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172)
아기 요정은 악당-172화(172/200)
요정이 만들어 낸 꽃은 특별하다.
자연적으로 피어나는 꽃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탐스러운 모양도 각별하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꽃향기였다.
사람을 홀리는 꽃향기는 향수 따위하곤 절대 착각할 수 없었다.
체샤가 피워 낸 꽃을 수없이 보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체샤를 잃어버린 마지막 순간에…….
그때 지긋지긋하게 맡았던 냄새이니.
딸이 피워 낸 꽃이라면 눈 감고도 알아볼 수 있었다.
얼음을 삼킨 듯 서늘한 한기가 몸속에 감돌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세레아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키에른!”
뒷걸음질 치던 그녀가 뒤늦게 이름을 불러 왔으나 무시했다.
키에른은 곧장 걸음을 옮겼다.
연회장에 춤곡이 깔렸다.
악사의 경쾌한 연주에 맞춰, 사람들이 쌍쌍이 짝을 지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만개하는 꽃처럼 피어오르는 드레스 자락에 일순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한 육체가 한계를 알리는 것이었다.
“…….”
망설임 없이 입 안의 살을 으득 깨물었다.
살점이 짓이겨지는 통증에 그나마 정신이 들었다.
고이는 핏물을 삼키며 연회장을 가로질렀다.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거칠게 밀쳐 냈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갑작스레 밀쳐진 이들이 짜증스레 돌아보았다.
그러나 곧 무례하다 못해 미친 짓을 저지른 이가 바실리안 백작임을 확인하곤 흠칫 놀랐다.
아마 내일이면 제도 전역에 바실리안 백작이 광인이라고 소문나리라.
조금 이르면 오늘이 채 지나기 전에 모두의 입방아에 오를지 몰랐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애초부터 그런 데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바실리안 백작!”
누군가 호통치듯 불렀으나 듣지 못했다.
“백작, 이 대체 무슨 일인가!”
또 다른 누군가가 팔뚝을 붙잡았으나 곧장 뿌리쳤다.
그저 꽃향기를 따라갈 뿐이었다.
언뜻 제 아들들이 이걸 모를 리가 없는데,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깊게 파고들진 못했다.
교활한 머리는 꽃향기에 돌처럼 굳어 버려서, 다른 무엇도 생각할 수 없었다.
키에른은 연회장의 발코니로 들어섰다.
문을 활짝 열어젖혔으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곧장 난간으로 다가가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막 춤곡이 시작된지라, 정원을 거니는 이들은 몇 없었다.
샅샅이 정원을 훑던 키에른은 망설임 없이 난간 아래로 뛰어내렸다.
산책하던 사람들이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키에른은 죄다 깔끔히 무시하고 빠르게 걸어갔다.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환한 달빛은 평소보다 사위를 밝게 비추었다.
정원으로 나오니 여러 풀 내음이 뒤섞여 꽃향기가 조금 희미해졌다.
그러나 키에른은 이유 모를 확신에 차서 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다다른 곳에는 화려한 장미가 만발해 있었다.
장미 덩굴이 기둥을 타고 오르는 이곳은 키에른에게도 낯설지 않은 장소였다.
과거 로즈와 함께 황궁에 입궁했을 때.
사람 많은 연회장에 지쳐 잠시 정원으로 산책을 나왔었다.
그때 황궁 정원을 구경하며 즐거워하던 로즈가 직접 장미를 꺾었다.
제게 장미 꽃송이를 꽂아 주며 예쁘다고 웃던 얼굴이 여전히 생생했다.
귀에 꽃을 꽂아 장식하는 건 젖먹이 시절에도 해 본 적 없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로즈가 즐거워하니, 키에른도 마냥 행복했었다.
아픈 추억이 깃든 장소는 여전히 그날 밤처럼 아름다웠다.
바람이 한차례 거칠게 불어왔다.
연회장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음악이 귓가를 스쳤다.
피를 머금은 듯 새빨간 장미꽃은 밤바람을 따라 흔들렸다.
흩날리는 꽃잎 사이로 키에른은 자신이 애타게 찾던 이를 발견했다.
