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161)
아기 요정은 악당-161화(161/200)
처음 뒷세계에서 처형자로서 검을 잡았을 때 어떤 생각을 했던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카르하에게 딱히 인상적인 순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검은 숲에서 마물을 상대할 때와 별 차이가 없었다.
뒷세계에는 마물보다 못한 쓰레기들이 허다했으니.
카르하는 청소부가 된 기분으로 열심히 일했다.
인간을 상대로 실전을 치러 볼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
그러나 엄마가 죽고, 체샤마저 사라지고 나서는.
자신이 처형자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괴롭고 힘들어서 죽고 싶을 땐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검이라도 휘두르면 그나마 덜 괴로웠다.
주어지는 임무를 기계적으로 해치우면서, 아주 조금이라도 고통을 잊었다.
그리고 지금은.
“…….”
처형자로 일하느라 어른으로 변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린아이의 꼴을 하고서는 제대로 된 협박을 할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카르하는 스카야 왕족 일행이 머무르고 있다는 여관을 응시했다.
뒷세계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그나마 번듯한 여관이었다.
하지만 체샤가 지내기엔 한없이 부족했다.
카르하는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저곳에 정말 체샤가 있을까?
저런 허름한 곳에서 스카야 왕족들과 뒤엉켜 지낼 만큼, 바실리안에 돌아오기 싫은 걸까?
작은 아기는 분명 우릴 가장 좋아했는데.
어째서 바실리안을 이토록 싫어하게 된 걸까.
정상적인 사고방식이 아니었다.
미친 키에른이랑 똑같은 꼴임을 알면서도, 카르하는 자꾸 나쁜 생각이 들었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여 젖은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을 떨어트릴 때였다.
어둠 속에서 슬며시 나타난 이들이 카르하를 둘러쌌다.
카르하는 가만히 서서 정면을 응시했다.
불 꺼진 여관 앞에 한 남자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는 카르하에게 짐짓 반갑다는 듯 아는 체를 해 보였다.
“처형자.”
이타르 스카야는 한때 뒷세계를 부지런히 들락날락하던 이였다.
요녀 리체시아를 쫓아다닌답시고 제집처럼 드나든지라, 뒷세계의 생리를 잘 알았다.
하여 카르하를 보자마자 정체를 알아챈 것이다.
“뒷세계의 처형자가 왜 이곳을 찾아왔을까.”
이타르는 여유로운 척하며 카르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의 태도에서 카르하는 확신을 얻었다.
스카야 왕실이 체샤를 데리고 있다는 확신을.
그렇지 않고서야 새벽에 깨어나 있을 만큼 경계할 이유가 없었다.
본래 같았으면 호위로 붙은 용병들이나 밤새워 가며 여관을 지키고, 왕태자는 여관방에서 그저 편히 자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체샤 바실리안.”
카르하가 짧게 이름을 내뱉으니, 이타르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그대들이 데리고 있나?”
확신을 품은 질문에 이타르는 초조함을 감추며 웃어 보였다.
“아니라고 해 봤자 소용이 없겠구나. 뒷세계의 마스터는 모든 것을 보고 듣는다 하더니, 과연 정말이로군.”
바실리안이 몇 대째 뒷세계를 다스리며 쌓아 온 정보망이었다.
팔렌의 태양 황제마저 거미줄처럼 뻗은 정보망에 묶여 있으니, 스카야 왕국의 동태쯤이야 훤히 꿰고 있었다.
오히려 이번에는 어째서인지 조금 늦게 인지한 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스카야 왕궁에 체샤가 나타나자마자 바로 알아챘을 테니 말이다.
체샤를 데리고 있음을 선선하게 인정한 이타르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남부 해안 지방, 특히 스카야 왕국에서 주로 사용하는 곡도였다.
“처형자가 왜 어린아이를 찾는 것이냐? 납득할 만한 사유가 없다면 받아들이지 못하겠구나.”
“바실리안 백작이 마스터에게 의뢰를 했다.”
“하! 그자가 의뢰를 한다고 해서 받아 주는 자였나? 참으로 놀라운 소리야.”
실상 만나는 일조차 불가능한 존재이니, 이타르로서는 저리 비아냥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리 비꼬면서도, 이타르는 제 욕심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냈다.
“도대체 바실리안 백작이 무얼 어찌했기에 마스터를 꼬여 낸 건가.”
“…….”
“바실리안 백작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는 모르겠으나, 나 또한 똑같은, 아니, 그 이상의 대가를 줄 수 있으니.”
이타르는 침묵하는 카르하에게 제안했다.
“마스터를 만나게 해 다오. 바실리안 백작의 의뢰 대신, 내 의뢰를 받아 주면 서로에게 큰 이득이 될 것이다.”
더 이상 말을 섞을 이유가 없었다.
순순히 내놓을 생각이 없는 듯하니, 무력으로 해결해야 할 상황이었다.
