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180)
아기 요정은 악당-180화(180/200)
“…꿈인가.”
기절했다가 일어난 키에른이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아빠!”
그는 체샤가 저를 부르는 소리를 듣자마자, 일단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한 손으로는 가장 먼저 체샤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제 뺨을 꼬집었다.
얼얼한 통증으로 이 모든 것이 현실임을 완벽히 인지한 후에야,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난리군, 난리야.”
옆에서 세레아가 혀를 끌끌 찼다.
그녀의 핀잔에 키에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스승님을 보니까 정말 현실 같군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에 세레아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키에른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기절은 정말 오랜만인데…….”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던 그는 뒤늦게 체샤를 위아래로 살폈다.
체샤는 이미 연회용 드레스로 갈아입은 뒤였다.
사실 키에른이 눈뜨기 전에, 그리고 하일론이 찾아오기 전에 세레아와 함께 몰래 연회장으로 휘리릭 가 버릴 생각이었다.
공교롭게도 체샤가 드레스를 다 갈아입고, 마지막으로 쪽지를 남기기 위해 돌아온 순간.
키에른은 번쩍 눈을 떴다.
“…….”
무서울 정도로 눈치 빠른 이는 고작 체샤의 옷차림과 이브로이엘 공작의 표정, 그리고 미묘한 분위기만으로도 전후 상황을 죄다 파악했다.
체샤는 그에게 먼저 사실대로 말했다.
“연회에 가려고요.”
“오늘?”
키에른이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은 안 돼? 내일 연회장 데려가 줄게요.”
“오늘 밤에 교황이 연회에 오는 거죠?”
“…확실하진 않아. 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고.”
탄신연 참석 여부를 놓고 질질 끌던 교황은 팔렌 제국에 입국하고 나서도 한참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다.
하일론이 눈을 새파랗게 뜨고 저를 노리고 있으니 섣부르게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아마 예상대로라면 안전을 확인한 후, 마지막 날에나 얼굴을 내밀 터였다.
하지만 탄신연 첫째 날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참석할 가능성 또한 분명하게 있었다.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체샤를 데려가고 싶지 않아 했으나.
“저도 바실리안이에요.”
그렇기에 체샤가 함께 가려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키에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세레아가 은근히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보았다.
제가 대녀를 말릴 자신이 없으니, 키에른이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동안 곰곰이 생각하던 키에른은 의외로운 결론을 내렸다.
“같이 가자.”
절대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선뜻 허락하다니.
세레아도, 체샤도 놀라는 와중에 키에른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새치름하게 눈을 치뜨며 말했다.
“아빠가 안 된다고 해도, 체샤는 마음대로 할 거잖아요?”
놔뒀다가 하일론의 도움을 받게 하느니, 제가 직접 데려가는 편이 낫다는 결론이었다.
너무나 정확히 딸을 꿰뚫어 보는 답변에 체샤는 할 말을 잃었다.
어쨌든 허락을 얻는 데는 성공했다.
하여 하일론에게 간단한 쪽지만 남겨 놓고, 셋이서 연회장에 가기로 했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의복을 점검했다.
체샤는 자신이 입은 드레스를 잠시 어색하게 만지작거렸다.
황궁 내에서 갑작스럽게 드레스를 구하는 일이 쉬울 리가 없었다.
급하게 공수한 옷은 리본을 한껏 당겨 묶어서 치수만 간신히 맞췄다.
어울리는 장신구를 갖추기도 어려워, 요정의 꽃으로 얼추 장식을 대신했다.
작은 꽃으로 치장한 체샤의 머리를 보며 세레아가 크게 아쉬워했다.
“티아라가 있으면 좋을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몇 개 장만해 놓을 것을, 하며 그녀는 몹시 안타까워했다.
황궁의 개인 휴게실에는 만일을 대비해 간단한 장신구며 의복을 가져다 두었다.
하지만 드레스보다는 활동성이 좋은 바지 정장을 즐겨 입는 세레아는 장신구도 그에 맞춰서 착용했고, 당연히 티아라 같은 건 가져다 두지 않았다.
목걸이나 팔찌까진 얼추 갖췄는데, 머리 장식이 없다며 세레아가 연신 탄식하던 때였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꽃이 피었다.
꽃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토끼 인형이었다.
체샤와 똑같은 드레스를 차려입은 토끼 인형이 우렁차게 외쳤다.