로즈와 함께했던 장소에서, 로즈와 똑같은 얼굴을 한 아이가 장미꽃 앞에 서 있었다.
키에른이 기억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인형처럼 조그만 아기가 아닌, 제법 어엿한 아이로 자라났으니.
겉모습이 완전히 달라졌음에도 곧바로 확신했다.
키에른의 아이였다.
그 순간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키에른은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아, 하아…….”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며 뻐근한 고통이 일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짧게 숨을 내뱉었다.
위험할 정도로 빠르고 거칠어지는 호흡을 억누르려 애쓰며 머릿속을 이성적인 사고로 채웠다.
기대해선 안 된다.
어쩌면 이 또한 환상일지도 모른다.
불완전한 정신은 항상 그럴듯한 환영을 만들어 내곤 했다.
지금 눈앞의 광경 또한 전부 환상이라서, 당장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깨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키에른.”
그래도 한 번쯤은…….
“키에른, 사랑해.”
단 한 번쯤은 거짓이 아니어도 되잖아.
이미 오래전에 저버렸던 신을 간절히 찾았다.
신은 제 손을 붙잡아 준 적이 없음을 알면서도 빌었다.
그것은 불가항력이었으며, 본능적인 애원이었다.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떼어 달싹였다.
“…체샤.”
이름을 뱉자마자 곧장 후회했다.
제 목소리가 너무 괴상하게 들린 탓이었다.
꽉 잠겨서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였다.
조금만 더 가다듬을 것을.
혹시나 아빠 목소리를 못 알아들으면 어쩌지.
나도 지난 일 년간 많이 변해 버렸을지도 모르는데.
키에른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항상 그러했듯이 웃으려 노력했다.
냉소가 아닌, 보드랍고 상냥한 웃음을 그리며 재차 이름을 불렀다.
“체샤…….”
분홍색 눈동자가 오롯이 키에른을 담아냈다.
맑은 눈에 비치는 제 모습이 지독히도 추하게 느껴졌다.
오늘도 정신 놓고 길바닥을 쏘다니다 손에 피나 묻히던 저와 다르게, 아이는 한없이 깨끗하고 맑았으니까.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요정이었으니까.
그러나 키에른은 아이에게 다가갔다.
음습하고 음울한 마음은 꽉 내리눌러 놓고, 그저 다정한 아빠처럼 말을 걸었다.
“체샤, 내 딸, 왜 아무 말이 없어요.”
하지만 아무리 태연한 척하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결국엔 어두운 마음이 비죽 튀어나와 버렸다.
“아빠한테 대답해 줘…….”
키에른은 아이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마음 같아선 끌어안고 싶었지만 감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만지는 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키에른은 그저 조용히 인내했다.
아이의 분홍색 눈동자는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로 일렁였다.
물결치는 눈빛을 하고서 마침내 아이가 입술을 열었다.
“…아빠.”
키에른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다행히 눈앞의 아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너무… 늦어서 죄송해요. 일찍 오려고 했는데.”
살며시 손을 뻗어 아이의 뺨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에 닿는 살갗의 온기에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키에른은 말없이 아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다소 거칠게 힘을 주어 안았음에도 아이는 아프단 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그저 저를 마주 안아 줄 뿐이었다.
현실임을 알려 주는 증거를 꽉 끌어안은 채, 키에른은 숨을 헐떡이며 말을 쏟아 냈다.
“기다렸어요. 아빠가 정말 많이… 계속 기다렸는데. 영영 오지 않을까 봐…….”
사실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몰랐다.
이게 꿈이라면 깨어나는 순간 정말 죽어 버릴 것 같았다
그냥 횡설수설 되는대로 내뱉다가 불쑥 엉뚱한 소리를 했다.
“아빠한테 계속 말해. 목소리 들려줘요, 응?”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참을 수가 없었다.
아이가 조그맣게 인사했다.
“다녀왔어요.”
갑자기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시야가 순간 까맣게 물들었다가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이번만큼은 꿈도, 환상도 아니었다.
그래도 한 번은 현실이구나.
“…응.”
키에른은 속삭이듯 대답했다.
“어서 와, 내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