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179)
아기 요정은 악당-179화(179/200)
이브로이엘 공작저의 손님방 중에서도 가장 크고 좋은 곳.
그곳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손님인 체샤가 머무르는 방이었다.
오늘 체샤가 연회장으로 가 버린 바람에 텅 빈 방 안은 고요했다.
그저 달빛만이 조용히 스며드는 방 안, 침대 위.
보송보송한 침구가 깔린 그곳에는 토끼 인형이 베개에 반듯하게 기대어 앉아 있었다.
단추 눈이 달린 토끼 인형은 인형답게 얌전했다.
인형이 움직이는 법은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으나.
“…….”
어느 순간 축 늘어진 귀 끝이 움찔거렸다.
단추 눈 위로 존재할 리 없는 생기가 반짝였다.
빛이 감돌며 토끼 인형 주변으로 작은 꽃이 퐁퐁 피어났다.
긴 잠에서 깨어나듯, 토끼 인형은 팔다리를 쭉쭉 늘이며 기지개를 켰다.
폴짝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리에서 깡충깡충 뛰어 보기도 했다.
인형 몸이 문제없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토끼 인형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이곳에 두고 떠난 체샤가 있는 방향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
토끼 인형은 요정을 다스리는 여왕의 왕관이기에, 요정들의 상태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키에른 바실리안과 하일론이 요정을 죄다 잡아가 성유물로 구속해 버린 후부터, 토끼 인형은 힘을 대부분 잃어 버렸다.
여왕과 대화를 나눌 수도 없고, 그저 인형 모양으로 형체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마치 성유물로 봉인되어 있었던 과거처럼…….
신성 제국을 찾아온 새로운 여왕의 기척을 느꼈을 때.
그 순간 왕관은 환희로 가득 차올랐으나,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노래뿐이었다.
그래도 노래를 듣고 여왕이 저를 찾아와 주어서 기뻤다.
인형은 뭉툭한 솜 발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림뿐이었도다.”
선대 여왕이 비참하게 실험실에서 조각조각 찢겨 나갈 때도, 봉인된 채로 잠들어 있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새로운 여왕의 곁에서 작은 조언이라도 건넬 수 있다.
인간들 사이에서 자라난 그녀는 요정이 아닌 인간의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다.
하여 처음에는 완전히 어긋나 버릴까 걱정했으나.
그럼에도 그녀는 착실하게 여왕의 길로 향해 갔다.
스스로 거부하던 육체의 성장을 마침내 받아들이기까지 했으니.
체샤 바실리안은, 리체시아는 성장했다.
이 모든 것은 그녀가 ‘원했기’ 때문이다.
요정은 정신으로 이루어진 존재이니, 육체 또한 정신에 의해 결정된다.
처음 체샤 바실리안이 되었을 때.
그녀는 본능적으로 핏줄에 이끌렸고, 바실리안에 남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소망으로 인해 아기의 몸을 유지했다.
그러다 여러 일을 겪고, 요정수의 도움을 받아 과거의 조각을 보면서 육체를 성장시켰다.
본래 그때 성인이 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성장에 대한 두려움이 무의식에 깔려 있어, 온전히 자라나지 못하고 어린이가 된 것이다.
아이로서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은 여왕의 발목을 붙잡았다.
왕관이 어린아이나 가지고 놀 법한 인형의 모습을 취한 것도.
그녀의 환역이 망가진 장난감 따위로 가득한 것도.
전부 불완전한 정신세계와 연관된 것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여왕의 육체가 성장했다.
완벽한 성인의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만큼 그녀의 정신이 성숙하였으며, 진정한 여왕에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이만하면 인형이 조금이나마 힘을 되찾을 만큼은 되었다.
물론 요정들이 풀려나면 모든 힘을 되찾겠지만, 지금 당장은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때가 되었구나.”
과거, 선대 여왕 또한 선택했다.
마구잡이로 학살당하는 요정들을 대신하여, 자신의 육체를 내어 주는 것으로 인간의 탐욕을 끝내려 했다.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거대하고 끝없는지 알지 못한, 요정의 관점에서 내린 선택이었다.
순진한 선택의 결과는 대실패였다.
