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182)
아기 요정은 악당-182화(182/200)
하일론이 성왕을 노리고 탄신연에 잠입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바실리안가도 하일론의 반역을 물밑에서 지지하고 있으니, 뭐가 터져도 제대로 터지리라 예상은 했다만.
이렇게 화끈한 등장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체샤는 반쯤 영혼이 빠진 상태로 하일론을 올려다보았다.
건물은 3층짜리였고, 연회장은 1층에 위치했다.
그걸 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 단죄의 사슬로 뚫어 버린 이는 차분하다 못해 싸늘한 눈빛이었다.
어떤 흥분의 기색조차 없이 침착했으며, 또한 무표정했다.
이런 대형 사태를 벌인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말이다.
검게 물들인 머리카락이 스르륵, 은색으로 다시금 되돌아왔다.
검은색도 잘 어울렸으나, 둥근 달을 등지고 휘날리는 은빛 머리카락은 옅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완벽하게 하일론과 어우러졌다.
‘역시 은발이 좋아.’
무심결 그렇게 생각한 찰나, 하일론과 시선이 마주쳤다.
성왕을 직시하던 그는 천천히 연회장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체샤를 발견하자마자, 얼음 같던 낯이 대번에 흔들렸다.
감정 변화가 거의 없는 하일론이었다.
성왕 죽이겠다고 연회장에 사슬 갖다 꽂는 순간조차 냉랭하게 침착을 유지하는 이에게 놀란 기색이 확 드러났다.
낯선 표정을 한 얼굴 위, 푸른 눈에 스치는 그리움.
그의 감정을 확인한 체샤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
가슴이 두근거렸다.
갑작스럽게 성장한 체샤를 본 이들은 전부 똑같은 이를 떠올렸다.
죽은 바실리안 백작 부인이었다.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요정인 그녀는 생전에 여러 인간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터였다.
그런 와중에 엄마와 닮은 자신이 나타났으니, 으레 따라올 뻔한 반응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저 남들이 보기에도 많이 닮긴 했구나, 같은 생각만 짧게 했을 뿐이었다.
상황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그런 소소한 부분에 신경 쓸 새가 없기도 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나타난 하일론을 보자마자, 소소했던 부분은 숨 막힐 정도로 거대해졌다.
막을 틈도 없이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동시에 우수수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하일론은 달랐다.
모두가 체샤에게서 엄마를 떠올릴 때, 오직 그만이 리체시아를 보았다.
그 사실을 인지하니, 심장이 견딜 수 없이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어떤 순간에도 그는 저를 생각하리라.
설혹 내일 당장 대륙이 멸망한다 해도, 리체시아를 뒤쫓으리라.
이미 믿고 있었던 사실이 절대적인 진리로 다시금 증명되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점차 커져 갔다.
그와 함께 지금 자신이 더 이상 어린아이의 몸이 아니란 점이 갑자기 의식되기 시작했다.
‘나 팔다리 제대로 달려 있나?’
너무 급하게 커서 짝짝이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뭔가, 손가락이 스무 개쯤 된다든가, 눈이 세 개라든가.
전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으나, 잠시 동안 체샤는 몹시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다가 지금 이 긴급한 때에 이따위 잡생각이나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빠르게 반성했다.
뺨이 화끈거리는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홀린 듯이 하일론과 서로 마주 보기만 했다.
고결한 신성 기사의 표본 같은 외모를 가진 이는 신성 기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눈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전해지는 애정과 그리움에 담뿍 빠져 있다가 일말의 아쉬움을 느꼈다.
하일론이 체샤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리체시아를 볼 때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하일론에게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을 순간이 머지않았다.
체샤는 머리 위에 얹어진 왕관의 무게를 느끼며, 마침내 시선을 떼어 냈다.
별 생각 없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키에른과 눈이 딱 마주쳤다.
깜빡이지도 않고 빤히 쳐다보는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반들거렸다.
방금 있었던 짧은 시선 교환을 보며 무언가를 직감한 듯했다.
