게 반응했다.
곧장 공격할 태세를 갖추며 뒤돌아선 그는 허리춤의 채찍을 휘두르려던 자세 그대로 멈췄다.
자한은 얼빠진 표정을 한 채,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감정 없는 인형 같던 이라고는 상상도 못 할 만큼 멍한 얼굴로 체샤를 뚫어져라 보았다.
이내 자신이 독에 당해 환각이라도 보고 있나 심히 의심하는 듯한 어조로 머뭇머뭇 물었다.
“…체샤 님?”
“안녕하세요.”
어린이 모습인데도 곧바로 알아봐 줘서 다행이었다.
체샤는 예의 바르게 아빠의 부하에게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받은 자한은 살짝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아니, 어째서…….”
너무 충격받아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그에게 체샤는 파닥파닥 손짓했다.
“저 도와주세요. 우리 조용한 데서 이야기 좀 해요.”
자한이 체샤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의 손에서 일단 도망 못 가게 해야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느껴졌다.
체샤는 전혀 도망칠 생각이 없었지만, 그냥 얌전히 붙들려 주었다.
자한의 방으로 보이는 공간에 들어선 후에야, 그가 말문을 열었다.
“어떻게…. 왜 이곳에 계신 겁니까? 어째서 이만큼 자라나신 겁니까. 마스터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쏟아지는 질문에 체샤는 손바닥을 착 펼쳤다.
“내가 먼저 물어볼게요. 카르하 오라버니도, 벨제온 오라버니도, 왜 다들 어른인 거예요?”
“…그건.”
자한이 뚜렷하게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체샤에게 여태 말하지 않은 걸 보면, 아마도 바실리안들이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일 터였다.
그러나 자한은 대답해 줄 수밖에 없었다.
“대답 안 해 주면 나 또 사라질 거예요.”
“수인의 물약을 마셨습니다.”
냉큼 떨어진 대답에 체샤는 미간을 찌푸렸다.
‘수인 물약을 어디서 구한 거지?’
환상종인 수인은 희귀한 존재였다.
물론 요정보다는 많지만, 그래도 결코 흔하게 접할 존재는 아니었다.
평범한 인간들 사이에 섞이기 어려운지라, 대부분의 수인은 뒷세계에 숨어 살았다.
하여 뒷세계에 속한 수인들이 누구누구인지는 훤한데, 하타 말고 물약을 만들 수 있는 수인이 또 있다니.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체샤의 품에 여태껏 얌전히 안겨 있던 하타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하타와 눈빛을 주고받은 후, 자한에게 물약을 만든 수인은 누구인지도 물어보았다.
그러나 자한도 거기까진 알지 못했다.
당장 해결되지 않는 비밀은 일단 뒤로 미뤄 놓고, 체샤는 본론을 꺼냈다.
“집에 돌아가고 싶은데요.”
자한이 숨 쉬는 법도 잊고서 체샤를 쳐다보았다.
체샤는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우물우물 말했다.
“근데, 상황이 조금, 이상해져서요…. 다들 내가 일부러 안 돌아온 줄 아는 것 같아서. 오해를 풀어야 할 것 같아요.”
체샤의 고민을 들은 자한이 번뜩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지금 나타나시면.”
그가 한참 망설인 끝에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감금되실 것 같습니다…….”
체샤와 같은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