잘못된 선택의 대가는 참으로 비참하였고,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뒤엉킨 시간 속에서, 그녀의 흔적을 간직한 이들을 괴롭게 하며.
과연 새로운 여왕은 어떤 선택을 내릴까.
인형은 알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행복할지언정, 과정은 분명 불행하리라.
키에른 바실리안은 죽은 여왕을 되살리고 싶어 하지만, 한 세대에 두 명의 여왕이 공존할 수는 없었다.
하나를 얻기 위해선, 똑같은 하나를 대가로 바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여왕으로서 그녀가 무엇을 택하든…….
최소한 이번엔.
“곁에 있을 것이니.”
홀로 외롭게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
“미안해.”
마지막 인사가 미안하다는 사과 따위가 되지 않도록 하리라.
토끼 인형은 솜뭉치로 만들어진 발을 결연히 허공으로 치켜올렸다.
반짝거리는 빛과 조그만 꽃잎이 흩날렸다.
주인을 찾아 떠난 인형은 침대 위에서 사라졌다.
***
소란이 겨우 진정된 연회장 구석에 서서, 벨제온은 과일주스를 홀짝였다.
냉랭한 얼굴 탓에, 아무도 그가 마시는 음료수가 과일주스라고는 짐작지도 못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와인을 마시는 듯한 표정을 하고서 벨제온은 아까 연회장을 대각선으로 가르며 뛰어나가던 키에른을 생각했다.
‘너무 빨리 만나게 해 준 것 같은데.’
저를 고생시킨 것에 비하면 너무나 평온한 만남이지 않은가.
벨제온은 미간을 좁히며 연회장 안을 둘러보았다.
키에른이 뛰쳐나간 후, 이브로이엘 공작과 네메아 후작까지 사라졌다.
팔렌 제국의 주요 인사들이 빠진 연회장은 여전히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겉으로는 평화롭게 다시 연회가 이어지는 듯 보여도, 실제로는 물밑에서 다들 수군거리느라 바빴다.
키에른이 미친 짓을 해 준 덕분에, 바실리안가 삼 형제에게 붙었던 시선들이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는 장점이 생기긴 했다.
세레아의 도움을 받아 외국 귀족 신분으로 연회에 참석했다.
이목을 끌어서 좋을 게 없건만, 셋 다 너무 눈에 띄는 외모여서 어쩔 수 없이 일을 조금 어렵게 진행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런데 키에른이 벌인 기행 덕분에 다들 온통 정신이 그쪽으로 쏠려 버렸다.
‘백작이 쓸모 있을 때도 있다니…….’
지금쯤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을 카르하와 이슈엘, 그리고 하일론을 떠올리던 벨제온은 제게 다가온 이를 향해 습관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혹 탄신연이 끝난 후에도 팔렌에서 조금 더 머무르시나요?”
“글쎄요.”
숨 쉬듯이 들어오는 추파에 적당히 대꾸해 주며, 황제 쪽을 살피던 때였다.
“그러면 며칠 뒤에 커피하우스에서…….”
“…….”
“저기, 괜찮으신가요?”
“…아, 죄송합니다.”
벨제온은 떨어트릴 뻔한 유리잔을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리도록 잔을 거머쥔 그는 연회장 입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벨제온에게 말을 걸던 영애가 살짝 기분 상한 듯이 부채를 팔락이다가 입술을 벙긋 벌렸다.
“어머나.”
진심 가득한 감탄사를 내뱉은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연회장의 다른 귀족들도 연이어 작은 탄성을 터뜨렸다.
의식을 거치지 않고 절로 터져 나오는 감탄이었다.
조그맣게 시작된 파문은 점점 퍼져 나가서, 자연스럽게 모두 한 방향으로 시선을 모았다.
그곳엔 아까 미친놈처럼 사라졌던 바실리안 백작과 이브로이엘 공작이 있었다.
두 남녀는 정중하게 한 여자를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에 자리한, 꿈결처럼 아름다운 외모의 여자.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굽이치는 금색 머리카락과 영롱한 분홍색 눈동자를 확인한 벨제온은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체샤가 연회에 참석한 것이다.
훌쩍 자라난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