“내가 왔도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침실에서 진짜 인형처럼 기운 없이 늘어져 있기만 했었다.
이제는 말도 종알종알하는 모습이 반가웠다.
활짝 웃으며 인형을 받아 안은 체샤는 뒤늦게 설명이 필요한 상황임을 깨달았다.
“…….”
세레아와 키에른이 어이없는 얼굴로 토끼 인형을 보고 있었다.
토끼 인형의 목소리는 인간에겐 들리지 않았다.
그들 눈에는 체샤가 대뜸 인형을 소환한 것처럼 보이리라.
잠시 망설이던 체샤는 키에른에게 토끼 인형을 내밀었다.
“요정 여왕의 왕관이에요.”
“…이게 왕관이었다고?”
솜 인형인 줄로만 알았던 세레아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체샤는 고개를 끄덕이며 키에른에게 재차 인형을 내밀었다.
“지금은 이런 모양이지만…. 아빠랑 했던 약속을 지킬 때는 다시 왕관 모양으로 되돌려 볼게요.”
당장은 키에른에게 왕관을 줄 수는 없으나, 잠시 보여 주는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염원했던 물건을 바라보는 키에른의 눈동자는 일견 무감했다.
토끼 인형이 키에른을 한마디로 평했다.
“건방진 바실리안 놈.”
토끼 인형의 목소리가 인간한테는 들리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빤히 인형을 응시하던 키에른이 커다란 손으로 덥석 토끼 귀를 움켜쥐었다.
마치 갓 붙잡은 사냥감처럼 움켜쥐니, 토끼 인형은 곧장 불만을 토했다.
“무례하도다! 예의를 갖추진 못할망정!”
본래 인간은 요정 여왕의 왕관을 만지질 못하는데, 지금은 인형 상태라서 가능한 모양이었다.
키에른은 귀를 잡고서 팔다리를 버둥거리는 인형을 관찰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언뜻 쓸쓸해 보이기도 하는 웃음이었다.
그는 토끼 인형을 체샤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인형을 덮어쓴 체샤는 눈만 동그랗게 뜬 채로 키에른을 바라보았다.
“아쉽네. 체샤가 왕관 쓴 모습이 보고 싶었는데.”
그 순간 토끼 인형이 반짝거렸다.
인형은 화려한 꽃 왕관으로 변했다.
왕관이 불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변하고 싶어서 변한 게 아니다.”
“이건 여왕의 의지이니.”
“모든 건 네 마음에 따라 변화하노라.”
하필이면 키에른이 보고 싶다고 말한 순간에 맞춰서 왕관이 되었단 게 굉장히 불만인 듯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황홀한 꽃향기가 사방을 가득 채웠다.
키에른과 세레아는 잠시 넋을 잃은 표정으로 왕관을 쓴 체샤를 바라보았다.
일순 죽은 이를 되살리기 위한 제물은 왕관이 아니라는 진실이 따끔하게 심장을 스쳤다.
“티아라도 생겼으니까…….”
그러나 체샤는 모르는 척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연회장 갈까요?”
***
이브로이엘 공작과 바실리안 백작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체샤는 연회장에 입장했다.
시끌벅적하던 장내가 조용해졌다.
전부 체샤에게 사로잡힌 탓이었다.
사방으로 퍼지는 꽃향기에 다들 눈빛이 살짝 흐려졌다.
제법 시간이 흐른 후에야, 누군가가 목소리를 냈다.
“…요정 여왕의 왕관?”
소성인 기도회에 참석했던 귀족이었다.
그는 단번에 왕관을 알아보았으나, 체샤를 알아보진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체샤는 조그만 아기였으니.
타국의 왕족과 귀족들까지 모인 연회장에는 소성인 기도회에 참석했던 이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 또한 뒤이어 한두 마디씩 말을 던졌다.
“아니, 저건 분명… 요정 여왕의 왕관인데, 어찌하여…….”
“그때 사라지지 않았는가? 체샤 바실리안과 함께 말이야.”
그들의 말을 들은 다른 이들도 서서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황제가 허둥지둥 다가와 당혹스러운 낯으로 물었다.
“바실리안 백작, 자네…. 어찌 된 일인가? 지금 이 영애는 또 누구이고.”
체샤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체샤가 나서기도 전에, 키에른이 먼저 싱긋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그리 높지 않지만, 연회장 전체에 들리기 충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