카르하는 두 자루의 검을 뽑았다.
교차하며 뽑히는 검날이 달빛에 스산하게 번뜩였다.
천하의 명검이라 불리는 검을 보며, 이타르가 눈매를 가느스름히 좁혔다.
이내 시선이 부닥친 순간.
두 남자는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캉!
칼날이 맞부딪쳤다.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눈으로 따라잡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공격과 방어가 이어졌다.
마치 맹수 두 마리가 뒤엉킨 듯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이타르가 아무리 검술 실력이 뛰어나다 하여도.
카르하는 바실리안이었다.
그 누구보다 눈부신 재능을 타고났으며, 날 때부터 검을 쥐고 훈련해 왔고, 지금은 성인의 몸이라 신체적인 불리함마저 없으니.
이타르는 카르하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언뜻 팽팽해 보이던 싸움은 금세 카르하 쪽으로 승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이도류로 몰아치는 공격에 이타르가 주춤한 찰나, 카르하는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한쪽 검으로 그를 막으며, 다른 쪽 검으로 빈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간발의 차로 피했으나, 이타르는 옷이 길게 찢겼다.
가위로 자른 듯 깔끔하게 찢어진 천 자락이 펄럭이며 맨살이 드러났다.
밤공기가 서늘하게 살갗에 닿았다.
이타르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실력이 제법이군.”
끝까지 여유를 부리는 모습에 카르하는 입매를 비틀었다.
대답 없이 재차 검을 휘둘렀다.
빠르게 몰아치는 속공에 이타르가 완전히 뒤로 밀려났다.
자신의 패배를 예감한 이타르는 짧고 높은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싸움을 지켜보던 용병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다수가 한꺼번에 덤벼드니, 자연스럽게 카르하는 이타르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타르가 커다란 목소리로 명령했다.
“나머지는 나를 따르도록! 곧바로 이동한다.”
카르하의 발을 붙잡아 놓은 사이 체샤를 들고 도망가겠다는 전략이었다.
카르하는 용병이 쏘는 화살을 피하며, 곧장 허리춤에서 단검 하나를 뽑아 던졌다.
그러나 카르하의 단검은 허공에서 멈췄다.
이타르가 고용한 용병 중에 마법사가 있었던 것이다.
살짝 당황한 카르하를 보며 이타르가 껄껄 웃었다.
“내 저번에 팔렌에서 한바탕 당하고 나서 좋은 교훈을 얻었거든.”
단검을 막아 낸 마법사가 카르하를 향해 공격 마법을 쓰려던 찰나.
“누구 마음대로?”
우아한 목소리와 함께 마력이 번뜩였다.
카르하와 똑같은 검은 가죽옷을 입은 이가 허공에서 나타났다.
날씬한 체구의 남자는 곧게 팔을 뻗었다.
마력이 수십 갈래로 쪼개져 화살처럼 쏘아졌다.
카르하를 공격하려던 마법사는 화살 비를 막다가 기어코 부상을 입었다.
남자는 핏물을 토하며 쓰러지는 마법사를 무심히 지나쳐 카르하 옆에 나란히 섰다.
카르하는 인상을 찌푸렸다.
“왜 왔냐. 쓸데없이.”
굳이 이슈엘이 도와주지 않아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이슈엘이 곧장 쏘아붙였다.
“내가 너 도우러 온 줄 알아? 동생 여기 있다며.”
새빨간 눈이 때아닌 난리 통에 불을 환히 켠 여관을 노려보았다.
“…여관 안에 있다 이거지.”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슈엘에게서 뻗어 나간 금빛 섬광이 여관 지붕을 날려 버린 것은.
여관 꼭대기 층에서 머무르던 이들은 갑작스럽게 밤하늘을 마주하게 되었다.
“끄아아악!”
이슈엘은 마법을 사용해 몸을 허공으로 띄우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사람들을 낱낱이 살폈다.
스카야의 어린 공주가 보였다.
그녀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체샤! 체샤 바실리안!”
정신없이 체샤를 찾는 아이를 보며, 이슈엘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체샤는 여관 안에 없었다.
“…뭐야.”
이러면 진짜, 우리 피해서 도망치는 거 같잖아.
낮은 속삭임을 삼키니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너무 세게 깨문 탓이었다.
이슈엘이 피 맛 나는 입술을 핥던 때였다.
“잠깐만요!”
웬 자그마한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반쪽짜리 수인의 상징인 귀와 꼬리를 팔락이며 달려오는 남자는 아는 얼굴이었다.
“저, 저, 하타인데요. 모자 가게…….”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하타가 난장판인 광경을 보고 힉 숨을 들이켰다.
살기등등한 시선을 한 몸에 받아 움츠러들면서도 끝까지 용건을 말했다.
“저기, 리체시아 님이, 이야기 좀 하자고 해서요.”
하타가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가장 중요한 말을 덧붙였다.
“체샤 님도 같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