숨길 생각도 못 하고, 감정 줄줄 흘러넘치는 눈으로 하일론을 보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무서울 정도로 눈치 빠른 이에게 어찌 둘러대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쩨샤.”
키에른이 어린아이에게나 어울릴 애칭을 부르며 살짝 미소했다.
그는 바로 옆의 세레아가 듣지 못할 만큼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비밀 만들지 마. 아빠 서운해요.”
그러기엔 이미 서운하다 못해 환장할 거짓말들을 아주 고구마처럼 줄줄이 저질러 놨다.
돌아가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지난 일 년간의 실종과 더불어 그 외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도 아직 제대로 된 설명을 해 주지 못했다.
‘우리가 혈연일지도 모른다는 것도, 죽은 엄마를 되살리려면 내가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그리고 내 정체도.’
하나만 말해도 뒤집어질 진실들이 사이좋게 옹기종기 모여서 대기 중이었다.
잠시 막막해졌으나, 체샤는 일단 마주 미소했다.
그런 다음 지금 상황에서 그나마 가장 회피하기 좋은 말을 꺼냈다.
“아빠도요.”
어차피 키에른도 만만찮게 거짓말을 해 댔을 테니, 잠시나마 시간을 벌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양파처럼 온갖 비밀을 겹겹이 감춰 놓았을 이는 순순하게 답했다.
“응. 전부 다 알려 줄게.”
키에른이 천천히 체샤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 하일론에게로 옮기며 중얼거렸다.
“…이제 곧 끝이니까.”
‘끝’이라는 단어가 유독 선명하게 귀에 박혔다.
불길함이 마음을 쿵 하고 내려쳤다.
체샤를 제물로 바치는 건 일단 둘째 치고.
만약에 금지된 흑마법을 사용했는데도 엄마를, 죽은 바실리안 백작 부인을 되살리는 데 실패한다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오직 죽은 이를 되살리겠다는 일념에만 매달려 여기까지 온 키에른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결말이 그려졌다.
체샤는 서둘러 키에른의 손을 붙잡았다.
더 이상 어리지 않아서, 발돋움을 하지 않아도 마음껏 그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키에른은 저를 쥐어 오는 손길에 잠깐 미소했으나, 체샤를 다시 돌아보진 않았다.
“하일론!”
성왕 시아노르의 노성이 터지는 바람에, 체샤도 다시 그를 부를 기회가 없었다.
시아노르는 매우 분노한 표정이었으나, 기묘하게도 은근한 희열이 아래에 깔려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눈매를 살짝 찌푸리는데, 하일론이 느릿하게 연회장으로 내려왔다.
탁, 바닥에 가볍게 발을 딛는 소리가 났다.
시아노르는 제 앞에 선 하일론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신성 제국의 반역자를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구나.”
여유로운 척 웃음을 지어내긴 했지만, 긴장감으로 옅게 굳은 목소리까지 감추진 못했다.
시아노르가 손짓하기도 전에, 신성 기사와 신성 사제들이 재빠르게 하일론을 둘러쌌다.
그러나 단죄의 사슬을 가진 하일론을 포위해 봤자 무의미함을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나를 죽이면 끝이더냐?”
차륵차륵, 사슬 소리를 들으며 시아노르는 핏발 선 눈을 부릅뜨고서 말을 이어 갔다.
“평생을 쫓기면서 살아갈 것이냐. 그것이 하일론 네가 진정 원하는 바라면 애석하구나.”
시아노르의 일갈에 하일론은 어울리지 않는 답을 했다.
“제가 원하는 건 하나뿐입니다.”
그가 원하는 단 하나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체샤는 얼굴이 화끈해졌다.
체샤만 알아들을 말인지라, 시아노르도 이해하지 못하고 잠시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나 이내 상관없다는 듯, 시아노르는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바실리안 백작.”
난데없는 호명에 흥미진진하게 관전 중이던 키에른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두 남자의 시선이 날카롭게 맞부딪혔다.
키에른이 하일론을 은밀하게 지원하고 있음을 성왕이 짐작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가 키에른에게 뭔가 한마디를 하기는 하겠구나 했는데, 시아노르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던졌다.
“왜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가?”